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에는 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한 나라에도 역사가 있고, 나라를 이루는 도시에도 역사가 있고, 도시를 이루는 건물에도 역사가 있다. 심지어 우리가 별생각 없이 밟고 다니는 길에도 수많은 역사가 묻어 있다.
 우리대학 레슬링부 역시 역사가 존재하는데, 이는 무려 197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8년. 그 해에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FIFA 월드컵이 개막되기도 했고, 이란에서 대지진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제42회 세계 사격 선수권 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이렇듯 세계 각지에서 많은 일이 일어난 1978년, 우리대학에서도 레슬링부가 조용히 잉태되기 시작했다.
 그렇다. 우리대학 레슬링부의 역사는 1978년부터 본격적으로 써내려졌다. 이후 1994년 히로시마 올림픽에서 우리대학 출신 양영진 선수가 금메달을 따내고, 여타 국제대회에서도 강상철, 안종기, 박영신 등이 입상을 하면서 우리대학 레슬링부는 전국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외에도 민경선 전(前) 대구 한의과대학 교수, 심경무 금성여중 교장 등 우리대학 레슬링부 출신 중에는 교직에서 활동했거나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서울 구로구청, 경기도 부천시청, 경북 칠곡군청 등 여전히 레슬링 선수로서 활발히 활동 중인 이들도 있다.
 이야기를 마친 김성태 감독은 마치 그 시절을 회상하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김 감독 역시 그 시절 그때를 함께 했던 사람이다. 이제는 과거가 돼버린 그 선수들과 함께 땀과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양영진이 금메달을 들어 올리던 그 순간, 그 누구보다도 기뻐했을 사람이었다.
 여전히 눈빛이 과거에 머물러있는 김 감독에게, 기자는 그와 함께 우리대학 레슬링부의 과거에 대해 좀 더 얘기해보고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대학 레슬링부가 창단된 이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김 감독은 기자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과거로 빠져들었다.
 때는 양영진이 1994년 히로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평소처럼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다. "하림의 김흥국 회장이 양영진 선수에게 운동에 집중하라는 의미로 경제적 지원을 많이 해줬던 적이 있습니다. 그게 기억에 남네요"라고 말한 김 감독은 쉬지 않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제가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가장 희열을 느꼈던 순간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성적을 잘 내지 못하던 선수가 있었는데, 그 선수가 우리대학에서 레슬링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고등학교 시절 라이벌들을 차례차례 꺾어나가던 순간입니다. 그게 정말 기억에 남습니다." 회상을 끝낸 김 감독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숨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빛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 우리대학 레슬링부에는 이렇게 좋은 일만 가득하지 않았다. 김 감독은 "마음이 아픈 얘기인데, 우리대학 레슬링부가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며 과거의 아픔을 들추기 시작했다.
▲ 사진 출처 : 국가기록사진 

  김정환 수습기자 woohyeon17@w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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