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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회 원광 김용 문학상당선작 - 희곡(시나리오)김은송 - 탁류, the ready made -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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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05  1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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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 the ready made - 탈출

 

 

※채만식의 소설 『탁류』와 『레디메이드 인생』의 주인공 2세들이(송희, 창선) 결혼해서 군산에 정착했다는 설정.

※작성의도: 탁류와 레디메이드 인생의 인물 이후 세대의 시선으로 기성세대를 조망해보는 동시에 관습 내에서의 인간과 그것을 탈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대립구도를 그려보고자 하였다. 해당 작품에서 ‘탁류’는 가부장제이며 the ready made는 그 구조 속에서 기성화된 사람을 의미한다.

※주요 등장인물

1. 주인공-박 희규 (과거에는 간호사. 현재 순간에는 사진작가 준비 중. 송희와 정신적 유대를 가지지만 가장 대조적인 인물이다. 이전 세대와의 단절, 혹은 구분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창선과의 갈등과정을 통해 자신의 진로를 더욱 확실히 하게 된다.)
2. 할머니-장 송희 (가사 노동, 『탁류』속 어머니인 채봉이 힘겨운 삶을 살았던 것의 영향으로 비교적 강한 존재인 창선에게 자아를 의탁하는 경향이 생겼다. 창선이 은퇴 이후 약해지는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
3. 할아버지-박 창선 (인쇄공 출신, 은퇴 이후 자존감 하락, 아버지에 의해 정해진 삶을 살았고 기술공으로서 기술이 쇠퇴함에 따라 장인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었다. 가부장성을 상징하는 인물임과 동시에 가부장제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4. 남자친구-장희

※숫자 관련 설정
송희 사망 시점-탁류 연재 종료일
창선의 실질적(정신적) 사망 시점- 레디메이드 인생 연재 종료일

※데칼코마니적 구도: 기성세대의 인물과 자녀세대의 인물이 비슷한 상황에 놓이지만 서로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서로 다른 결말을 차지하게 됨.

S#1. INT/화장장/낮

(화장터로 들어가는 창선의 관, 그걸 지켜보며 비교적 담담한 표정의 희규와 울고 있는 가족들.)

희규 Narr: 할아버지가 누워서 불 속에 들어갔다. 친척이란 사람들은 가벼운 입을 모아 호상이라 했고,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오래, 아주 멋대로 사셨으니까.

S#2. EXT/납골공원/낮
(수목장 나무에 창선의 사진이 걸리고, 희규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창선의 얼굴.)

희규 Narr: 인쇄공이었던 할아버지는 평생 손끝으로 깎고 괴롭히던 나무의 밑에서 영원히 잠들게 되었다. 모순에 모순도, 원수지간이 동침하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무 클로즈업)

S#3. INT/집(다락방)/저녁

(계단을 오르고, 문을 열고 들어와 약한 전등을 킨 후 벽장을 뒤지는 희규. 희규의 손에는 휴지통이 들려져 있다.

(노트를 한권씩 꺼내 손에 들고 3~4권쯤 찾았을 때 벽장 안에서 통이 넘어지고 바둑돌이 쏟아진다.)

(희규가 앓는 소리를 내며 바둑돌을 다 주워 담은 후 바닥에 기대고 앉는다. 바닥에 노트들이 보이고 표지에는 ‘박창선’이라고 쓰여 있다.)

(희규는 노트들을 다 휴지통으로 집어넣고 사진첩 한권만 남긴다.)

(사진첩을 손에 들고 먼지를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박창선-장송희’ 라고 쓰여 있는 표지가 보인다. 사진첩을 넘기는 희규의 손.)

(두 사람의 흑백사진으로 이어지다가 가족 수가 늘어나는 사진들이 비춰진다.)

희규:(사진 속 송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우리 할머니 예쁘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희규.)

(계속 넘기는 손, 사진첩의 마지막 장, 호수에서 혼자 서 있는 송희의 사진에 멈추는 희규의 손. 사진을 꺼내 손에 들고 응시한다. 그 때 울리는 휴대폰. 담배를 비벼 끄고 전화를 받는다.)

