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자신의 시대를 주의 깊게 관찰하며 끊임없이 물음을 제기했던 수많은 사상가들의 주름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에 대한 숭고한 표현입니다. 그 주름은 마치 어머니의 그것처럼, 그 앞에 우리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삶의 고귀한 사랑과 지혜에 대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주름과 주름 사이의 깊은 골에는 우리에게 외치는 아버지의 메아리로 가득합니다. 주름이 단순히 시간의 흔적일 수 없듯이, 주름의 위대한 의미 앞에서 시간은 결코 인간의 유한성을 비웃을 수 없습니다. 원광대학교의 세계고전강좌가 어느덧 100회를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이 프로그램은 하나의 주름으로 존재했던 수많은 사상가들의 질문과 지혜를 우리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세계고전강좌의 100회를 기념하는 원고의 청탁을 받고 저는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여 년 전 이 프로그램의 1회에 참석했었던 제 이마에도 이제 깊은 주름이 하나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 주름의 깊이가 10여 년 동안 제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졌던 물음들의 깊이라고 생각할 뿐,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세계고전강좌의 100회를 축하하고 먼 훗날 자신의 얼굴에 만들어 질 주름에 지혜의 살을 채우는 일에 함께하는 것은 어떨까요?
 고전은 오랜 인류가 자신들을 둘러싼 자연과 세계를 이해하고 그들만의 문명과 문화의 창조를 위한 깊은 사유와 노력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과 지혜가 담겨 있는 값진 보물입니다. 그래서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것에 머무르는 것일 수 없습니다. 이는 오히려 현재에서 과거의 것을 불러들여 새로운 사유의 생명을 불어넣는 능동적인 사고의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의 지혜는 우리에게 단 하나의 절대적 진리 혹은 완벽한 사유의 양식으로 다가오지 않는답니다. 고전읽기는 소크라테스, 칸트, 니체 등,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자들이 가졌던 의문과 물음에 참여하는 동시에 나만의 고유한 사유와 관점을 확립함에 본질적인 도움이 되어줄 것입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세계와 삶에 품었던 각기 다른 그들만의 이유들을 함께 고민하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그들이 자신들의 삶으로 풀고자 했던 특정한 물음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 물음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 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사유할 때 우리는 이미 철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스퍼스(K. Jaspers)가 철학을 하는 것을 호흡을 하는 것과 동일한 행위로 표현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언명 "너 자신을 알라"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철학은 나 자신에 대한 사유와 실천을 분리시키는 학문이 아닙니다. 또 다른 예로 인간의 이성과 삶의 행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철학을 이성에 대한 이론적 해명의 도구가 아니라 도덕적 실천양식으로서의 '철학함(philosophieren)'으로 규정했던 칸트(I. Kant)와 인간의 정신과 의지에 대한 실존적 성찰을 바탕으로 철학을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예술가의 작업으로서의 '미학함(asthetisieren)'으로 이해했던 니체(F. Nietzsche). 이 두 철학자는 자기 자신과 삶을 탐구하는 철학적 사유가 숨을 쉬는 일상적 행위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무언가를 더 쌓고자 합니다. 그리고 쌓인 것들의 총합을 '나'라는 고유한 존재를 대변하는 가치로 규정합니다. 최근 들어 자주 사용되는 스펙(Spec/Specification)이라는 개념은 이를 잘 보증해줍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는 그 제품을 이루는 다양한 부품들과 성능의 합에 의해 가격이 책정되지만, 우리는 제품이나 물건처럼 고정된 가격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철학적 사유는 내 존재의 초기화, 즉 '나'라는 존재의 원초적 본질에 데려다 주고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혜의 도구입니다. 하나의 제품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모든 일상 속에서 가장 근원적인 나 자신에 대하여 묻고 사유해야만 합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비극의 고전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점심에는 세 발로, 저녁에는 네 발로 걷는 동물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스핑크스의 물음에 단번에 답했던 이 영리한 오이디푸스는 왜 결국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 실명시킨 비극적인 인간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이성적이고 이론적인 인간으로 대변되는 그가 '보편적인 인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나'라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를 찾는 과정에서 오이디푸스는 누구보다 이성적이었지만, 결국 그가 발견한 살해자는 스핑크스의 물음을 단번에 풀었던 영민했던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탐구해본 적이 없는 어리석은 자일뿐이었습니다.
 20세기의 사상적 전환을 이룩했던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인간이 결코 의식적인 존재로 규명될 수 없음을, 즉 인간의 합리적 의식에 가려진 무의식의 의미를 사상사에 등장시킴으로서 오랜 인식론의 전통을 전복시켰습니다.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을 연구하다가 이후 자신만의 독자적인 분석심리학을 제창했던 융(C. G. Jung)의 견해처럼, 무의식은 한 개인의 전체인격의 실현, 즉 자기(내면의 나)와 자아(외면의 나)의 합일을 위한 가장 원초적인 조건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다는 것은 무의식을 탐구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진지하게 탐구해본 적이 있나요? 혹시 자신이 낯설다는 느낌을 경험해본 적은 없나요? 내가 나에게 낯설어지는 현대의 자기소외 현상은 내가 나를 탐구하지 않은 사유불능의 증상이랍니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인간이라는 답 안에 은폐된 진정한 나 자신을 발굴하는 작업을 우리에게 삶의 지혜로서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리히 프롬(E. Fromm)은 『사랑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답니다. "나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인간의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니체는 1884년~1887년 사이에 발간된 자신의 저서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에서 쉬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으로부터 '나'를 분리시키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보편적인 인간 개념 안에서 '나'는 항상 수수께끼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존재와 시간』에서 '나'의 본질적 불안을 이기지 못해 대중에게로 달아나는 것을 경계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떠올리며 매순간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것은 곧 내가 나와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관계 없이 보편적인 대중의 삶을 쫒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삶에 '절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책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이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인간 실존의 병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러한 실존적 절망으로부터의 회복을, 즉 우리가 정신을 통해서 매순간 우리 자신을 사유하고 탐구하며 관계하기를 요청합니다.
 하지만 아직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탐구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날개달린 동물'로 태어났고, 한 번도 날지 않은 적이 없으며 지금도 날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것. 이것은 곧 스스로를 알기 위한 모험, 즉 날개 달린 자들의 날갯짓입니다. 대신 날갯짓을 하고 있는 지금 자신의 발아래 누가 서 있는지를 확인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스스로 제기하는 삶의 질문들은 항상 다시 여러분들의 머리 위에 떨어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매순간 우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본 글에서 언급했던 철학자와 저서들은 대부분 우리가 세계고전강좌에서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나누었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한 권의 고전을 손에 쥐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상범 교수(융복합치료인문교실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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