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것처럼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는 독일의 이론 물리학자로서 양자 역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학문적 여정에 관한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책인 『부분과 전체』 (Der Teil und das Ganze: Gesprache im Umkreis der Atomphysik)를 썼다. 필자에게 『부분과 전체』는 매우 특별한 책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필자가 인식론, 과학 철학을 전공으로 연구하게 된 중요한 계기를 『부분과 전체』가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때는 군 휴학 중 복학을 앞둔 시점으로 기억된다. 우연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라는 책을 알게 되었고, 읽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과학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담론에 매료되었고, 책을 읽기 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과학철학, 논리학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복학 이후, 과학 철학, 논리학 등의 수업을 들으며, 과학의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구체화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관련 연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그럼 『부분과 전체』의 저자인 하이젠베르크 그는 누구인가? 하이젠베르크는 1901년 독일 뷔르츠부르크(Wuzburg)에서 희랍 고전어 학자인 카스파르 하이젠베르크(Kaspar Ernst August Heisenberg)와 안나 베크라인(Annie Wecklein)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0부터 1923년까지 물리학과 수학을 뮌헨에 있는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Ludwig-Maximilians-Universitat Munchen)과 괴팅겐에 있는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대학(Georg-August-Universitat Gottingen)에서 아르놀트 조머펠트(Arnold Sommerfeld, 1868~1951)와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 등과 함께 공부했다. 이후 닐스 보어(Niels Bohr, 1884~1962)를 만나 양자 역학에 관한 심도 깊은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양자 역학 분야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다양한 중요 업적을 남겼고, 이러한 이유로 그는 193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그렇다면 양자 역학은 무엇이고, 불확정성의 원리란 무엇인가? 양자 역학은 "세상에 있는 물질들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보통 서양 철학사에서 최초의 철학자로 언급되는 탈레스(Thales)는 세상 만물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세상 만물이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는 세상 만물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현대의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탈레스나 아낙시메네스의 주장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반면, 그들 대부분이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은 어떤 방식으로든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 같다. 예를 들어, 현대의 중요한 이론 물리학자 중 한명인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이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어느 날 파인만은 다음과 같은 조금은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이유에서 이든 간에, 인류가 전멸 직전에 있다고 해보자. 인류가 그동안 이룩한 모든 지적, 문화적 업적은 이미 완전히 파괴되었다. 세상에 있던 모든 책은 불태워졌고, 컴퓨터를 포함한 모든 저장 장치가 이미 파괴되었다. 남겨진 사람은 파인만과 아이들 몇 명뿐이다. 그런데 파인만에게도 남겨진 삶의 시간이 별로 없다. 그는 죽기 전에 남겨진 아이들이 인류 문명을 다시 일으키는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단 한 줄의 문장만을 남길 수 있다. 과연 남겨진 아이들에게 어떤 문장을 남길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파인만의 답변은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매우 거칠게 말해, 양자 역학은 이러한 원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탐구하고 설명하는 과학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러한 양자 역학에 중요한 공헌을 한 이론 물리학자이다. 그렇다면 하이젠베르크의 주된 업적은 무엇일까? 하이젠베르크가 양자 역학의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지만, 아마도 많은 과학자들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꼽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확정성의 원리는 무엇인가? 불확정성 원리는 원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매우 특이한 현상에 대해 설명하는 이론이다. 어떤 특이한 현상을 말하는 것인가?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의 성질이다. 원자 세계에서는 전자가 입자로서의 성질과 파동으로서의 성질을 동시에 지닌다. 과학자들은 이중 슬릿 실험을 통해 이 점을 확인했다. 벽에 2개의 구멍을 뚫고, 그 벽을 향해 전자를 쏜다고 해 보자. 구멍은 길쭉한 직사각형 형태이다. 구멍이 뚫린 벽 뒤에는 그 벽을 통과한 전자가 도달하는 스크린이 있고, 우리는 그 스크린을 통해 벽을 통과한 전자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 수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전자는 2개의 구멍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벽을 통과하는 전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전자가 입자라면, 벽 뒤의 스크린에는 두 줄이 생길 것이다. 