<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공개 강좌 <글로벌인문학>, 지역학(익산학) 강연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기 바란다. /편집자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외국 작품 중 하나인 『데미안』은 헤세가 명성이 아닌 오직 글쓰기로만 평가를 받고자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발표했다가 신인상에 선정되자 비로소 자신이 쓴 것임을 밝힌 작품이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내 속에서 우러나는 대로 살아 보려고 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고. 이 책은 결국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소설이다.
 싱클레어는 말한다. 삶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고, 우리 모두는 그 길을 걸어야 한다고. 그러면서 한 청춘의 지독한 방황과 갈망을 통해 그 길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한 길은 어떤 길일까? 삶의 수레바퀴에 치이지 않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치고, 그런 투쟁 끝에 알을 깨고 나와야만 새가 되듯 우리도 우리를 둘러싼 단단한 껍질을 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은 하나의 세계다. 어떤 세계일까? 우리를 둘러싼 모든 세계를 가리킨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갖추어져 있던 세계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세계에 태어난다. 도덕, 종교, 정치, 문화, 관습, 법률 할 것 없이 이미 모두 정해져 있다. 내가 함께 만든 세상도 아니고, 내가 동의한 세상도 아니다. 우린 그런 세상에 그냥 내던져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세계를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당연히 주어진 모든 것에 의심을 품어야 한다. 내가 동의한 것도 아닌 세상에 어떻게 순순히 따를 수 있겠는가?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주입한 것들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대학이라는 곳을 꼭 가야만 할까? 좋은 대학에 들어가 번듯한 회사에 취직해야만 바람직한 것이고,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만이 성공한 삶일까? 모두가 따르는 모든 것들을 일단 의심하고 부정해야 한다.
 사상가 함석헌 선생은 생명의 본질을 '대듦'이라고 했다. 인간은 대체로 사춘기 무렵에 처음으로 대들기 시작한다. 부모에, 학교에, 사회에. 왜 그럴까? 처음으로 내 속에서 기존의 모든 것들에 반발하는 '나'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성장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자 생명 원리다. 즉 생명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들에 대들고 반박하고 저항하면서 성장한다. 식물의 예를 들어 보자. 씨앗이 하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씨앗에서 껍질을 뚫고 줄기가 나온다. 여기서 줄기는 씨앗과 같은 존재일까? 아니다. 생긴 것도 다르고 질적 내용도 다르다. 그런 면에서 줄기는 씨앗의 부정이다. 씨앗으로 살라는 명령에 저항하고 대들었기에 줄기가 나올 수 있었다는 말이다. 꽃도 마찬가지다. 꽃은 줄기에서 나오지만 결국 줄기의 부정이다. 외형도 내면도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꽃이 줄기에 순응해서 줄기로 살라는 강요에 굴복했다면 꽃이 나올 수 있었을까? 꽃은 줄기를 부정하고 대들었기에 꽃이 되었다. 이처럼 세상 만물은 기존의 것들에 의문을 품고 대들고 저항하는 가운데 발전한다. 세상의 모든 운동 법칙이 그렇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도 세상에 대든다. 첫 대상은 아버지다. 싱클레어는 어쩌다 불량한 친구의 협박으로 부모를 속이고 나쁜 짓을 한다. 하지만 아버지만큼은 자신의 그런 비행을 모두 알 뿐 아니라 자신을 어둠의 세계에서 구해 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런 바람과는 달리 아버지가 전혀 그런 존재가 아님을 알고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하찮은 존재로 비친다. 그로써 가정에서 절대적인 아버지의 지위는 깨지고, 싱클레어의 어린 시절을 떠받치고 있던 가장 중요한 기둥들 하나에 균열이 생긴다. 여기서 아버지는 단순히 한 가정 내의 가부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단단하게 뿌리내린 모든 권위의 상징이다. 즉 도덕적 권위, 법적 권위, 위계적 권위 등 우리 사회를 저 위에서부터 짓누르는 모든 사회적 굴레를 가리킨다.
 두 번째로 대드는 대상은 기독교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기독교 내에 존재하는 모순점들을 지적하며 새로운 눈으로 기독교를 바라볼 것을 가르친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 두 강도 이야기, 야곱과 천사의 씨름 이야기를 통해 아무리 절대적인 종교적 가르침이라고 해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머리로 판단하라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야곱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천사와 이기는 사람에게 소원을 들어 주기로 약속하고 씨름을 시작한다. 새벽녘까지 이어진 씨름에서 결국 천사가 두 손을 들자, 야곱은 자신에게 축복을 내려 줄 것을 요구한다. 보통 축복이라고 하면 저 위의 높은 존재가 그 밑의 존재들에게 사랑의 뜻으로 내려주는 것인데, 여기서는 축복을 그렇게 수동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한 능동적인 행위로 해석하고 있다.
