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지역은 평야 지역(전주, 익산, 완주, 김제, 정읍)과 서해의 풍요로운 바다에 접한 해안권(군산, 부안,고창) 그리고 산간고지대(무주, 진안, 장수)와 산과 들이 함께한 지역(남원, 임실, 순창)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지역 가운데 먼저 역사전개의 중심은 익산과 전주에서 시작되었다. 지리적으로 이 일대지역은 익산의 미륵산에서 전주의 모악산까지 연결되는 산줄기로 포괄되며, 그 사이에 만경강과 동진강이 흘러가는 일종의 분지형태  지역이다. 

 이곳은 풍요로운 벌판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한국역사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였다. 또한 남원과 순창, 임실 및 무·진·장 지역은 문화의 교차로서 동서와 남북의 문화가 교류하고 융합되어 사랑과 화해의 슬기를 만들어낸 역사공간이었다. 한편,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해안과 섬 지역은 역사의 중심에서 벗어난 세력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대안의 땅으로 자리하였다. 
 
 
 전북 지역 중 우리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곳은 익산지역이다. 즉, 고조선 준왕의 망명지로 이곳이 역사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고조선은 이른바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기원전 2세기 위만이 일으킨 정변으로 쫓겨난 후 바다를 통해 남쪽 한(韓)지역으로 망명하여 다시 왕이 되었는데, 그곳을 『고려사』 지리지 등 대부분 기록들이 현재의 금마지역으로 지목하고 있다. 특히, 이 같은 사실은 1897년 조선의 고종이 외세에 의해 실추된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게 된 역사적 근거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현재의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호로 연결되었다.  
 
 익산지역은 백제(百濟) 무왕이 부여에서 천도(遷都)한 지역(또는 예정지)이었다. 마치 정조가 수원 화성에 서울을 옮기기 위해 화성을 쌓은 것처럼, 익산의 미륵사는 불국토를 꿈꾼 무왕이 만들고자 한 국가사찰로서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단일사찰이며, 익산의 왕궁유적은 백제후기 왕궁이 온전하게 확인된 유일한 유적으로 백제 중흥의 터전이었다. 또한 660년 백제가 붕괴된 직후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주류성이 현재 부안 우금산성으로 확인되고 있어 백제역사의 부흥의 공간이기도 하다.
 한편, 금마일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유민들을 이주시켜 보덕국(報德國)이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즉, 통일신라는 백제지역에 대한 견제와 당나라의 신라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이 이끄는 고구려유민들을 과거 백제의 최대 거점이었던 금마지역에 옮겨 보덕국을 건립시켜 당에 함께 맞섰다. 그러나 이들 고구려유민들이 자신들을 신라가 이용만 하였음을 깨닫고 신문왕 4년(684년) 반란을 일으키자, 강력한 진압작전을 진행하고 금마지역을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이곳을 약화시키기 위해 미륵산(彌勒山)과 모악산(母岳山)으로 포괄되는 지역의 중심거점을 옮겨 신문왕 5년(685) 완산주(完山州)와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세웠다. 
 이때부터 현재의 전주지역이 이 지역의 새로운 거점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상케 되었다. 이때 완산(完山)이란 지명은 백제이래의 지명인 완산을 유지한 것으로, 『삼국사기』에는 이 지역의 다른 명칭으로 비사벌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비사벌이란 현재 경남 창녕(昌寧)지역의 옛 명칭으로, 백제가 서기 4세기 후반 경 근초고왕 때에 가야지역으로 적극적으로 진출하였고, 그곳에 백제의 군령(軍令), 성주(城主)가 배치되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신라의 가야진출에 따라 창녕지역의 백제 계통사람들이 현재의 전주지역으로 재배치되면서 자신들이 살았던 창녕의 옛 지명을 가지고 와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전주지역은 고조선 마한의 전통과 백제의 기반 그리고 가야, 고구려의 문화적 전통, 신라적 현실을 함께 포용한 역사의 용광로로서 한국의 역사문화의 종합판과 같은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후 경덕왕(景德王) 16년(757) 전국을 9주(州) 5소경(小京) 체제로 개편하면서 완산주(完山州)를 전주(全州)로 개명하였다. 이때 명칭개편은 경덕왕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의 일환으로 고유지명을 중국식 지명으로 바꾸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全의 뜻이 '온전할 전'으로 온과 완(完, 완전할 완)의 음이 서로 통하여 변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같은 신라의 정책과는 반대로, 이 지역민들은 전주를 중심으로 새로운 거점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여 전주의 위상을 높였다. 특히, 전주지역의 종교적 지주역할을 한 금산사(金山寺)를 중심으로 진표(眞表)는 백제 이래의 미륵신앙을 부흥시켜 지역민들의 종교적 안정과 정치적 구심력을 유지하였다. 
 후삼국 시기 무진주(茂珍州=현재의 광주)에서 통일신라에 반기를 들었던 견훤(甄萱)이 900년 후백제를 정식으로 세우고 그 수도로 전주를 선택하여 백제 부활의 땅 전주로서의 위상을 드높였다. 비록 37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전주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부문의 중심지였으며, 당시 기록에 의하면 화려한 궁성과 도성시설을 갖춘, 그리고 가장 책이 많았던, 명실상부한 후삼국 최대의 도시였다. 그러나 견훤과 신검 부자의 갈등은 결국 국가의 쇠망으로 연결되어 936년 후백제의 붕괴와 함께 전주의 위상은 약화되고, 고려의 지역 차별정책에 의해 위축된 모습으로 유지되었다. 이 같은 대립적 구도는 고려 시기라는 완충기를 거쳐 조선왕조 개창의 기반지역 즉 조선왕조의 관향(貫鄕)으로서 새로운 차원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우리역사에서 전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조선왕조의 개창과 관련된 것이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는 전주 이씨이지만 고향은 함경도 영흥지역이다. 그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 때까지 대를 이어 현재의 이목대 근처에서 살았는데, 이안사가 전주지역 판관과의 불화로 함흥지역으로 도피하였다. 그후 함경도 영흥지역에 터를 잡았고, 이성계는 그곳에서 출생하였다. 무관으로 성장한 이성계는 고려말 우왕 때 전북지역에 침입한 왜구 소탕을 위해 남원 운봉 지역에 급파되어 황산(荒山)지역에서 대첩을 거두고 본관도시인 전주에 개선하였다. 전주이씨 종친들이 현재의 오목대에서 승리 축하연회를 베풀어주었는데, 연회에서 이성계가 '대풍가(大風歌)'를 읊어 새로운 왕조에 대한 의중을 드러내었다고 전해온다. 이 같은 인연은 이후 태조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이 마련되고 조선왕조실록을 모신 사고가 설치됨으로써 조선왕조의 출발과 역사를 담보한 도시로서의 위상을 드높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 다른 지역에 모셨던 태조의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타고 망실되었지만, 전주지역만이 어진과 실록을 안전하게 수호함으로써 역사수호 도시의 성격을 갖게 하였다. 
 
