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한강 작가의 소설『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문장이다.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설로, 위 문장대로 우리에게 광주민주화운동은 아직 아물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원인은 유신체제의 폭압 정치에 눌려왔던 국민들이 19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은 뒤에는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12·12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포함한 신군부 세력은 국민이 원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고 말았다.
 1980년 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었고 신군부 세력은 이에 맞서 5·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광주에서는 비상계엄확대 소식을 듣고 18일 아침에 전남대학교 교문 앞에 대학생 200여 명이 모였는데,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으로 안타깝게도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광주 도심지로 옮겨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는 곤봉과 대검 등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살상했다.
 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동참하여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결과적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신군부 세력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그 뒤에 들어선 전두환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도덕성과 정통성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진 주한 미군 사령관이 광주의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입을 허용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반미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8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뒤 정식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 받았고 사건 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1995년에는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이 제정되어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책임자들을 구속하고 사망과 부상자에 대한 보상이 정해졌다. 2011년 5월에는 5·18 관련 기록물들이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우리대학 학생회관과 공과대학 사이 잔디에 '고 임균수 열사 추모비'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을 잃게 된 임균수 열사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임균수 열사는 전북 순창 출신으로, 그 당시 우리대학 한의대 본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1980년 5월 17일 우리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져 예정된 봉사 활동을 취소하고 광주로 내려갔다. 민주화의 열망은 피 끓는 임균수 열사의 가슴을 뜨겁게 했고 21일 광주 금남로 시위대열에 함께했다. 곧이어 도청 앞에서 총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임균수 열사는 총과 탱크 등으로 위협하는 무력진압 과정에서 금남로 시위대열의 맨 앞에서 항쟁하다 광주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22살 꽃다운 나이에 쓰러지게 된다.
 임균수 열사는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우리대학의 유일한 희생자이다. 그러나 우리대학 학생들은 임균수 열사 추모비에 대한 존재감과 인지도가 매우 낮다. 많은 학생이 무심코 지나치거나, 추모비 주인공인 임균수 열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현재까지도 광주 북구 망월동 국립 5·18 묘지에 '묘지번호 1-47 임균수'의 묘비가 자리 잡고 있으며, 묘비 옆에는 하얀 국화 송이와 조그만 영정이 놓여 있다. 묘비 뒷면에는 '동방의 명의(名醫)를 꿈꾸며 한의대 재학 중 조국의 민주화에 이바지한 그대여… 불생불멸의 진리를 깨달아 원력을 세우소서'라고 젊은 생을 마감한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글이 새겨져 있다.

홍건호 기자 hong7366@w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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