 싱클레어가 마지막으로 대든 것은 금지된 것과 허락된 세계를 엄격하게 갈라놓고 따를 것을 강요하는 사회이다. 사회는 세상을 선과 악, 밝음과 어둠의 세계로 명확하게 구분한 뒤 그것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벌을 내린다. 사실 세상은 그렇게 이분법적인 선악으로 갈리는 것도 아니고, 또 많은 부분에서는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거나, 위선과 고정관념으로 나누어진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예를 들면 사회는 성적 충동을 나쁜 것으로 낙인찍고 자제할 것을 강요한다. 성적 충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본능일 뿐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인류의 생존이 불가능할 텐데 말이다. 예전에는 그 충동을 신성시하는 민족도 있었고, 지금도 그 충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가 있다. 이처럼 금지된 것이라고 해서 영원히 금지된 것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사회의 그런 규범에 무턱대고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하에 허락된 것과 금지된 것을 구분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 대들어 보지만 세상의 벽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현실 속에서 싱클레어는 현실과 갈등을 일으킨다. 속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들끓지만 그것이 무엇이고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가려고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현실과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부적응과 방황으로 이어진다. 학교생활은 엉망이 되고, 세상 모든 것이 하찮게 여겨진다. 학업에는 관심이 없고, 술과 비행으로 심적 공허함을 메워 나간다. 이대로 가다가는 학교에서 쫓겨나든지 범죄자가 되든지 시간문제로 보인다. 그럴수록 멀리 떠난 데미안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간절해진다. 이때 공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한 여인을 보게 되고, 스스로 '베아트리체'라고 이름 붙인 이 여인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이 사랑조차 싱클레어에겐 육체적 쾌락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끊임없이 갈구하는 대상으로 승화되고, 그 여인은 마음속에서 곧 데미안과 하나가 된다. 이는 사랑의 순기능이다. 사실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누구라도 상대에게 시시한 인간으로 비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로써 싱클레어는 방황을 멈추고 심적인 안정을 되찾는다.
 이후 그는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싱클레어가 알을 깨고 나오는 데 도움을 주는 인물이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가 그동안 왜 그렇게 방황했는지, 속에서 들끓던 그 갈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싱클레어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러고는 그런 사람들이 쓴 책들을 함께 읽어 나간다. 자기에게로 이르는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싱클레어는 그들의 책을 열렬하게 섭취한다. 이미 몸으로 그런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기에 그 책들에 쓰인 내용이 얼마나 온전히 흡수되겠는가! 그런데 피스토리우스와는 결국 헤어지고 만다. 그는 입과 머리로만 자기에게로 이르는 길을 아는 사람일 뿐 싱클레어처럼 몸으로 그 길을 헤쳐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싱클레어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방황했고, 자신이 지금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깨닫는다. 그와 함께 드디어 어린 시절에 헤어진 데미안을 만난다. 데미안을 알게 된 이후로 애타게 그리워했던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까지. 이어 1차 대전이 터지고 두 사람은 전쟁터에 나간다. 중상을 당한 싱클레어가 후송되어 야전병원에 누워 있는데, 거짓말처럼 옆 침대에 데미안이 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에바 부인의 당부라며 입을 맞추면서 말한다. 이제부터는 자신을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자기가 그리우면 마음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그가 있을 거라고.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참자아이다. 헤세는 싱클레어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참자아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데미안'이라는 인물로 형상화했다. 그런 다음 마지막에 참자아를 싱클레어 속에 다시 집어넣음으로써 이제는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기에게로 이르는 길로 나아가게 한다. 그전에 싱클레어가 에바 부인을 만나 지금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이야기했을 때 부인은 말한다. 그게 그렇게 힘들기만 했냐고. 아름답지는 않았냐고. 그렇다.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은 힘들지만, 그렇기에 그 과정은 더욱 아름답다. 거기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갈망과 분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끝없이 자신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평범한 인간들로서는 싱클레어처럼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다들 세상에 순응하면서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간다. 그러면 편하다. 굳이 세상과 불화하고 자기 자신과 싸울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왜 이 길을 가야 할까? 대체할 수 없는 한 번의 삶이기 때문이다. 한 번뿐인 내 삶을 정말 내 뜻대로 한번 살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노예가 아닌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서 삶을 틀어쥐고 내 생각대로 살아 보는 것은 누구나의 꿈일 것이다. 세상에 대들고 세상의 고정관념과 맞서 싸우다 보면 어느새 '내'가 형성되고, 그 '내'가 가리키는 대로 살아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 길에 정답은 없다. 각자의 길은 각자가 알아서 찾아야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무엇인지 깨닫고 그대로 살아 보고자 하는 삶이 아름다울 터이니!

박종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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