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 조상은 동굴에 간단한 그림을 그려서 의사를 표현했고, 이후 한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지명, 인명 등을 한자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선조들이 우리말을 표기하려 한 방식에 대해 훑어보고, 나아가 세종대왕의 우리말에 대한 인식까지 알아보려 한다. /편집자

 인명, 지명, 관명 등의 고유명사 표기로는 표현의 욕구가 만족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구결, 이두, 향찰 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일반적인 구결은 일종의 토라고 생각하면 쉽다. 아래에서 밑줄을 그은 것이 토이다. 한문을 번역하기 쉽게 도와주는 것이다.
 ⑴ 樹欲靜而風不止하고 子慾養而親不待라
    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구결에 맞추어서 '-고', '-라'를 넣어서 해석하라는 뜻이다. 
 ⑵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
   려주지 않으니라.
 그런데 한글이 창제되지 않았으니 어떻게 했겠는가? 한자를 빌려서 구결 표기를 했다. 
 ⑶ 樹欲靜而風不止爲古 子慾養而親不待羅
 정해진 구결(토) '爲古', '羅'를 통해 한문 번역을 도왔던 것이다. 경전에 위와 같이 파든지 써 넣든지 한 것이 구결이다. 그러다가 선조들은 복잡한 글자를 파 넣을 때 애로사항을 겪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약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현재 중국의 간체와도 논리는 같다고 할 수 있다. '爲古'는 '羅' /와 같이 한자의 일부를 따서 만들게 되었다. 목판에 이제 파 넣기도 좋게 된 것이다.
 조금 쉬운 것, 짧은 것으로 접근해 보자.
 ⑷ 受落水爲古 → 受落水
   (음락수하고--->낙수를 받고) 
 ⑸ 落水受
   (낙수를 받고--->떨어질 물을 받고) 
 ⑷는 구결의 단계이다. 한문 원문에 구결을 씌우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한 단계 더 발전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受落水'를 우리말 어순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⑸와 같은 '落水受古-낙수를 받고'가 표기되기에 이르렀다. '-을/를'에 해당하는 어미 '-고'에 해당하는 를 이용하여 '낙수를 받고'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바로 이두의 단계이다. '受落水'는 해석을 하면 '받고'라는 서술어가 맨 마지막에 해석된다. 즉 첫 글자 '受'를 마지막에 해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을 우리말 어순으로 표기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두이다. ⑸에서 '受'의 위치가 뒤에 놓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두의 정제된 모습이 바로 ⑸의 단계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만족할 수 없었던 선조들은 '낙수'를 순우리말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향찰의 단계이다. 향찰은 우리말 표기의 전면적인 노력이라고 할 만하다. 얼마나 대단한 작업인지 검토해 보자.
 드디어 우리말 표기의 전면적 노력의 결정체 향찰을 살펴보게 된다. 소위 '바라고'라는 신라어 표현을 '望古'로 표기하기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바라고'는 3음절이니 선조들은 '望良古(발아고)'와 같은 음절 맞추기 작업을 한 것이다. '望良古'를 보고 누가 wish로 받아들일까? 아무튼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⑹ 浮良落尸水 受古
   떨어질 물을 받고
 '낙수'의 신라어는 '낙수'가 아니라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 어딜 믈'이든 ' 아딜 믈'이든 그것을 표현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浮良落尸水'이다. 음으로만 읽으면 '부량락시수'이다. 그렇게 적어 놓고 당시 지식인들은 '떨어질 물' 비슷하게 읽었던 것이다. 어떻든 '낙수를 받고'보다는 '쁘라딜 물을 받고(들어질 물, 듣는 물)'라고 하여 우리말 음절을 제대로 표기하려 애쓴 노력이 보인다. 대단한 선조이다.
 구결, 이두, 향찰에 대해 정리하면 구결은 조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이두는 우리말 어순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무리는 없다. 그 다음 향찰은 우리말 표기를 전면적으로 해 보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향찰을 차자표기(借字表記)의 집대성이라 하기도 한다. 향찰 이것은 너무 어렵다. 그래서 다음 호에서는 우리의 위대한 은인, 세종을 맞이해야 한다.

  임석규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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