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을 가로지는 라디오 전파처럼

 글쓰기센터의 <세계고전강좌> 100회 개최를 축하드립니다. 사실 100이라는 숫자에 특별히 집착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잔칫집에 와서 웬 행패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네요. 여하튼 99회가 됐어도 32회가 됐어도 저는 마음 속 깊이 축하해 드렸을 것입니다. 제가 기념하고 싶은 것은 100이라는 막연한 숫자는 아닙니다.
 뜬금없게 들리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모두 각자가 지금 구식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한 대씩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다이얼을 돌리다가 어느 순간 같은 채널에서 우리는 우연히 만나버린 것입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방송국에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턴테이블 위에 바늘을 올려 버립니다. 그 음악은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왔습니다. 우연과 우연이 여러 번 겹치고 겹쳐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같은 음악을 듣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인문학은, 책읽기는, 고전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평생은 한 번 이렇게 마주쳐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채널에서 우연히 만나버린 따분한 종족입니다. 인문학의 가치를 믿는 따분한 인간들의 오늘 회합을 축하드립니다. 우리의 회합을 위해 지금까지 잘 버텨준 <세계고전강좌>의 100번째 행사를 또한 축하드립니다. 두서없이 서두가 길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융합교양대학의 서덕민입니다.

『모래의 여자』로 시작합니다

 제가 말씀드려야 하는 주제는 "고전, 사회를 묻다" 입니다. 사실 조금 당황했습니다. 인간이 생산한 모든 텍스트는 어떻게든 세계를 반영합니다. 텍스트의 성격이 '나'를 향하고 있느냐, 아니면 '우리'를 향하고 있느냐 정도의 차이겠지요. 현대문학 전공자로서 깜냥에 맞는 책을 한 권 고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쉽게 읽으실 만한 소설을 한 권을 들고 왔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해 드릴 책은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입니다.

 

 아베 코보는 1950-70년대 일본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작가입니다. 일본의 카프카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사고로 얼굴에 흉측한 상처를 입고 인간의 얼굴과 똑같은 가면을 제작해 쓰는 남자의 얘기를 다루고 있는 『타인의 얼굴』, 실종자를 추적하다 자신이 실종돼 버리고 마는 흥신소 직원의 얘기를 다루고 있는 『불타버린 지도』, 그리고 오늘 소개해 드릴 『모래의 여자』까지가 그의 '실종 3부작'입니다. '실종 3부작'이라는 용어는 어쩐지 카프카의 '고독 3부작'을 연상시키네요.
 1962년에 출간된 『모래의 여자』는 아베 코보의 대표작입니다. 우리말 번역본은 민음사 판이 있습니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55번을 차지하고 있네요. 학부시절에 우연히 이 책을 읽고 주위 선후배들에게 소개했던 생각이 납니다. 대부분 놀랍다는 반응이었어요. '이런 작가를 우리가 어떻게 모르고 있었지?'라는 식이었습니다.
 『모래의 여자』는 소설로 출간되고 2년 후에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요즘의 시스템과 상당히 유사하죠. 영상과 출판물을 동시에 선보이는 전략을 아베 코보는 우리보다 50년이나 빠르게 시작한 셈입니다. 성과는 말할 필요도 없어요. 1964년 제작된 영화 <모래의 여자>가 칸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습니다. 박찬욱의 <올드보이>가 받은 그 상을 말이지요. 이로써 아베 코보는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릅니다. 이후로 그의 작품은 20여 개 언어로 번역돼서 소개되기 시작했어요.

 모래 구덩이 마을에 갇힌 남자의 이야기

 작가 소개가 지나치게 길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작품을 소개해 드려야겠네요. 말씀드린 것처럼 『모래의 여자』는 아베 코보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긴 작품입니다. 내용이 굉장히 보편적이고 우화적입니다.
곤충채집을 떠난 주인공 니키 준페이는 모래로 뒤덮인 마을에서 차를 놓치게 됩니다. 오갈 데가 없는 주인공 니키 준페이는 커다란 모래 구덩이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마을에 다다릅니다. 시작부터가 남다르지요. 모래 구덩이 사면에 집을 짓는 일이 어디 가당키나 합니까. 여하튼 사구 마을의 오두막이 소설의 주요 배경입니다.

 

 주인공은 사다리를 밟고 절벽 같은 모래 구덩이 사면에 있는 오두막으로 내려갑니다. 오두막에는 젊은 여자가 혼자 살고 있습니다. 여자가 혼자 사는 외딴 집에 객지의 남자를 들이는 것도 묘한 설정입니다. 다음 날 아침 니키 준페이는 자신이 밟고 내려온 사다리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이 감금한 것입니다. 주인공은 여자와 오두막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게 됐습니다.
 모래는 끊임없이 쏟아져 내려옵니다. 모래를 계속 퍼내지 않으면 마을은 사라지게 됩니다. 모래 구덩이 위에서 로프에 묶인 삼태기가 내려오면 거기에 모래를 퍼 담고 위에서 그것을 다시 끌어 올립니다. 가끔 삼태기에는 물과 음식이 담겨 내려옵니다.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사람을 실어 나르는 운송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준페이는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허사입니다. 결국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마을에 살기로 마음을 먹게 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모래 속에서 물을 만들어 내는 장치를 고안하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을 통제하는 장치가 물이었거든요. 그런데 그가 물을 스스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물을 만들게 되었다는 희망에 차서 주인공이 탈출할 생각조차도 잊게 된다는 것입니다. 작품 말미에 주인공은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포기하고 마을에 머물게 됩니다.

