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민정음언해』

 

 옛날 우리 조상은 동굴에 간단한 그림을 그려서 의사를 표현했고, 이후 한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지명, 인명 등을 한자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선조들이 우리말을 표기하려 한 방식에 대해 훑어보고, 나아가 세종대왕의 우리말에 대한 인식까지 알아보려 한다. /편집자

 

 지난 주에 우리는 이두, 구결, 향찰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향찰은 우리말을 전면적으로 표기하려 한 노력의 결정체라 할 만하다. 무왕과 관련된 ‘서동요’에는 ‘선화공주님은 --- 얼아두고’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얼아두고’를 한자로 표현하면 ‘嫁’이다. 이 한자의 현재 뜻은 ‘시집가다’이지만 당시에는 ‘얼다’라는 의미였다. 우리가 잘 아는 ‘어른’이라든가 ‘어르신’은 ‘얼다’에서 나온 말이다. ‘얼다’는 사람으로 따지만 ‘하룻밤을 같이하다’ 정도의 의미가 된다. ‘얼’에서 바로 ‘얼운>어른’ 그것의 높임말은 ‘얼으신>어르신’이 나온 것이다. ‘어른’은 얼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 ‘어르신’은 ‘얼어본 경험이 있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당시 신라인의 ‘얼어두고’는 현대 경주말을 참고하건대 ‘얼아두고’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표기하려 한 노력이 바로 ‘嫁良置古(가량치고)’이다. ‘稼’만으로는 부족했다. 당시 사람들은 당연히 4음절로 발음을 했기 때문에 ‘嫁良置古’라는 네 글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향찰[향가의 표기수단]의 원리이다. ‘嫁良置古’의 첫 번째 글자, 세 번째 글자는 뜻으로 읽으니 ‘얼[얼 가]’과 ‘두[둘 치]’로 해독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다. 위대한 은인 세종은 당시 사람들이 ‘ǝradugo’라고 발음하면 ‘얼아두고’라고 쓰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린[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으니 그를 어엿비[불쌍히] 여긴 끝에, 오랜 시간의 비밀 프로젝트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다.

 흔히들 훈민정음은 세종의 명을 받아 집현전에서 만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여러 가지 근거에 의해 친제설에 무게가 실린다. “내 이를 위ᄒᆞ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물 여듧 글ᄌᆞᄅᆞᆯ ᄆᆡᇰᄀᆞ노니”는 차치하고라도 ≪훈민정음≫이라는 책에는 ‘君虯快業(군규쾌업)’이라는 숨어 있는 글자가 들어 있다. 바로 ‘임금과 어린 용이 쾌업을 이루었다’라는 뜻이다. 당시 집현전에는 그 책임자라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최만리가 있다. 최만리는 우리 역사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상소문으로 유명하다. 집현전에서 반대상소문이 올라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君虯快業(군규쾌업)’이라는 말 속에는 믿을 만한 사람은 가족밖에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설총이 만든 이두도 있는데 왜 굳이 무익한 글자를 만드시려 하시나 하는 것이 최만리의 생각이다. 당시의 기득권층은 글자가 만들어지는 것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글자나 해시계 등이 만들어지는 것은 당시 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바로 중국에 대한 도전인 것이었다. 그러니 식자층은 중국과의 관계도 생각하며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거센 반발에 부딪힐 것을 예상한 세종은 한글 창제를 비밀 프로젝트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믿을 만한 조교가 필요했는데 그들이 바로 특정한 날을 위해 미리 키워오던 몇몇 집현전 학사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그 글자 읽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당시 로마자가 들어와 있었다면 ㄱ은 g 또는 k 정도에 대응하면 끝이다. 당시 상황으로는 한자음에 의지하여 글자의 음을 제시해 줄 수밖에 없었다. 만일 ဏ(사실은 미얀마 글자)을 글자 하나로 만들었다고 치자. 음가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황당하지 않겠는가? 세종은 ㄱ 음가를 제시하기 위해 君을 제시하였다. ㄱ은 ‘君’이라는 글자의 첫소리라고 하였다(“ㄱᄂᆞᆫ 엄쏘리니 君ㄷ字 처ᅀᅥᆷ 펴아나ᄂᆞᆫ 소리 가ᄐᆞ니라”). 중국은 여러 운서에서 ‘見’이라는 글자를 통해 k 또는 g의 음가를 보여주었다. 세종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君’을 택한 것이다. 그 다음 글자는 ㅋ음을 가르쳐주는 快(쾌)였고 그 다음이 바로 ㄲ음을 가르쳐 주기 위한 虯(뀨ᇢ, 당시 중국에서 이를 뀨 비슷하게 읽음), 그 다음이 ㆁ[ŋ]의 음을 가르쳐 주기 위한 業(ᅌᅥᆸ)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임홍빈 교수[서울대 명예교수]가 숨은그림찾기식(?)으로 십여 년 전에 찾아낸 것이다. 세종이 다른 것은 중국의 용어(아음, 설음 등)를 따랐는데 글자의 음을 지시하는 것은 왜 중국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출발한 큰 업적이다.

 세종이 외국학자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있다. ㄱ으로 설명하겠다. ㄱ을 발음할 때 전 세계인 공통으로 혀 모양이 ㄱ과 같이 된다. 혀의 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상형한 것이다. 세종 정도의 정신이라면 세종이 로마에서 태어났어도 ㄱ 비슷하게 자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로마자에서 P와 B까지는 좋다. P에서 출발한 모형이기 때문이다. R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R의 발음은 전혀 다르다. 세종이라면 R을 P에서 출발한 모형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세종은 바로 ㄱ, ㄲ, ㅋ를 모두 ㄱ에서 출발해서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것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또 외국학자들이 감탄하는 것이 있다. ㅋ이다. ㄱ에 비해 한 획이 추가되었다. 그것이 바로 숨이 더 많이 나간다는 표시이다. 놀라울 따름이다. 음성학적 지식이 없었다면 ㄱ, ㄲ, ㅋ가 전혀 다른 모형으로 표시되었을 수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한글은 남아 있지 못하고 도태되었을 것이다. 불편하니 말이다.

 우리는 세종 덕분에 독서도 하면서 많은 정신적인 자양분도 제공받고 있다. 세종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하기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죄다 영어로 된 글을 읽어야 할지 모른다. 문자생활에서의 대혁명이다. 세종은 여주 영릉에 잠들어 있다. 무지랭이가 될 법한 우리를 그래도 조금 개화시켜 놓은 위대한 은인이 세종이다. 영릉을 방문하면 절 두 번을 꼭 올리기 바란다.

 

임석규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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