 전라북도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사람중심의 전통인식을 계승한 동학의 정신이 가장 넓게 유포된 지역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서 조선왕조의 근간을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일본과 청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우리 역사상 최초로 관과 민이 함께 협의하는 집강소(執綱所)통치를 통해 진정한 민본주의와 지역민에 의한 자치를 실행한 곳이었다. 특히, 일본에 의해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케 함)과 척양척왜(斥洋斥倭,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물리침)를 외치며 분연히 일어난 절의의 땅이었다. 이러한 대동과 변혁의 정신은 종교적으로 계승되어 증산 강일순의 후천개벽과 소태산 박중빈의 정신적 문명개벽으로 발전되어 새로운 세계로의 지향점을 제시하였다.
 
 전라북도는 고조선의 준왕이 새로운 나라를 이룩한 곳이며, 또한 백제의 무왕이 당시 수도였던 사비(지금의 부여)를 떠나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새로운 수도를 만들었던 백제 중흥의 땅이었다. 그리고 660년 백제가 붕괴한 후 663년 백제 부흥군이 현재의 부안 우금산성지역인 주류성에서 왜의 지원군과 함께 백제 부흥을 꿈꾸었던 지역이며, 668년 고구려가 붕괴한 후에는 고구려 부흥군이 금마지역에 보덕국을 세워 신라와 함께 당과 맞서며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였던 대안과 재창조를 모색한 땅이었다. 900년 후백제 견훤이 전주를 중심으로 해양대국 백제의 역사를 새롭게 부활시키려 했던 곳이다. 
 또한 이성계는 고려말 왜구를 물리친 남원 황산대첩으로 명성을 얻어 새 왕조 창출의 의지를 전주에서 피력해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의 역사성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으며, 전봉준을 필두로 한 전북의 사람들은 반역으로 낙인찍혔던 정여립의 아픔을 극복하고 진정한 대동세계를 이루고자 하였다. 또한 장수·진안 일대 지역은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문화중심으로서 특히, 철기의 생산을 통해 고대국가 성장의 동력과 새로운 역사 중심을 구성한 공간으로 가야의 중심이자 백제중흥의 기축 역할을 한 곳이었다.
 이처럼 전라북도 지역은 다채로운 역사적 경험, 즉 고조선, 마한, 백제, 고구려, 가야, 신라, 후백제, 고려, 조선,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갈등과 새로운 통합을 끊임없이 재창조한 현장이었다. 즉, 우리 역사의 지역적 갈등과 이를 극복해 나가는 슬기로운 해결의 방안을 모색하였던 역사적 경험을 보여주는 곳이다. 이 같은 역사적 전통과 경험은 결국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재의 대승적 통합과 현실적 극복을 위한 교훈이자 과제로서 미래를 재창조하는 역사적 자산으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조법종 교수(우석대학교 역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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