희규: (전화를 받으며)어 장희야, 나 집에 들어왔어.
장희: (그래? 할아버지는 잘 보내드렸어?)
희규: (계속 사진을 응시하며)생각보다 다들 담담하셔서 나도 오히려 편했어, 할머니 때랑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
장희: (나도 끝까지 돕고 올수 있었으면 좋을 걸.)
희규: 부모님이 다 너한테 고맙다고 전해 달라 셔. 나중에 같이 밥 먹자고도 하시고.
장희: (별말씀을 다 하시네. 당연한 일인데. 지금은 뭐하고 있어?)
희규: 할아버지랑 할머니 사진첩보고 있어.
장희: (사진?)
희규: 응, 두 분 같이 있는 모습 보고 싶어. 할머니 돌아가시고 안 봤거든.
장희: (좀 나중에 하지, 내일 촬영 일정도 있다며.)
희규: 이것 까지 다 마쳐야 쉴 수 있을 것 같아. 장희야, 이따가 내가 다시 전화할게.

(벽에 기대앉은 희규의 모습이 보이고, 희규는 그 사진첩마저 휴지통에 넣는다.)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문 희규. 연기를 뱉으며 정면을 응시한다.)

(하단, 어두운 바닥에 타이틀이 뜬다.)

탁류, the ready made.

S#4. EXT/길/아침(낮)

(2년 전)

(희규가 출근하는 사람들을 거슬러 길을 걷고 있다.

(희규의 옆으로는 5월임을 알려주는 푸른 나무들이 서있다.)

(그때 울리는 휴대폰, 문자가 와있다. 내용을 확인하는 희규)

엄마-「딸! 지금 퇴근하고 오는 길이지? 너무 수고했고 집 도착하면 자기 전에 할아버지 아침만 챙겨드리고 자라ㅠㅠ 엄마가 납품 때문에 지금 나가봐야해. 정말 미안해 딸!!」

(휴대폰 화면에 시간이 보인다. AM 7시 15분,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고 걷는 희규)

S#5. INT/집(부엌)/아침(낮)

(식탁에 앉아있는 창선, 그 앞에 식탁을 차리고 있는 희규)

창선:(수저를 들며)너희 엄마는 어디 갔냐?
희규:(반찬을 옮기며)단체 인쇄 마감 때문에 엄마아빠 다 일찍 나가셨어요.
창선: 일이라고 해봤자 컴퓨터로 다 할 텐데, 사람이 아침 일찍 바쁠 게 뭐가 있어?
희규: 컴퓨터는 사람이 안 다루나, 그게 다 일이지. (방을 향해) 할머니! 일어나서 식사하세요!

(방에서는 대답이 없다.)

창선: 부르지 말어, 저 사람 밤새 자다 깨다 했다.
희규: 요즘도 잘 못 주무세요?
창선: (밥을 먹으며) 다 늙어서 몸이 편하니까 잠이 안 오는 거지. 거의 매일 같이 그래.
희규: 할머니는 엄마 출근하면 집안일 다 거들어주시느라 나름 바빠요.
창선: 바깥일 안 해본 사람이 그럼 다른 소일거리 뭐 있겠냐.
희규: (할아버지를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방문을 보며)이따 차려 드시려면 귀찮으실 텐데.
창선: 네가 저 사람 깨면 다시 차려주든가 해.
희규: (창선을 돌아보며) 할아버지, 저 지금부터 자면 점심때나 겨우 깨요. (가방을 챙기며) 다 드시면 그릇은 그냥 두세요, 자고 일어나서 제가 치울게요.

(방으로 들어가는 희규, 그걸 지켜보다가 마저 밥을 먹는 창선)

S#6. INT/집(부엌)/낮

(식탁에서 일어난 창선,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기는데 그 와중에 손에서 놓쳐 깨트린다.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그때 방에서 나오는 송희)

