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공개 강좌 <글로벌인문학>, 지역학(익산학) 강연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기 바란다. /편집자

 
▲ 윤동주 시비
 현재 전 세계 곳곳에 퍼져 살고 있는 한민족의 숫자는 대략 8천 300만 명 정도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민족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남북한을 제외하고,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의 대부분은 중국과 미국 및 일본에 분포돼 있다. 그 중 중국에 250만여 명, 미국에 170만여 명, 일본에 90만여 명,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결성된 독립국가연합에 약 50만여 명이 살고 있다. 한 가지 특징적인 사실은 중국을 제외한 어떤 나라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도 거주국 내에서 자치권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구소련에서는 연해주지역에 우리 민족의 자치기구 설정을 인정하기도 했으나,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 조치가 내려진뒤에는 자치기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현재 우리 민족의 자치기구가 허용된 유일한 나라가 중국이며, 그 대표적인 자치기구가 연변조선족자치주이다.
 다민족 통일국가를 표방하는 중국의 민족정책 가운데서도 핵심은 민족자치에 있다. 중국은 영토 내 55개 소수민족의 인구수를 기준으로 하면서 집거(集居) 정도에 따라 자치구, 자치주, 자치현 등 등급에 맞는 자치기구 조직을 허용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해당 소수민족의 집거정도이다. 청나라를 세웠던 만주족의 후예들은 전체 인구가 1천만이 넘어 중국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소수민족에 속한다. 그럼에도 만주족은 전국 곳곳에 분산돼 있기에 자치현은 있으나 자치주도 찾아볼 수 없다. 반면 만주족과 전체 인구수가 비슷한 회족(回族)의 경우는 성(省)급 행정구역과 동일한 영하회족자치구가 설정돼 있다. 현재 중국에는 5개의 민족자치구, 30개의 민족자치주가 설정돼 있으며, 북한과 인접한 길림성 동북부에 위치한 연변조선족자치주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언제부터 연변지역에 우리 민족이 집거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대체로 19세기 60년대에 두만강을 건너 이주한 사람들이 현재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과 직접적인 혈연관계에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반도 북부의 열악한 자연조건, 여기에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인해 먹고 살 길이 막막하던 농민들의 금령(禁令)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면서 간도(間島)라 부르던 연변일대에 한인사회(韓人社會)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강을 건넌 이들이 주를 이루었던 시대에 이어, 한일합병 후에는 정치적 이유로 강을 건너는 이들이 늘어났고, 이때는 집단이주의 형태가 많았다.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동북지역(즉 滿洲) 곳곳에 뿌리를 내린 우리 민족은 경우에 따라서는 현지사회와 융합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통을 잇고 보존하면서 동북지역의 발전을 위해 많은 땀을 흘렸다. 1677년부터 청나라에서는 만주족의 발상지인 동북지역에 민간인의 접근을 금하는 봉금(封禁)정책을 실시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으면서 전혀 개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땅들이 한인 이주자의 손에 의해 옥토로 변했다. 우리 민족이 진출하면서 동북지역에서도 비로소 벼농사가 시작됐다.
▲ 용정시에 위치한 북방농업연구소
 연변지역은 또한 항일운동의 본거지이기도 했으며, 일제의 침략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 민족이 중국민족과 함께 피 흘려 지켜낸 곳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동북지역의 개척자이자 수호자였던 것이다. 일본은 1907년 8월 해외에 있는 한민족도 일본국민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간도지역에 파출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었다. 1909년에는 간도총영사관 경찰서를 설치하고 점차 경찰조직의 규모를 확대했다. 
 한일합병 이후 일본은 연변지역을 무대로 펼쳐지는 무장 항일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갖은 방법과 수단은 다 썼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 민족은 부단히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교육과 계몽을 목표로 선각자들이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서전서숙, 명동학교, 광성학교와 같은 간도지역의 대표적 민족교육시설이 속속 탄생했다. 당시 중국 지방정부에서도 한인들의 교육을 위해 연길북산소학교와 같은 교육시설을 세워주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연길지역에서도 3월 13일 대규모 반일집회가 열려 일본의 침략행위에 저항했다. 중국 지방정부에서도 처음에는 우리 민족의 염원이 담긴 만세운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일본의 의향을 무시할 수 없었던 봉천파 군벌 장작림(張作霖)의 지시로 반일집회는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가했던 19명이 사망하는 참화가 발생했고, 3·13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도 무장투쟁으로 전환되었다.
 간도를 무대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인 우리 독립군들은 국내진공작전을 진행하여 일본의 시설을 습격해 무기나 군량을 탈취하는 등의 무장활동을 펼쳤다. 더욱 적극적으로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 대규모 교전을 통해 수많은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결국 일제는 마적토벌을 구실삼아 간도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과 독립운동가들을 대량 학살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자행했다.
 경신참변 이후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조선족중학교를 활동무대로 활발한 사상운동을 전개했다. 일본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조직을 확대해 나갔지만, 행적이 발각돼 체포되는 사례도 빈번했다. 나중에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용맹함과 혁명성을 높게 평가한 중국공산당은 이들을 본격적으로 포용하기 시작했다.
 '조선혁명의 원동력이자 동북의 기본 혁명대오'라며 한인의 혁명성을 높이 평가한 중국공산당은 일률평등, 일치연합, 공동항일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한편, '해방' 후 민족자치를 실현시켜준다는 약속으로 한인들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 결과 1930년대 초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滿洲省委) 소속 당원의 9할이 한인이었다. 중국공산당과 연계된 한인 무장항일단체는 9·18사변 이전에는 항일전위대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9·18사변 직후에도 기타 민족과 연합하여 항일유격대 등 소규모 무장단체 활동이 주를 이루었으나 1934년부터는 동북인민혁명군, 1936년부터는 동북항일연군으로 편성돼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 연변지역에는 소련홍군이 진출했다. 이후 연변지역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은 중국공산당에 참여하고 친일파청산과 중국내전에 동참하여 일정한 공헌을 했다. 해방전쟁의 와중에 연길지역에는 농촌기층정권이 건설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어지는 연변조선족자치구의 기반이 되었다. 사실상 해방 이전부터 연길지역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은 자치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1928년 심여추는 '조선인 특별행정구' 설정에 관한 의견을 중국당국에 전달했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에서도 1930년대에 이미 만주족과 조선족은 구역자치를 실시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 연길서역 전경
 그 결과, 일련의 준비과정과 검토를 거쳐, 1952년 9월 3일에 연변조선족자치구(이때 자치구는 행정 급을 나타내는 자치구가 아니라, 자치를 실시하는 구역이라는 뜻이다)가 공식 설립되었고, 제1기 자치구장으로 주덕해(朱德海)가 취임했다. 그 후 중국정부는 자치지역 면적과 자치민족인구의 다소에 따라 자치구역을 자치구, 자치주, 자치현으로 획분했다. 결과, 1955년 8월 30일 연변조선족자치구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확정되었다. 동년 12월 20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 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 결의를 통해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정식 성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중국정부가 우리 민족의 자치구역과 자치기구 설립을 결정한 것은 우선 우리 민족집거구가 형성된 기초에서 우리민족이 동북지역개척과 항일전쟁, 해방전쟁에서 피땀을 흘린 공헌을 충분히 긍정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이 중국 동북지역의 발전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하여 그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홍석 교수(연변대학 역사학과, 현 사학과 교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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