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대학 신문방송사 연수단은 지난 동계 방학기간(12월 26-29일)중에 대만 연수를 다녀왔다. 이번 호에서는 셋째 날 다녀왔던 화련(花蓮)의 칠성담 해변(七星潭 海邊), 태로각 협곡(太魯閣 峽谷), 칭수이 절벽(청수단애, 靑水斷崖)을 중점으로 다루고자 한다. 

 아침 일찍 연수단은 화련(花蓮)에 가기 위해 2층 버스에 몸을 실었다. 대만의 아침 풍경을 바라보며, 타이페이 메인 기차역으로 향했다. 빠른 발걸음으로 플랫폼에 들어가 화련으로 떠나는 기차를 탔고, 설렘을 가지고 올라탄 기차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그렇게 기차를 한참 타고 가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흔히 찾아보기 힘든 판매 승무원이 카트에 여러 가지 과자, 초콜릿, 음료수를 파는 것을 보고, 추억에 잠기게 됐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기차 여행을 떠나면 간식거리가 빠질 수 없었다. 얼른 판매 승무원이 나타나길 바라면서 기차 타는 내내 앞에 보이는 문이 열리는 것만 쳐다보고 있었다. 돈을 지불하고, 카트안의 간식거리가 내 손에 들어왔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서서히 잊혀져가는 추억을 화련으로 가는 기차에서 되찾을 수 있어서 화련의 모습이 더욱 기대가 됐다. 타이페이에서 화련까지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풍경도 감상하고, 부족한 잠도 청하고 나니 어느덧 화련에 도착했다.
 대만 중동부에 자리 잡고 있는 화련은 동해안 전역에 몇 개 안 되는 항구 중의 하나로 타이완 산맥에서 발원하는 화련강의 하구에 위치해 있으며, 뒤쪽으로 높은 동부산맥이 있고 앞으로는 태평양이 바라보이는 대만 유수의 절경을 자랑하는 도시이다. 화련은 독자적인 전통문화를 가진 아미족 문화촌이 형성돼 있으며, 대리석과 비취 희산지(稀産地)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화련역에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크고 시끄러웠던 타이페이 기차역과는 다르게 작고 조용한 역이었다. 하지만 낡고 조그마한 역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관광객들이 많아 화련의 인기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화련에서도 연수단을 위한 2층 버스가 준비 돼 있었다. 다시 한 번 버스에 몸을 싣고 나니 배에서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화련에서 일정을 소화하기 전 근처 호텔에서 점심식사를 가졌다. 적당히 식사를 마치고, 아름다운 태평양이 펼쳐진 칠성담 해변(七星潭 海邊)으로 향했다. 칠성담 해변은 일곱 개의 작은 연못 혹은 북두칠성이 잘 보이는 곳이라는 유래가 있어 칠성담으로 불리게 됐고, 태평양과 회색빛 몽돌로 어우러진 화련을 대표하는 해변이다. 바다의 파도가 거칠고 매서워 가까이 갈 수는 없었지만, 넓은 바다를 보니 막혀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해변 모래 안에 촘촘히 박혀있는 예쁜 돌들이 많이 있었다. 기자 중 한 사람은 돌이 적당히 작고 오목해 지압을 하는데 정말 좋다며 돌에 대한 애정을 뽐내었다. 한국으로 돌을 가져가고 싶었지만, 공항에서 일어날 불상사를 생각해 눈물겨운 이별을 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칠성담 해변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연수단은 다시 2층 버스에 올라탔다. 반짝거리는 해변을 지나 아시아의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불리는 태로각 협곡(太魯閣 峽谷)으로 향했다. 관광객이 워낙 많고, 낙석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 안에 입장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입장 시간을 맞추기 위해 버스가 지나가기 힘든 좁고 가파른 길을 커다란 핸들로 요리조리 꺾어 힘차게 달리시는 기사님의 운전 실력에 '영원히 태로각 협곡에 갇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에 깊이 빠져들었다. 마이크를 톡톡 치는 가이드님 덕분에 끝도 없이 깊게 내려갔던 생각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고, 태로각 협곡의 본 모습을 비로소 바라 볼 수 있었다. 