송희:(바닥에 떨어진 그릇을 보고 빠르게 걸어오며)아이고, 이게 뭐야, 만지지 말고 저리 가 있어요.
창선:(허리를 숙이며) 내가 할 테니까 그만 둬. 뭘 이런 것 가지고 그래.
송희:(손으로 밀어내며) 아이 저리 가 있으라니까! 공연히 만져서 손 베지 말고 들어가요.
창선:(못이기는 척 손을 거두며)이제 쓸 일도 없는 손 가지고 뭘 그리 호들갑이야? 죽으면 다 썩어.
송희: (쪼그려 앉아 맨손으로 파편을 주우며)희규는 뭐하고?
창선: 야간 근무하고 이제 자러 갔어.
송희: 그렇다고 당신이 지금 이런 걸 들고 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집에 있기 심심하면 애들 인쇄소 일하는 거나 보고 오던가, 평생 그 일만 했으면서 왜 근처도...... 
창선: (말을 끊으며)쓸데없는 소리, 내가 거길 가서 뭘 할 수가 있어?
송희: 그냥 지켜보고 말이라도 한마디 할 수 있잖아요
창선:(버럭 화를 내며) 고물이 되서 쫓겨났으니 구경이나 하고 다니라 이거야?
송희:(싱크대로 걸어가며)아이고, 내 말은 그게 아니고...미안해요, 들어가세요. 정리는 내가마저 할 거니까.
창선: (등에 대고 큰소리로)집 안에만 박혀있는 게 나라고 좋아? 좋아 보이느냐고! 남의 속은 조금도 모르면서, 그저 입바른 소리하면 그만이야?
송희: 알았으니까.......들어가요.

(쾅 닫는 소리가 들리고 송희는 설거지를 계속한다.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고, 물을 끄고 나서 비춰지는 송희의 손가락, 그릇 파편에 베여 피가 나고 있다. 송희는 다시 물을 틀어 피를 씻어버린다. )

S#7. INT/집(창선·송희의 방)/낮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송희, 살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는 창선)

송희:(천천히 걸어와 바닥에 앉으며) 당신 속 불편한 거 내가 다 알아, 미안해요.
창선:(미동도 없음)
송희: 그래도 나는, 당신이 너무 쳐져 있는 게 보기 힘들어서, 걱정도 되고.
창선:(신문을 한 장 넘긴다.) 재떨이나 비워놔.
송희: 당신이 평생 했던 일이잖아요, 아버지로서 아들, 며느리 격려도 해주면 좋을 것 같았어.
창선:(신문을 내려놓으며)차라리 내 관 뚜껑에 못질을 하라고 해, 아니면 납골당 몇째 줄이 마음에 들더냐고 물어보던가. 내가 무가치한 놈이라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다니면, 죽는 수밖에 더 있어? 자네가 바라는 게 그거야?
송희:(창선의 팔을 붙잡으며) 당신 일을 못하는 거, 하나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세상 다 변했잖아. 이렇게 늙어서 일하려고 드는 것도 욕심이야. 그런데 당신은 왜 죽을 날 받아둔 것처럼 사시냐고.
창선:(뿌리치며) 누누이 말했잖아. 나한테는 무직이 무능이고 무능은 죽음이야. 배운 거 없이 딱 하나 쓸모 있는 기술로 사람 취급받고 살았는데 이젠 그마저도 못써먹고 방구석에 앉았어. (송희를 노려보며)하기야 평생 무능하게 집에서만 산 자네가 뭘 알아? 알 수가 없지.
송희:(울먹이며) 그래요, 난 평생 집안에서 당신을 통해야 세상을 봤어.
창선: (의문인 표정)뭐?
송희: 당신하고 사는 집 천장이 내 하늘이야, 그런 당신이 약해지는 모습만 보면, 난 밤에 잠도 안 오고 숨도 안 쉬어져요. (오열) 당신이 살아야 나도 살아요.
창선: (질려하며 삿대질을 하며) 이런 사람한테 길게 말한 내가 등신 천치야. 천치! (일어나서 나가버린다)

S#8. INT/집(창선·송희의 방)/낮

(소리죽여 우는 송희, 거울을 쳐다보며 울다가 눈물을 닦고 손에 밴드를 붙인다. 곧바로 옷장 앞에서 몇 벌의 옷을 들춰보며 고민하는 표정이 보인다. 결국 분홍색 옷 한 벌을 골라 입고 다시 거울 앞에 앉아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다.)

S#9. INT/집(희규 방)/낮

(살짝 열린 창문 밖은 정오 이후의 햇빛. 희규는 안대를 한 채 자고 있다.