 공적 시간과 사적 시간의 부딪침
 마침 라디오 얘기로 시작했으니 이런 대목을 한 번 인용해 보고 싶습니다. 주인공은 여자가 원하는 물품이 '라디오'와 '거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논평을 합니다.

 "라디오와 거울… 마치 인간의 생활이 그 두 가지만 있으면 성립될 수 있다고 믿는 듯 한 집념이다. 과연 라디오도 거울도, 타인과의 관계를 연결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물건들은 인간이란 존재의 근원과 관계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공적 세계를 갈망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 욕망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라디오는 시간, 사건, 인물을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장치입니다. 개인은 공공의 시간과 사건을 갈망합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물론 개인의 욕망이 언제나 공적 세계와 잘 어우러지는 것만은 아니지요.
 카프카와 같은 작가들은 이러한 광경을 훨씬 오래전에 흥미롭게 묘사했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해충으로 변신해 버립니다. 그가 눈을 뜨고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시간입니다. 출근시간. 바로

 

 사회적 시간이지요. 그레고르 잠자는 기차를 놓칠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괴로워합니다. 사회에서 박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카프카의 『심판』에서도 이러한 장면이 나와요. 카프카는 아마도 시간에 대한 강박증이 있었던 작가였을 것입니다. 여하튼 『심판』의 주인공 요제프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체포되고 심문을 받으러 가야 합니다. 판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은 한 시간 오 분 전에 나타나야 했어" 요제프는 뜨끔했죠. 그래서 다음주에는 제시간에 출석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나와 있어요. 세계와의 약속이 완전히 망가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을 가장 강력하게 구속하는 장치인 법과 그것을 관할하는 판사와의 약속이 어그러지는 것이에요. 

 

 말씀 드린 것처럼 『모래의 여자』의 남자는 모래 구덩이 마을에서 탈출을 포기함으로써 사회에서 완전히 탈각된 인간이 돼 버립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에는 판결문이 하나 첨부되어 있습니다. 대단히 카프카적입니다. 판결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부재자 니키 준페이를 실종자로 확인함" 작가가 굳이 자신의 작품 말미에 판결문을 첨부한 이유는 더 말씀 안 드려도 되겠지요?

판옵티콘과 모래 구덩이


 『모래의 여자』는 대단히 콤팩트한 작품입니다. 우화적으로 구성돼 있지요. 그래도 내용은 대단히 치밀합니다. 기본적으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모래 구덩이 마을은 벤담과 그의 동생이 기획한 판옵티콘(panopticco)을 연상케 합니다. '일망감시법'이라는 용어로 우리에게 잘 아려져 있지요. 

 

 20세기 최고의 석학 미셜 푸코는 이 감옥이 사회의 전반적인 통제와 규율의 원리로 확산됐다는 지적을 했습니다. 『감시와 처벌』이라는 저서에서요. 푸코를 위시한 아날학파의 작품은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의외로 재미있게 읽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얘기를 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 사람들은 구덩이 위에 망루를 설치해 탈주자를 감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시가 내면화 돼 버린 주인공 니키 준페이는 마을을 떠나는 것을 포기하고 말지요. 인간의 개별성이 사회라는 공공의 영역으로 흡수되는 장면을 작가는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짧은 소설이지만 많은 얘기를 하고 있는…


 『모래의 여자』에는 의외로 많은 내용이 함의돼 있습니다. 모래 구덩이는 시지프스의 형벌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시지프스에 대해서는 모두들 잘 아시지요? 신들을 속이고 죽음을 피한 죄로 산정까지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왕 말이지요. 사구 안에서 모래를 퍼내는 사람들은 마치 시지프스의 형벌을 받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모래를 퍼내도 모래는 바위처럼 계속 흘러내리죠.

 

 시지프스의 형벌에 관해서는 프랑스의 소설가 까뮈가 재미있게 다루고 있어요. 인간은 시지프스처럼 끊임없이 목표를 지향하지만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삶은 동력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나치게 비관적인 아이디어 아닌가요? 어쨌든 까뮈는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게 프로그래밍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덧붙여 까뮈는 그러한 삶을 인정하고,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가 진정한 승리자다. 뭐 대략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모래 구덩이에 갇혀 어떻게든 삶을 버텨내는 것은 실존의 문제와도 연관됩니다. 짧은 소설 한 편으로 두서없이 장광설을 늘어놓았습니다. 이쯤에서 작품 후반부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볼까 합니다.
 "그럭저럭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3월 초에 드디어 라디오를 사 지붕 위에 높은 안테나를 세웠다. 여자는 행복과 감동에 젖어, 반나절 내내 다이얼을 좌우로 돌렸다. 그 달 말에 여자가 임신을 하였다."

 역시 라디오 얘기였습니다. 채널을 맞춰주신 여러분이 계셔서 더욱 완벽한 가을밤입니다. 감사합니다.

서덕민 교수(융합교양대학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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