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를 보고 영화에서처럼 이 세계가 매트릭스에 불과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잘생긴 전사들이 다족류들과 싸워서 인류를 구원할 것까지는 없지만 가령, 장주지몽처럼 우리들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린 각자 나비이거나 귀뚜라미거나 뭐 그런 건 아닐까. 자기네들을 인류라고 이름 붙이고 나비와 귀뚜라미의 꿈 속에서 죽을둥살둥 버둥대는 그림자들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진실한 공간일까, 하는 의문에서 굳이 냉소적 시선을 문제삼을 건 없다. 그런 의문을 철학적 사유로 승화시킬 수 없다 해서 아예 궁금해 하지도 말라고 하면 범속한 대중에겐 가혹하다. 나는 그래서 소설을 읽는다. 가끔은 정말 어이없는 연예인 가십거리를 찾아 인터넷을 뒤지기도 하지만 배설을 해야 승화도 있을 테니까 천박한 호기심이라 해도 별 수 없다.

 『다빈치 코드』는 크리스트교 역사에 대한 다소 묵직한 가십이다. 성경이 전해온 예수의 생애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초기 크리스트교 역사의 원판은 따로 있다고 말하고 있다. 권력을 위해서였는지 권위를 위해서였는지 여하간 A.D 2000년이 되도록 개봉불가 판정을 받은 판본이 따로 있단다. 거 참, 누가 속 시원히 말해주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애초에 예수의 삶을 증언하던 사도들도 없다.

 그저 진실만 알면 되는데, 그것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권위를 세울 일도 없는데, 누군가에겐 진실이 권력을 가져다주는 모양이다. 진실을 알고 있는 소수는 마치 그것에 대한 판권이라도 소유한 것처럼 잘도 이용한다. 타이밍이 적절할 때 조금씩 알려주고, 영 불리한 것은 숨기기도 하면서 말이다. FBI가 전천후로 활약하는 외화를 너무 많이 봤다고? 그런가. 그렇더라도 소설은 이처럼 다소 피해망상적인 상상력까지 지지해준다. 

 허나 단지 그것 뿐이었다면 부족했을 것이다. 인류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삶에 대한 순정한 태도가 존재한다. 깡패가 나오고 되바라진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일지라도 딱 한번, 그래도 아주 악질은 아니잖아, 하고 위로할 만한 점이 있어야 하지 않던가. 훼손되지 않고 그 권위도 상하지 않은 채 보존된 진실을 대중은 원한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예수의 혈통이 잘 보존 되어 있기를 독자는 어느새 바라게 된다. 악이나 거짓에 대항할 삶의 진실로써 말이다.
『다빈치 코드』가 사실관계의 논쟁으로 치닫기 전엔 그저 은밀한 환상을 만족시키는 개인적 독서체험이었음을 고백한다. 예수의 혈통에 여자가 당당히 포함돼서 좋았고, 예수가 인류의 절반과 결합했다는 게 좋았다. 물론 필자는 그들과 성별만 같을 뿐 끈 하나 연결될 일 없다. 그렇더라도 기껏 아담을 꼬여서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의 후예보다는 예수가 후사를 맡기고자 했다는 인격체의 후예라면 더 좋겠다는 것이다. 책이 이만큼 잘 팔리지 않았더라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대중적인 판타지를 좀 더 오래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성배를 수호하는 비밀 기사단의 일원이라도 되는 양 뿌듯했을지도 모르겠다.

 신에 대한 가십이 아무리 상종가를 쳐도 사람들은 신을 믿는다. 신에게 인격이 덧입혀졌다 해서 신이 영장류로 강등되기라도 한 것처럼 분노할 것 없다. 심오할 것도 위험할 것도 없는 대중의 욕망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소설의 환상을 이해하기 수월해진다. 범속한 대중의 호기심이 경전의 바깥에서 신을 만나더라도 조바심치지 말자. 그것이 설사 거룩한 종교를 대상으로 하더라도 말이다. 가령, 어린애를 정원에 가둬만 두어서는 단 한 번의 외출로도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 슈퍼도 보내고 막걸리도 떠오게 해야 어딜 내다 놔도 집을 잘 찾아온다.

 격렬하게 사실관계를 따지는 요즘의 논쟁에서가 아니라 개인적 독서에서 나는 해방감을 느낀다. 확고한 진실이 있다고 믿는 독자라면 물론 얘기는 다르다. 그러나 소설에서처럼 완결된 진실은 빨리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진실이 뭐냐고 묻지 말라. 진실도 힘을 얻을 때 진실이라는데, 그 전까지는 소설이 주는 은밀한 판타지를 즐기고 싶다.

이 윤 정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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