(희규의 옆에 놓인 휴대폰 화면에 날짜와 시간이 떠 있다. 5월 17일, 12시 23분)

(문을 열고 들어온 송희, 희규의 지저분한 방 상태를 가만히 보다가 희규의 곁으로 간다)

송희:(침대 밑에 앉아 희규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아가!
희규:(뒤척)
송희:(작게)희규야!
희규(안대를 들어올리며)......응?
송희: 할머니랑 놀자!
희규:(등을 돌리며) 아, 장 여사님, 나 졸려요. 이따 또 출근해.
송희:(희규의 몸을 잡고)우리 희규가 할머니 안 놀아주면 할머니 슬퍼.
희규:(여전히 졸려서 느리게 말하며)뭘 또 슬프기까지 해.
송희: 우리 딸내미, 착하니까 할머니가 혼자 노는 게 싫지?
희규:(안대를 벗으며) 이럴 때만 우리 딸내미. (송희를 쳐다보며) 할아버지는?
송희:(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나는 모르지
희규:(비적비적 앉으며)할아버지 밥 차리라고 깨우는 건 아니고?
송희: 할아버지 나가서 드신다고 집에 안 계시네요.
희규: 어디 있는지 아는구먼 뭐.
송희:(이불을 걷어내며)아이고 우리 희규 다 깼네, 다 일어났네.

(여전히 멍한 희규 표정, 눈은 반쯤 감고 있다.)

(창문을 활짝 열어버리는 송희)

S#10. INT/집(다락방)/낮

(햇빛이 들어오는 다락방에서 사진첩을 보고 있는 송희와 희규, 바구니에 담긴 딸기를 집어 먹으며 대화를 한다.)


송희: (사진 하나를 가리키며)자, 이게 나 어려서 서울 살 때.
희규:(잠이 덜 깬 상태)어....... 어렸네, (좀 더 가까이 보며) 옆에 있는 분은 누구에요?
송희: 우리 어머니!
희규: 할머니네 엄마, 글면 나한테는? 증조할머니?
송희: 그렇게 되겠지.
희규: 그런데 어디 아프셨어? 어째 외관이 쫌 (적당한 말을 찾는다) 힘들어 보이시네.
송희: (잠잠 하려는 티가 나는 목소리)어, 어떤 나쁜 사람이, 우리 가족을 해치려고 했데. 난 어려서 잘 몰랐어. 그래서 그 나쁜 사람 좀 혼내주려다가.
희규:(송희를 바짝 보며) 그런 미친놈이 다 있었어? 증조할아버지는 뭐하시고?
송희: 일찍 돌아가시고 없었지, 사진 한 장도 없어.
희규: 그러게 할아버지 사진이 없네. (사진첩을 넘기며) 그래도 증조할머니가 장 여사님 엄청 예뻐했나 봐. 사진마다 끼고 계셔.
송희: 그럼, 어머니 평생에는 나밖에 없 댔다.
희규: (송희의 얼굴을 쳐다보며)와, 근데 우리 엄마아빠는 나한테 왜 그럴까.
송희: 간호사까지 시켜놓으니까 별소릴, 어여 돈 벌어서 시집 가.
희규: (비죽) 시집을 누구 좋으라고 가. 사진 배우러 서울 가고 싶은 것도 못 가게 하구, 아들 기다리면서 지어놓은 이름 그대로 주고. 성의가 없어, 사람들이.
송희: (살짝 노려보며) 가시내야, 옆에 붙어서 밥해주고 일자리 찾을 때까지 살아 있어줬으면 너희 어매 아버지 할 일 다 한 거야. 감사해야지.
희규:(못들은 척)할머니, 사진들 이렇게 두기는 좀 아깝다.

S#11. INT/집(거실)/낮

(거실에 나와 액자에 사진을 넣고 있는 두 사람, 계속 나오는 사진 속에는 2인 이상만 등장한다.)

희규: 장여사, 여사님은 왜 독사진이 하나도 없어요?
송희: (액자를 들여다보며)좋은 곳을 혼자 가냐, 가족하고 같이 가니까 사진도 같이 찍게 되는 거지.
희규: (송희를 쳐다보며)에이, 그래도 자기만의 기분이 있는 건데, 어떻게 다 같이만 찍어요, (창선의 독사진을 가리키며)봐봐, 할아버지는 혼자 찍잖아. 이때 할머니 뭐하셨어요?
송희:(의문?)글쎄? 이 사진을 너희 아빠가 찍었을 테니까 그 옆에나 섰겠지.
희규: 어휴 재미없어, 어딜 가나 무슨 차이가 있어요. 만날 남편 옆에 아니면 아들 옆인데. 장 여사님 진짜 재미없다.
송희: 왜 재미가 없어. (창선의 방문을 본다.)재밌지. 비탈길 걸을 땐 남편 손잡고, 힘들어서 못 걷겠으면 아들한테 업히기도 하고. 그 사람들 먹이고 입히는 이 손으로, 나는 재미를 다 본 사람이야. 너도 나처럼만 행복해라.

