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동기시대 중기 무형리 포변유적

청동기시대의 익산 

 익산 청동기문화에 대한 연구는 익산에서 수습된 청동유물을 중심으로 학계에 간헐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김원룡은 익산지역을 평양, 경주와 함께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중요한 거점의 하나로 익산청동문화권을 설정하였다(김원룡 1977). 이후 전영래는 논산을 중심으로 반경 50Km와 다시 북으로 50km를 연장하는 지역에서 다량의 청동유물이 조밀한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어, 금강유역 청동기문화권을 설정하였다(전영래 1987, 2003).
이처럼 청동유물은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정작 청동기가 출토된 유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 없었다. 그러나 최근 발굴자료가 증가하면서 청동기시대 전기, 중기, 후기유적이 조사되었다.
익산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집자리는 평면형태에 따라 장방형, 방형, 원형으로 구분된다. 장방형을 제외한 방형과 원형집자리는 중앙부에 타원형구덩이가 설치되어 있다. 장방형집자리는 내부시설로 중앙부를 따라 위석형 내지는 무시설식의 노지가 설치되어 있고, 유물은 이중구연단사선문토기, 절상돌대문토기, 직립구연 호형토기, 구순각목문토기, 심발형토기, 적색마연토기호 등이 출토되었으며, 유혈구이단병식석검편, 삼각만입촉, 유경식석촉, 반월형석도, 양인석부, 석착 등이 출토되었다.
방형과 원형집자리는 집자리 중앙부에 타원형구덩이가 설치되고 타원형구덩이 내부 양단에 주혈이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집자리는 일반적으로 금강유역의 송국리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송국리식집자리는 평면형태가 방형과 원형으로 구분되며, 원수리 유적에서 조사된 방형과 원형이 중복관계를 통해 볼 때 시간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출토유물에 있어서는 차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큰 시기차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방형집자리가 원형집자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출토유물이 적고, 특히 토기의 경우 방형집자리에서 외반구연토기가 거의 출토되지 않고 있어 외반구연토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된 원형집자리와 차이를 보인다.
집자리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에서 방형으로 변화되는데, 영등동유적에서는 위석식노지가 설치된 세장방형에서 무시설식노지가 설치된 장방형으로 평면변화가 이루어지고, 이후 노지가 사라지고 평면형태가 방형화되며, 송국리식집자리의 영향으로 중앙부에 타원형구덩이가 설치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재 자료로 본다면, 전기의 장방형집자리는 송국리문화(원형집자리)의 영향으로 집자리 중앙부에 타원형구덩이가 채용되었을 가능성과 함께 전기의 장방형평면에서 방형평면으로 변화되면서 새롭게 중앙부에 타원형구덩이가 채용되며, 이후 평면형태가 원형의 전형적인 송국리식집자리로 변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후기가 되면 무덤에 비해 집자리는 급격하게 감소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후기에는 새로운 무덤이 축조되고, 그동안 출토되지 않았던 다양한 청동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 청동기시대 후기 오룡리 출토 청동기

전기
전기는 구릉 정상부나 평탄한 대지상에 집자리를 축조하고 밭농사와 수렵, 어로 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집자리는 평면형태 장방형에 집자리 내부시설은 위석형이나 무시설식 노지가 설치되었다. 유물은 이중구연에 단사선문이 시문된 토기를 특징으로 하며 돌대문토기와 심발형토기, 호형토기 등이 출토되고 이단병식석검과 반월형석도, 삼각만입촉 등 다양한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아직까지 무덤은 조사된 예가 없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지석묘, 석관묘, 토광묘 등 다양하게 축조된 것으로 보아 익산에서도 앞으로 무덤이 조사될 것으로 보인다.
조사된 유적은 영등동, 섬다리, 용기리, 왕궁리, 쌍제리 등에서 집자리와 전기의 특징적인 유물들이 출토됐다.

▲ 마한시기 구평리유적 집자리

중기
중기는 송국리문화를 특징으로 하며 다양한 입지를 보이고 있으며 전기에 비해 유적이 급증한다. 집자리의 평면형태는 전기 장방형에서 벗어나 방형, 원형 등 평면형태가 다양해지고, 내부시설은 타원형구덩이와 양쪽에 주혈이 있는 독특한 구조의 송국리식집자리가 중심을 이룬다. 유물은 외반구연의 옹형토기와 적색마연토기가 특징이며, 일단병식석검, 유경식석촉, 삼각형석도, 유구석부 등 전기에 비해 석기가 다양해진다.
중기는 송국리문화로 대표되며,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서남부지역에 유적이 집중된다. 송국리문화는 집자리가 소형화, 규격화되고 노지는 사라진다. 토기는 외반구연 송국리식토기를 특징으로 한다. 중기에는 집자리와 함께 무덤들이 축조되는데 석관묘, 토광묘, 옹관묘 등 집자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무덤이 축조된다. 금강유역의 다른 지역에서는 지석묘도 축조되지만, 익산에서는 아직까지 지석묘가 조사된 예가 없다. 하지만 이규보의 『남행월일기』와 일제강점기 조거용장의 보고에 따르면, 익산에도 지석묘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된 유적은 익산에서 처음으로 조사된 부송동을 비롯해 영등동, 모현동, 율촌리, 원수리, 장신리, 부송동 242-73, 흥암리, 광암리, 부송동 부평, 송학동, 어량리, 어량리 중발, 포변, 석천리 마산 등에서 집자리와 석관묘, 석개토광묘, 옹관묘 등 다양한 무덤들이 조사되었다.

