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 부문 장원>


골목


김현주(서울여고)

달동네엔 시계가 없다
아침 해가 뜨면 제일 먼저 전봇대 그림자가
초침처럼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일찍 잠깬 개들이 컹컹 짖으면 비로소
골목은 관절을 꺾으며 기지개를 켠다
구멍가게를 돌아 정류소로 향하는 사람들
하루 일당을 셈하며 졸린 눈을 비비고
담장 모퉁이엔 집 나간 개를 찾습니다
둥그란 얼굴들 그려져 있다
시끌벅적 발짝 소리 한바탕 물리고 나면
할 일 없는 노인들 몇 슈퍼 평상에 앉아
장기알을 만지작거리며 죽을 날을 셈한다
평상 기둥에 누군가 걸어놓은 둥근 시계는
고장난 시간 그대로 풍경 박제중
슈퍼 앞은 그래도 언제나 만원이여서
아이들이 손에 든 비눗방울에선
꿈이 제 홀로 부풀었다가 터졌다가
시멘트 틈마다 꽃들은 중력을 견디고
늦은 오후 집을 나서는 여자들은 가끔
제 구두 굽을 비석처럼 보도블록 틈새에
남겨두고는 하였다
전봇대 그림자가 동쪽으로 늘어지면
허리가 접혀 올라오는 사람들
손에 든 검은 비닐 봉지에선
금방이라도 비명이 쏟아질 것 같다
밤이 되면 제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리는
전봇대는 무슨 희망이 있다고
별들을 자꾸만 달동네로 수신하는지
술 취해 돌아오는 어느 가장의 노랫가락이
반지하 환풍구로 들려올 때
골목은 이리저리 몸을 뒤채며
꿈 위에 꿈을 쌓는다

 


 

당선 소감 - 운문 장원 김현주(서울여고)
 

 

안녕하세요. 저는 '제57회 원광대학교 전국 고교문예백일장'에서 운문 장원을 받게 된 김현주입니다. 먼저 제 시를 읽어주시고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예선에 붙은 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매번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글쓰기에 임했습니다. 본선 당일 네 가지 글제가 발표됐고, 저는 그 중에서 '골목'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시를 제출하고 점심시간에 '최선을 다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니까 아무 생각말고 점심이나 먹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었는데, 너무 좋은 결과가 나와서 놀랐고 행복했습니다.
 저는 이 상이 꾸준히, 그리고 성실하게 연습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발판으로 삼아 더욱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 번 더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운문 부문 차상>


거울


김두나(늘푸른고)


그 옛날 할머니가 산 거울에는
소중한 시간들이 보인다며
한 떨기 포도를 종이로 감싸는 것은
한철 마다 죽은 별을 감싸는 일이라고
연둣빛 줄기에 알알이 매달린
과실에서 과실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스케치북 하나 두고 조그려 앉아
할머니가 그린 우주를 비춘다
그 옆을 빙빙 돌던 나는
할머니의 우주에 뜬 별이 되기도 하고
할머니가 마른 흙을 매만지면,
탱글한 웃음을 터트리며
거울에 슬며시 차오르는 포도향에
문득 여름도 물러서는데
알이 차면 종이를 씌우고
과실이 되지 못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할머니의 삶은 간결하고
거울 속 우주는 더욱 아득해진다
궤도 안이 텅 빈 자리
조등도 빛바랜 그 자리에서
나무에서 할머니까지 거리는
딱 세 발자국, 나는 걷고 또 걸어
다시 나무 앞으로 되돌아오면
죽은 별을 실은 상어가 우주로 떠나고
한 켠에는 덜 여문 포도알
아직 종이를 씌울 때가 아닌데...
한철 지나 죽는 나무가 있었나
보라색 우주에 나무를 그리면
거울 가장자리에 자수를 놓는 포도알을
한참을 바라보다 손으로 쓸어보면
반질반질한 부분이 포근하다


 