(희규의 전화가 울린다.)

희규:(전화를 받고)여보세요? 아빠?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usb? 무슨 usb? 아니 우리 집 usb가 다 검은 색인데 무슨 검은 usb를 찾고 있어. 미키마우스? 좀 기다려 봐요, 끊지 말아봐.
(전화기를 들고 거실을 돌아다닌다. 소파 위, 탁자 위, TV쪽을 보고 다시 소파 아래로 돌아와 발견한다.)

희규 :오, 찾았다 (손을 뻗어 미키마우스 usb를 집는다.)이거를 뭐 어떻게 하라고? 엥? 싫어, 아빠가 와요. 대학로까지 언제가. 싫어, 맛있는 거? 미룡동 맛있는 거 없어. 아 진짜 싫은데 아, 아빠? 여보세요?(전화가 끊겼다.)
송희: 왜, 아빠가 뭐 시켰어?
희규:(불만 가득한 목소리)엉. 할머니의 귀한 아드님께서 (usb를 눈높이에 들고)이거 가지고 가게까지 오래요. 잘 좀 챙기지.
송희: 아빠한테 말하는 버릇 봐봐!
희규: 그럼 잘 챙기라고 하지 다 흘리라고 하겠습니까? 장 여사님? 여튼 나 이제 할머니랑 못 놀아요. 아빠 심부름하러 나가.
송희:(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도 같이 가자.
희규:(겉옷을 입으로 방으로 들어가며 큰소리로) 할머니 나랑 둘이 다니면 불안하다고 싫어하시잖아, 할아버지라도 전화할까요?
송희:(덩달아 큰소리) 밖에 나간 사람 뭣 하러 불러들여, 그냥 산책삼아 가는 거지.
희규: (방에서 나오며)진짜 괜찮으세요?
송희: (웃으면서)응, 나 이제 하나도 안 무섭다.
희규: 별일이네. (화들짝?) 오 그래, 그럼 내가 오늘 장 여사님 사진 완전 예쁘게 찍어드릴게!

S#12. EXT/ 길거리/낮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희규와 송희, 지나가는 차 사이로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웃고 있는 두 사람)

S#.13 EXT/길거리/낮

(송희가 버스에서 내리며 살짝 삐끗하고, 급하게 부축하는 희규를 보며 살짝 웃는다. 서로 팔을 붙잡고 인도를 걷는 두 사람, 인쇄소에 가까워지는 뒷모습이 보인다.)


S#14. INT/가게/낮

(어수선한 가게 안에서 종이를 옮기고 있는 희규의 아빠)