▲ 마한시기 모현동 묵동유적 분구묘

후기
후기는 다양한 청동유물이 출토되는데 시기구분에 있어 가장 논란이 되는 시기로, 청동기시대 후기로 보는 견해와 초기철기시대로 보는 견해로 양분된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에서 청동기제작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진 시기라는 점에서 청동기시대 후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후기를 대표하는 토기는 점토대토기로 이전의 송국리식토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물질문화가 유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새로운 집단의 이주에 따라 성립된 문화라는 것을 의미한다. 유물의 특징에 따라 2기로 구분하고 있는데, Ⅰ기는 원형점토대토기와 청동기, Ⅱ기는 삼각형점토대토기와 철기가 공반된다.
Ⅰ기는 용기리에서 집자리 1기가 조사되었다. 송국리식집자리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무덤인 목관묘가 축조되는데, 구조뿐 아니라 출토유물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조사된 유적은 다송리에서 석곽묘 1기가 조사되었는데 유물은 조문경, 입형동포, 관옥, 흑색마연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오룡리, 구평리, 서두리, 송학리에서는 목관묘가 확인되었는데, 기존 (석개)토광묘와는 달리 목관이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주로 구릉 정상부와 사면부에 단독으로 무덤이 축조된다. 유물은 조문경, 동검, 동사, 흑색마연토기호, 원형점토대토기, 삼각형석촉 등이 출토된다.
Ⅱ기는 철기가 유입되면서 급격한 사회변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집자리는 조사되지 않았으며, 무덤은 목관묘와 함께 옹관묘가 축조된다. 유물은 한나라에서 수입된 한경, 동검, 동모, 동과, 검파두식 등의 청동기류와 함께 철부, 철사, 철촉, 철도자 등의 간단한 철기류가 부장되기 시작한다. 유적은 평장리, 신동리, 계문동, 어양동, 구평리 유적이 조사되었다.

마한의 익산


준왕과 마한의 성립
사서에 기록된 준왕과 마한 관련 기사는 중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에 준왕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남래지를 한(韓)으로 준왕이 한왕(韓王)이 된 것으로 기록하였으며, 『후한서(後漢書)』에도 준왕의 남래지를 마한(馬韓)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익산지역 마한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사기』 「견훤조」에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했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제왕운기』에 "준이 금마군에 도읍하고 또다시 임금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동국여지승람』에 모두 "익산군은 본래 마한국이었다(益山郡本馬韓國)"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절요』에는 권근이 준왕 남래지와 마한성립지를 익주(益州)로 언급하였고, 『동국통감』에도 준왕이 남래하여 금마군에 도읍하고 한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쓴 『동국지리지』·『동사강목』·『아방강역고』·『해동역사』에 모두 준왕 남래와 금마군 도읍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익산은 준왕이 남래한 지역이면서 마한국이 있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마한의 물질문화
 기록에 따르면 마한은 이미 기원전에 성립되어 있지만, 당시의 물질문화는 명확하지 않다. 준왕이 남래한 시기와 관련된 것은 점토대토기문화와 철기 정도이다. 선진문물인 철기 수입은 경제력, 즉 농업생산의 비약적 증가를 가져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마한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준왕 남래 이후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의 유적 부재이다. 이후 마한의 물질문화는 기원후 2세기에 축조되기 시작한 주구묘와 함께 집자리들이 확인된다.
마한의 집자리는 평면형태 방형에 한 쪽 벽가에 치우친 부뚜막, 4주식과 비4주식으로 구분되지만, 비4주식의 비율이 높다. 조사된 유적은 영등동, 신동, 사덕, 웅포리, 송학동, 장신리, 모현동, 모현동 내장, 기산리, 용기리 Ⅰ, 구평리 Ⅳ, 상갈 2-B, 광암리, 흥암리, 삼담리, 율촌리, 서두리 2, 어량리 마산, 금성리 등 많은 유적이 조사되었다.
마한의 무덤은 주구묘와 분구묘로 대표되며, 매장주체부는 토광묘와 옹관묘가 특징이다. 조사된 유적은 영등동, 율촌리, 모현동, 장신리, 장선리, 어량리, 서두리, 와리 정동, 금성리에서 조사되었다.

 김규정 원장(전북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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