이 점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 벽을 향해 총을 쏜다고 가정해 보자. 입자 운동을 하는 총알 중 그 벽을 통과한 것들은 스크린에 구멍 모양의 두 줄을 생성시킬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전자가 파동의 성질을 지닌다면, 우리는 스크린에서 여러 개의 간섭무늬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 벽을 향해 물을 흘려보낸다고 해 보자. 파동 운동을 하는 물결은 스크린에 여러 개의 간섭무늬를 만들어 낼 것이다. 실험 전 많은 과학자들은 스크린에 두 줄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실험 결과 여러 개의 줄무늬가 나타났다. 전자는 파동으로서의 성질을 지닌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는 파동으로서의 성질만을 지니는가? 그렇지 않다. 동일한 실험 장소에서 카메라로 찍거나 직접 관찰을 하면, 스크린에는 두 개의 줄만이 나타난다. 즉 측정을 하면, 전자는 입자로서의 성질을 나타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원자의 세계에서는 측정이 관찰 대상인 전자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우리는 원자 세계에 있는 대상에 영향을 주지 않고 그것을 관찰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러한 현상을 기술하려면 확률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그는 전자를 포함한 입자가 확률적으로 운동한다는 점을 받아들인 것이다. 매우 거칠게 말하면, 원자의 세계에서는 대상을 확률을 사용하여 측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양자 역학이 세상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이후 지금까지 그것과 관련된 다양한 철학적 문제가 제기되었다. 『부분과 전체』에서 잘 드러나듯이, 하이젠베르크 자신도 이러한 철학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가령 양자 역학은 다음과 같은 철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무엇을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가? 존재하는 것과 관찰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또한 양자 역학은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고전 논리학의 법칙이 과연 성립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가령 고전 논리학의 법칙 중에는 배중률이라는 것이 있다. 배중률에 따르면, 어떠한 진술이든 간에 참이 아니면 거짓이다. 따라서 배중률이 성립한다면, 참인 동시에 거짓인 문장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양자 역학은 이러한 문장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가령, 전자만큼 작은 팽이가 원자 세계에서 돌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우리가 살고 있는 거시 세계에서 큰 팽이를 돌린다면, 그 팽이는 시계 방향으로 돌거나 반시계 방향으로 돌 것이다. 그러나 전자만큼 작은 팽이는 관찰 이전에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동시에 반시계 방향으로 돈다. 따라서 관찰 이전의 팽이에 대해 "이 팽이는 시계 방향으로 돈다"라는 문장은 참인 동시에 거짓인 문장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부분과 전체』에는 과학, 철학, 역사, 종교, 정치 등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다양한 대화들이 많이 담겨 있다. 이러한 대화들은 필자에게 간접적으로 전체로서의 삶과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으로서의 삶의 순간들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 즉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혹시 누군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만약 과학 기술이 지금보다 더 고도로 발달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 영원히 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인간이 사는 지구가 언젠가 사라진다. 왜냐하면 먼 미래에 태양이 크게 팽창하고 폭발하며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주선을 타고 다른 행성으로 가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우주 자체도 언젠가 죽는다. 이를 '열 죽음'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우주 속한 인간의 삶은 유한할 수밖에 없다. 유한한 우리 인간의 삶은 부분과 전체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통과하는 삶의 부분인 하루하루가 모여서 삶 전체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솔직히 필자도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러한 삶의 부분과 전체의 관계 고려하고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를 만들어 낼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하이젠베르크는 『부분과 전체』를 통해 독자에게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글을 마무리하며 『부분과 전체』에서 하이젠베르크가 하루하루 성실한 연구 끝에 수학적으로 모순이 없는 완전한 양자 역학이 성립한다는 것을 발견한 후, 그 기쁨의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묘사한 부분을 인용하고 싶다.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벽의 여명을 뚫고 여관이 자리 잡고 있는 고지의 남단에 있는 산봉우리를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그곳에는 바다에 돌출하여 고고하게 서 있는 바위 탑이 있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항상 내게 등반의 유혹을 안겨주곤 하였다. 나는 큰 어려움 없이 그 탑에 올라가 꼭대기에서 일출을 기다렸다."

정재민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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