희규:(가게 문을 열며)아빠!
송희:(뒤따라 들어오며)아들!
아빠: 어떻게 둘이 같이 와? (송희를 보며)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송희: 무슨 일은, 집에 있기 심심해서 희규랑 같이 나온 거지.(의자를 찾아 앉는다)
희규: 할머니 완전 별일이야, 나랑 둘이 밖에 나오면 하늘 무너지는 줄 아시더니.
아빠: 둘이 이렇게 다니니까 보기 좋기만 한데, 할머니 자주 모시고 다녀.
송희: (손사래)아이고, 나 힘없어서 못 다닌다.
희규: (송희의 옆에 앉으며) 그으래, 차있는 아빠가 좀 모시고 다녀요.
아빠: (웃으면서) 허허, 알았네.
송희: 아들, 밥은 먹었니?
아빠: 애 엄마한테 도시락 포장해오라고 했어요, 그 사람 오면 같이 먹어야죠.
송희: 반찬 몇 개 해다가 먹는 게 뭐 얼마나 시간 걸린다고 밥을 사먹어.
아빠: 집 밥 먹으면 저야 좋은데, 하는 사람이 번거롭잖아요.
희규: (갑자기 생각난 듯)아, 우선 이거 받으시고(usb를 건네준다.) 결제는 현금만 가능합니다, 고객님?
아빠: (웃으면서)그래, 아빠가 바빠서 데려다주지는 못하고, 할머니 더워하시면 시원한 거 사드려(지갑을 꺼내 돈을 건네준다.)
희규: 어차피 우리 집으로 안가요. 더 놀다갈 거야.
송희: (아들의 팔을 잡으며)아이고, 일은 안 힘들어?
아빠: 일이 매일 똑같죠 뭐, 오늘은 납품 마감 때문에 좀 정신이 없네요.
송희: (팔 쓰담쓰담)우리 귀한 아들 고생해서 어떡해, 저녁은 꼭 집에서 먹어. 바깥 밥 계속 먹으면 얼굴 상한다. (희규를 보며)네가 아빠 좀 잘 챙겨. 아빠 고생하면 너도 고생이야.
희규: (빈정 상함) 할머니, 나 지금 3교대하고 아빠 심부름 온 거거든요? 내 귀중한 수면 시간을 쪼개서 나와 있는 거야. 이 이상 극진할 수가 없어요.
송희: 자기 사업하는 사람은 쉬는 시간에도 쉬는 게 아니야. 옆에 같이 있는 사람이 안도와주면 누가 도와줘?
희규: (입만 웃으며)나는 내 몸 끌고 다니는 것만 해도 도와드리는 거야. 아빠 이렇게 바쁜데 딸 쓰러져 봐요, 얼마나 걱정이겠어.
아빠: (딱밤을 때리는 시늉을 하며) 말이나 못하면! 오늘은 몇 시 출근이야?
희규: 오늘도 나이트, 들어가서 좀 더 자야해요. 이대로 출근하면 진짜 사고 칠 것 같아.
송희: 아이고, 간호사 양반 실수하면 사람 잡을라, 어서 가자.

(의자에서 일어나는 송희의 팔을 잡아 부축하는 희규.)

(문 쪽으로 걸어 나가다가 돌아서서 아들의 손을 붙잡고 한참동안 밥 잘 챙겨먹으라는 말을 반복하는 송희. 송희의 등을 떠밀고 밖으로 나가는 희규)

S#15. EXT/호수공원/낮

(호수가 보이는 공원의 입구, 벤치에 앉아있는 송희의 옆모습이 비춰진다. 멀리서 음료를 손에 들고 걸어오는 희규)

송희:(호수를 보며) 아이고, 속이 다 시원하다.
희규: (옆에 앉고 음료를 건네며)바로 옆 동네 살면서 왜 처음 온 것처럼 그래요?
송희: 처음은 아니어도 오랜만이잖아.(음료를 보며)나도 커피 마시겠다니까 왜 이거 사왔어?
희규: 할머니 안 그래도 요즘 밤에 잘 못 주무신다며. 커피 드시면 더 심할까봐서요.
송희: (앞을 보며 음료를 개봉한다)쓸데 없다, 늙으면 밤잠 없어지는 게 당연하지.

(호수를 보며 음료를 마시는 두 사람, 잠시 침묵이 흐른다. 주변 사람들의 소음만 들림.)

희규: (손을 만지작)집에만 있기 답답하면, 할아버지랑 좀 같이 돌아다니셔.
송희: 일 없어, 내가 답답했으면 진작 집안에서 뛰쳐나왔겠지.(자기 손을 보며) 집안에야 내 손으로 할 일 있다지만 밖에 돌아다니면 뭐 할 일 있냐. 사람은 다 있어야할 곳에 있는 거야.
희규: 그걸 누가 정해줘. 바깥사람들 밥 먹여서 내보낸 게 누군데. 좀 데리고 다니라는 말도 못해요? (송희 손의 밴드를 보며) 아이고 손은 또 왜 그래.
송희:(음료를 마시다가 손을 휘휘 저으며) 아이고 얘, 머리 어지러운 얘기 하지마라, 놀러 나와서 잔소리하기 있냐?
희규: 할머니도 아까 시집가라고 잔소리 하셨잖아, (시간을 확인하며)벌써 3시 반, 거의 4시네. (송희의 팔을 붙잡으며)장 여사, 우리 얼른 조금만 걷고 집에 가요, 나 진짜 자고 싶어.
송희: (무릎을 치며) 그래, 걷자.

