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청원>은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 마술사, 이튼 마스카랴네스(리틱 로샨 분)가 안락사가 금지된 인도에서 자신의 죽음을 허락해달라고 법원에 청원을 넣는 이야기다. 법으로 금지돼 있다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자신이 죽게 해달라고 말하는 상황이 섣불리 상상이 가지 않는다.
 <청원>은 이튼의 무력함과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때 잘 나가던 마술사였던 이튼은 와이어를 사용한 공중부양 마술을 선보이다 줄이 끊어지는 사고를 겪는다. 끔직할 정도로 긴 수술과 수많은 약물, 그리고 온갖 기계장치에 의존해 그는 겨우 얼굴만 움직일 수 있는 반신불수 상태로나마 간신히 생명을 이어가게 된다.
 그는 자기 코에 붙은 파리 한 마리조차 스스로 떼어내지 못한다. 고개만 흔드는 정도로는 파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에는 천장에 물이 샜고, 간호인을 불렀으나 넓은 집 안에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는 밤새도록 빗방울을 맞으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꽃 한 송이를 헌화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단지 어머니가 좋아했던 노래를 불러, 그녀에게 바치는 것뿐이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간호사가 폭력에 노출되고 납치되다시피 그녀의 남편에게 끌려가던 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간호사의 남편에게 그만둬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모아둔 돈도 바닥나고, 의사는 재활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한다. 절망적인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이튼이 처음부터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신체적인 활동이라고는 얼굴밖에 움직일 수 없으니,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그였지만, 사고가 발생하고 14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달려왔다. 반신불수가 됐지만,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라이프'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던 존재였다. 자신의 애청자 '딕 페르난데스'는 과거에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있었다. 어느 날, 이튼의 방송을 듣고 희망을 얻은 그는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고백했고, 이제는 딸을 가진 아버지가 됐다. 딕은 이튼에게 "당신은 마술사에요"라고 말한다. 또, 과거 이튼은 사지마비 환자들 앞에서 "당당히 인생을 살아가자"고 연설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이튼은 절망감에 빠졌고, 삶을 포기하려 하고 있다. 그는 법원에 자신의 죽음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을 넣는다. 사회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많은 논란이 됐지만, 그는 청중들이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온갖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튼은 '라이프'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허락해주기를 청중에게 호소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한 성직자는 "신의 분노를 살 것"이라 말하는 한편, 어떤 수녀는 그저 찬송가만 불러주며, 과거 연설을 들었던 사지마비 환자들과도 대화한다. 또, 자신을 짝사랑했던 조수와, 자신을 시기해 와이어를 끊어 이튼을 반신불수로 만든 장본인과도 통화한다.
 이튼 대사 중에서는 의미심장한 대사가 많다. 자신의 안락사를 청원하는 계획을 세우며 말한 "엄청난 일인 듯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나, 친구이자 변호사인 데비야니에게 청원을 부탁하며 말한 "네가 이기면 나는 자유를 얻지만, 지면 나는 평생 종신형처럼 살아야 해", 자신의 제자인 오마르가 포기하려 할 때 했던 "오마르, 자신의 분노를 이용해. 실패하면 다시 해. 일어나. 믿어", 그리고 자신의 청원에 반대하는 검사에게 마술을 보여준다며 상자 안에 들어가게 한 다음 말한 "숨도 못 쉬고 움직일 수도 없었소. 이튼의 60초였소"까지.
 어둡고 좁은 상자 속에 들어간 검사는 60초 같지 않은 60초를 겪게 된다. 그리고 더는 강경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못한다.
 이튼은 평생을 노력해왔다.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튼은 죽음으로서 이 '종신형'을 끝내고 싶어 했다. 이튼은 강한 사람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만 말만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고, 어설픈 마술사였던 오마르를 진정한 마술사로 만들어줬다. 오마르에게 해줬던 말들은 그동안 자신에게 해왔던 말들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는 안락사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존엄사에는 찬성한다. 데비야니의 말을 빌리자면, "안락사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튼의 경우엔 동의한다"와 비슷한 맥락이다.
 '죽음에 관한 문제'는 특히나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두운 뒤편으로 미뤄두기만 한다면 현 상황에서 나아갈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은 쉼표일까, 마침표일까. 죽음이 쉼표라면 어디에 찍을 것인가? 죽음이 마침표라면, 마침표는 누가 찍는 것인가.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죽을 권리'란 무엇일까. 죽음과 터부라는 그늘에 가려진 '존엄사'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영화였다.
 
 

  조현범 기자 dial159@w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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