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하고 경이로운 도시, 어메이징 익산'. 익산을 대표하는 브랜드슬로건 가운데에는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서쪽 석탑이 그려져 있다. 오랜 시간, 제 모습을 찾지 못한 채 방치됐던 미륵사지 서쪽 석탑은 지난 6월 20일, 20년 동안의 보수작업을 통해 1379년 만에 슬로건 속 웅장함과 위대함을 되찾아 우리들 곁으로 돌아왔다.
역사를 덮어버린 콘크리트
미륵사지는 601년, 백제 무왕 때 창건됐다. 백제가 멸망한 660년 이전에는 석탑을 포함한 미륵사 삼원 모두가 온전한 상태였을 것이지만, 최근에 와서는 서탑만이 유일하게 남아있었다. 그나마도 반 이상 허물어져 6층까지의 일부만 남아있던 상태였다. 그러던 중 1915년, 일본 강점기 시절 남아있는 서쪽 석탑이 무너질 것을 우려해 보수공사를 명목으로 약 185t에 이르는 콘크리트를 석탑에 들이부었다. 그리고 83년이 흐른 1998년에 구조안전진단을 진행한 결과, 일본인들이 석탑에 들이부은 콘크리트는 노화됐으며,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판단을 받았다. 실제로 콘크리트에 있는 탄산칼슘 등의 성분이 백화현상과 풍화작용을 촉진해 오히려 석탑을 크게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진단 결과에 따라, 미륵사지 석탑은 1999년 문화재위원회에서 해체·수리하기로 결정하고, 2001년부터 석탑의 본격적인 해체조사와 함께 다양한 분야의 학술 및 기술 조사연구, 구조보강, 보존처리 등을 시행하게 됐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다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하는 데 20여 년이나 소요된 이유는, 백제 당시의 원형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문화재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는 보수 작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의 최경환 학예연구사는 "가장 정확하고 올바른 복원안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 전문가가 모여 회의를 반복했고, 다양한 의견을 하나로 모아 최종안을 결정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고 전했다.
이렇게 전문가들이 복원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결과, 미륵사지 서쪽 석탑은 원형과 가장 가까운 형태로 복원됐다는 평이다. 현재 서탑은 9층까지 복원된 동탑과 달리 형태가 남아있던 6층까지만 보수한 상태다.
미륵사지 석탑은 훼손되고 유실된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높이가 14.24m에 달한다. 거대한 크기만큼 많은 수의 부재(部材)로 이뤄져 있는 석탑의 내부도 여러 형태와 크기의 석재들로 꽉 채워져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해체 과정에서 이런 부재들의 원래 위치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실측했으며, 그중 재활용할 수 있는 것과 사용할 수 없는 것을 가려냈다. 재활용할 수 있는 부재라도 금이 가거나 파손된 경우에는 부재를 세척하고 이물질을 제거한 후 신(新)부재를 결합하는 등의 보존처리를 했고, 새로 만들어야 하는 부재는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석공들이 일일이 망치와 정으로 쪼아 다듬어냈다.
탑을 다시 쌓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표면이 거친 화강암 부재를 다시 쌓아야 했기 때문에 서로 아귀가 맞지 않거나 미세하게 수평에서 벗어나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부재를 들어 올려 모난 부분을 더 쪼아내고 다시 쌓아야 했다.
미륵사지 서쪽 석탑이 제 모습을 찾기까지 소요된 20년의 시간은 문화재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수 없이 많은 회의와 수작업으로 이뤄진 노력의 세월이었다.
백제인의 기록, 역사를 발견하다
2009년 1월 석탑 해체조사 과정 중 1층 내부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과거에는 유물을 도굴당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유물을 수습하는 일은 흔한 경우가 아니었다.
특히, 이번 미륵사지 해체 작업 중 발견된 사리장엄구 중 '금제사리봉영기'의 금판 앞뒷면에는 석탑의 건립시기(639년)와 함께 미륵사 창건의 배경인 백제 사탁왕녀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석탑을 세웠다는 내용의 193자의 명문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백제인이 직접 작성한 기록이라는 점이 발견 당시 학계의 큰 주목을 끌었다.
또한, 사리를 담은 유리병, 금제사리내호, 금동제사리외호 및 은제관식이라는 당시 귀족들의 신분증 등 9천여 점의 유물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현재 사리는 석탑 안에 다시 모셔놓았으며, 나머지 유물들은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서 안전하게 전시하고 있다.
이후 학술조사와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지난 6월 27일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가 보물 제1991호에 지정돼 의미 있는 성과를 얻었다.
백제 중흥의 꿈을 안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7세기 전반 백제가 세운 한국 최초의 석탑이자 가장 큰 석탑이다. 학자들은 기존에 목탑만 존재하던 시대에 최초로 석탑을 세운 곳이 백제의 수도인 사비(부여)가 아니라 익산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분석한다. 익산에는 현재 미륵사지와 더불어 왕궁리 유적, 쌍릉 등 백제 말기시대의 중요한 유적지들이 자리하고 있다.
익산이 고향인 백제 제 30대 왕, 무왕은 익산 지역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실제로 궁성의 기능을 했던 왕궁리유적에 거처하는 등 익산 천도의 의지를 보인 만큼 익산 지역은 제 2의 수도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백제는 익산을 개발하며 남방 경영에 대한 의지를 새롭게 다지고, 신라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또한, 귀족간의 다양한 이권 다툼이 복잡하게 얽혀있던 사비를 떠나 익산에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무왕의 의지가 나타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최초의 석탑 미륵사지 탑은 7세기 무렵 익산에서 참신하고 혁신적인 시도를 상징한다. 백제의 중흥을 소망하고 미륵부처의 구원을 믿었던 백제인들의 간절한 소망 마음이 담겨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백제의 마지막 왕도 익산, 그 중심에 동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미륵사지 석탑이 20년만에 다시 위용을 드러냈다. 무너져가는 석탑을 보존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수많은 전문가들이 오랜 시간 체계적인 조사 연구를 통해 새로운 방안들을 마련하고 끊임없이 시도하기를 반복했다. 특히 몇 층 까지 복원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오랜 논의 끝에 결국 위험한 추정복원 대신 현존했던 6층 그대로의 복원을 하게 된 것이다.
오는 12월, 온전한 제 모습을 드러낼 미륵사지 석탑은 1,300년의 인고의 시간을 견뎌와 다시 새로운 천 년을 도약할 것이다.
정명선 기자 sjfkd1919@wku.ac.kr
이애슬 수습기자 dldotmf3295@wk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