 
 태로각 협곡은 중앙산맥에서 태평양으로 흐르는 격류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석회암 협곡을 유명하다. 경이로운 협곡을 만들어낸 중앙산맥이지만,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져 있어 의도치 않게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통행을 막고 있었다. 그때 당시, 중국과 대치 관계에 놓여있었던 대만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중국과의 전쟁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퇴각로를 만들 궁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 낸 가장 최적의 대안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퇴각하는 방법이었다. 마침, 태로각 협곡이 그 자리에 위치해 있었고, 퇴각로를 만들기 위해 장제스(蔣介石, 장개석)는 미국에 의뢰를 했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이 과정이 10년이 넘게 걸릴 것이라는 참담한 대답을 듣게 된다. 중국과 내일 당장 전쟁이 시작될지 모르는 판국에 10년이라니, 장제스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장제스는 자신의 아들 장징궈(장경국, 蔣經國)을 불러 '중국과의 전쟁에 대비해 동쪽에서 서쪽을 잇는 도로를 3년 안에 뚫어라' 라는 말도 안 되는 미션을 내려준다. 미션을 받은 장징궈도 깊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미국이 10년 걸린다는 일을 3년 안에 마치라니 이게 대체 가능한 일인 것인가' 하지만 자신의 손에 대만 국민들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동서횡단도로를 뚫기 시작했고, 이 도로의 시작이 현재 태로각 협곡의 입구이다. 
 지금과 같이 땅을 손쉽게 팔 수 있는 굴착기나, 드릴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수들과 군인들을 투입해 손수 못과 망치, 곡괭이를 이용해 돌을 깨고, 도로를 만들었다. 안전장치도 없이 험준하고 높은 협곡에 도로를 만들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기적적으로 미국이 제시한 공사기간보다 6년을 앞당겨 공사를 마친 장경국은 목숨을 잃은 죄수와 군인들을 위해 태로각 협곡 입구 중턱에 그들의 넋을 기리는 장춘사(長春祠)를 세웠다. 터줏대감처럼 연수단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춘사를 바라보며, 연수단은 태로각 협곡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낙석에 따른 위험 때문에 버스를 타고 이동했으나, 일정구간에 이르자, 내려서 직접 태로각 협곡을 느껴 볼 수 있었다. 협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인함과 장엄함, 석회암과 나무들의 조화에 자연의 위대함이 느껴졌다. 협곡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은 많은 탄산칼슘이 함유돼 잿빛을 띄고 있었는데, 마치 커다란 뱀이 먹이를 포착한 듯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흐르는 물을 따라 천천히 걷다보니 아이스크림 스쿱을 이용해 아이스크림을 동그란 모양으로 파낸 것과 같이 협곡의 옆면이 동그랗게 파여 있었다. '연자구(燕子口)'라고 부르는 이 동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석회암의 풍화,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곳이며, 많은 제비들이 둥지를 틀고 생활하고 있었다. 태로각 협곡은 사람들에게 뛰어난 풍경을 선물해줄 뿐만 아니라 쉴 곳 없는 동물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보금자리 역할도 하고 있었다.  
 웅장하고 거대했던 태로각 협곡과는 달리 내려오는 길에 들렸던 칭수이 절벽(청수단애, 靑水斷崖)은 편안하고 잔잔했다. 전망대에 올라가 가파른 절벽 끝에서부터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하늘과 맞닿는 수평선 너머까지 눈길을 주다보면 어느새 대만의 향기를 물씬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칭수이 절벽을 마지막으로 신비하고도 아름다웠던 화련 여행은 끝이 났다. 연수단은 아직 가시지 않은 화련의 여운을 간직한 채 타이페이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김하영 기자 hamadoung13@wku.ac.kr
  이병훈 기자 lbh6729@w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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