(벤치에서 일어나 쓰레기를 버리고, 다리 쪽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 주변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S#16. EXT/다리 위/낮(늦은 오후)

(다리 위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희규가 송희의 뒤를 따라 걷고 있다.)

희규: (호수 풍경을 보며)여기서 사진 한 장 찍어볼까요?
송희: (고개를 저으며)조금만 더 가서 찍자, 여기 풍경이 별로야.
(더 걸어감)

희규: (뒤따라가며)할머니, 다리아파요
송희: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으며)거의 다 왔어, 옛날에 와본 곳에서 찍고 싶어서 그래.

(더 걸어감)

희규: (자리에 멈춰서며)나 힘들어서 더 이상 못가요!
송희: (따라 멈추며)더 갈 것 없어. 이 자리야.
희규: 어휴, 진짜 유난이야. 물 배경 다 거기서 거기지.
송희: 이왕 찍는 거 내가 찍고 싶은 데서 찍으면 더 좋잖아.
희규: 알았어요. 빨리 포즈잡고 서봐! (카메라를 들며) 여기보시고!
송희: (다리에 기대서며)이렇게 하면 되냐?
희규: (카메라를 통해서 보며)엉, 지금 되게 예뻐요. 여기 잘 보세요! 하나, 둘, 셋!

(사진을 찍었고, 확인하는 희규)

송희: (어색하게 웃음)잘나왔니?
희규: 그럼, 누가 찍었는데. (카메라를 들고 오며)한번 보실래요?
송희: 그래, 보자 어디한번.

(카메라에서 송희의 사진을 보여준다.)

송희: (질색)아이, 얘, 얼굴이 이게 뭐야, 표정 너무 어둡게 나왔잖아.
희규: 네? 이게?
송희: 그래. 얼른 다시 찍어줘.
희규: 예쁘기만 하구만.
송희: 내가 맘에 안 들어, 얼른 다시 찍어줘라.
희규: 알겠어요, (점점 멀어져 자리를 잡는다.) 잘 서보세요, 여기보고! 하나, 둘, 셋!
송희: 이번에는 잘 웃고 있니?
희규: 응, 아주 환-완하게 웃고 계십니다.
송희: 그래, (멀리 보며) 딸내미야, 네 뒤에 풍경이 너무 예쁘다. 저것도 좀 찍어줘라.
희규: (뒤를 돌며)와, 진짜 예쁘다. (사진을 몇 장 연속해서 찍는다.)
송희: (풍경을 계속 돌아보며)아가, 아카시아 향이 나는구나.
희규: (계속 등진 채로 사진을 찍으며) 5월이니까요,

(호수의 풍경이 잔잔하게 보인다. 아주 조금씩 들리는 바람과 물소리))

(풍덩하는 소리가 들리며, 등을 돌리는 희규, 앞에는 아무도 없다. 달려가는 희규. 달려가는 동선이 모두 보이는 마스터샷. 희규의 몸짓은 보이지만 모두 묵음 처리한다.)

S#17. INT/검은 화면/낮

(송희 사망 2달 후)

(검은 화면에 나레이션만 들린다.)

Narr.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에 남들만큼 슬퍼했고, 울었고, 딱 그만큼 할머니를 그리워했다. 애초 그 이상은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S#18. INT/검은 화면/낮

-송희 사망 1년 2개월 후-

(식탁을 차리고 있는 창선, 반찬을 옮기다가 식탁 아래 엎지르고 옷과 바닥이 엉망이 된다. 멍하니 쳐다보던 창선.)

(허리를 숙여 늘어진 반찬을 손으로 집어 담다가 깨진 그릇 조각을 만지고 놀란 창선. 이내 멈춰버리고, 자리에 주저앉는 뒷모습이 비춰진다.)

Narr. 내가 간호사를 그만둔 순간부터 할아버지는 내가 차리는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다. 사람이 차린 게 아니라나.

(밖에서 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는 희규, 어깨에는 카메라 장비가 들어있는 가방이 메어져 있다. 창선의 모습을 본 희규는 굳은 표정으로 부엌을 지나쳐 방으로 간다.)