당선 소감 - 운문 차상 김두나(늘푸른고)
 

 

안녕하세요. 제57회 원광 전국 고교 현상 문예 백일장에서 차상을 받은 늘푸른고등학교 3학년 김두나입니다.
 모든 일과가 끝나고 편안한 상태로 수상 소감을 쓰는 지금, 여전히 입상 사실이 믿기지 않고 마냥 벅차오르네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라 더욱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원광대학교에 오기 전날, 저는 담임선생님과 많은 친구의 응원을 받고 왔음에도 백일장 내내 어딘가 자신 없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저의 글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긴장한 탓인지 글을 쓰는 내내 배가 아파서 제가 쓰고 있는 글에 완전히 몰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작품에 그냥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었는데, 이렇게 큰 선물을 받게 되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월요일에 학교에 갔을 때,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정말 많은 축하를 받았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선생님의 제자 중 대학교 백일장에서 수상을 한 학생은 제가 처음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정말 뿌듯했고, 앞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문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사람들로 인해 저는 부족했던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부족한 글을 높이 평가해주신 심사위원 분들과 언제나 저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늘 같은 자리에서 응원해주시는 선생님들, 친구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이번 원광대학교 백일장을 계기로, 앞으로 더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운문 부문 심사평>


인간의 복잡한 내면,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내
 시만큼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장르는 없다. 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매개일 뿐만 아니라 삶의 척박함을 견디게 하는 정신적, 심미적 힘을 그 안에 간직한 예술 장르이다. 시의 이러한 특징은 백일장에서도 유효하다. 아무리 시 창작의 방법론이 보편화되었다 하더라도, 시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여전히 구체적이어야 하고 새로워야 한다는 게 시 창작의 기본 명제라면 명제다.
 이번 백일장의 시제는 '국수', '거울', '골목', '동물원'이었다. 시제 모두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주어진 시제에서 삶의 균열을 읽어내고, 그 시제가 지닌 자명함을 적극적으로 걷어낸 작품은 이주빈(고양예고)의 「달이 머무는 골목」, 이가인(안양예고)의 「골목 전차와 커튼콜」, 이준(서울 광문고)의 「뒤를 돌아보면」, 김두나(늘푸른고)의 「거울」, 김현주(서울여고)의 「골목」 등이었다.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은 「뒤를 돌아보면」과 「거울」, 「골목」 등의 세 작품을 두고 오래 고심했다. 어떤 작품을 장원으로 선정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먼저, 「뒤를 돌아보면」의 경우 뛰어난 수사와 시행의 유려함이 가장 돋보였다. 하지만 시가 지닌 수사의 장점을 함축적 언어가 받쳐주질 못한다는 아쉬움이 컸다. 모든 시행을 시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도 시의 전경화를 이루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했다.
 다음으로 「거울」은 할머니의 삶과 거울 그리고 포도나무가 지닌 식물적 상상력이 고루 균형을 이루는 작품이다. "과실이 되지 못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 할머니의 삶은 간결하고 / 거울 속 우주는 더욱 아득해진다"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시행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다는 점과 문장이 불안정하게 운용된다는 점이 지적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은 단점이 가장 적은 「골목」을 장원으로 결정했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시 작품 전반에 힘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 여린 감성을 중층적으로 숨길 줄 아는 시적 재능이 있었다. 가령 "밤이 되면 제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리는 / 전봇대는 무슨 희망이 있다고 / 별들을 자꾸만 달동네로 수신하는지"의 표현 자체는 자칫 고루해 보일 수는 있으나, 인간사의 복잡한 내면을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가장 큰 호감을 얻었다.
 위의 세 작품 외에도 제 나름의 시적 사유로 무장한 작품이 다수 있었음을 밝힌다. 그들 모두에게 응원과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 강연호(시인, 문예창작학과 교수), 김정배(시인, 융합교양대학 교수), 배귀선(시인), 곽정숙(시인), 유은희(시인), 차현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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