창선:(지나가는 희규에 대고)너 어디 다녀 오냐.
희규:(멈춰 서서)일이요.
창선: 돈도 안 버는 게 무슨 일이야, 시간 버리는 짓이지.
희규:(창선을 똑바로 보며) 아니요, 일인데요.
창선:(깨진 그릇 조각을 희규를 피해 던지며) 또 같잖은 사진 찍겠다고 돌아다니고 오는 거면 다 때려치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면 그게 사람이냐? 차라리 너 가게 나가. 기술 배워서 사람 구실해!
희규:(싸늘하게)기술 없어도 저 사람이고, 제가 일하고 싶은 기술 배우고 있어요.

(눈을 마주치는 두 사람, 3초 정도 정적)

희규:(한숨을 쉬며)일단 옷 갈아입고 씻으세요, 바닥이랑은 제가 치울게요.
창선: 필요 없다.
희규: 얼룩지면 세탁하기 힘들어요. 얼른,
창선: (말을 끊으며)필요 없다고 했다.
희규: 할아버지가 세탁하실 것도 아니잖아요.
창선: (당황)뭐?
희규: 직접 손으로 세탁에서 널어두실 거 아니시잖아요.
창선: (일어서며) 이제 너까지 날 완전히 무시하는구나.
희규: 누가 할아버지를 무시해요, 저 그런 적 없어요.
창선: 고작 집안일 하는 걸로 네 할애비 몰아세우는 게 무시하는 것 말고 더 되냐?
희규: (잠잠한 말투로) 할아버지한테 하시라는 게 아니라, 어차피 세탁기에 넣어만 두시면 일 끝나고 온 엄마가 또 해야 하니까, 지금 제가 하겠다고요.
창선: 집어치워! 이 정신머리 없는 자식아. 어디서 돈 벌 생각도 없는 게 지 엄마 위하는 척이야! 같잖은 집안 일 도울 정신은 있냐?
희규: (식탁의자에 카메라 가방을 올려두며) 제가 직장을 다녀도, 엄마는 집안일 하는 건 안변해요.(장갑을 끼고 반찬을 쓸어 담는다)
창선: 집안 일 하는 게 뭐가 대수야, 지 먹을 밥 지가 하고, 지가 사는 집 지가 청소하는데.
희규: (손을 거칠게 움직인다.)
창선: (의자 위에 올려 있는 가방을 향해 손을 뻗고 카메라를 꺼낸다.) 네가 이걸 가지고 있으니 허튼 생각하고 돌아다니지.
희규: (창선을 막아서며) 할아버지 뭐하세요, 이리주세요!
창선: (카메라를 집어던지며) 사람 구실할 생각도 없으면서 이따위 기계 들고 돌아다니는 짓 할 거면 나 죽거든 해. 내가 살아있는 한은 그 꼴 못 본다.(숨을 헐떡이며) 내 집, 내 집에서는 절대 안 돼!
희규: (온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할아버지!
창선: (비꼬는 말투)네가 저거 들고 다니면서 찍은 사진, 기껏해야 네 할머니 영정사진 됐다. 그러고도 넌 사진이 찍고 싶든? (식탁을 손으로 밀고 카메라를 가리키며)이 징그러운 걸 가지고 아직도 사진이 하고 싶어?
희규: (울먹이며) 고작 그 한 장이, 온전히 할머니 혼자 찍은 사진이었어요. 내가 꿈이고 뭐고 다 접고 돈 벌고 있을 때 찍어드린 그 한 장이, 할머니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독사진이었다고요.
창선: (희규를 노려보며)그래서, 네 공치사하고 싶은 거냐? 할머니 영정사진 예쁘게 찍어드렸으니 나 이제 돈도 안 벌고 이것만 하렵니다, 싶어?
희규:(가라앉은 목소리) 안돼요?
창선:(어이없음)뭐?
희규: (계속 담담한 목소리)그러면 안 되는 거냐고요. 할아버지는 이해 못하시겠지만 그 사진 한 장이 저한테는 엄청난 의미에요. (격양) 이 하나가! (다시 담담)얼마나 내 뒷머리를 치고 지나간 것인지, 할아버지는 알 수가 없죠.
창선:(헛웃음)미쳐버린 애를 데리고 내가 너무 길게 얘기를 했다. 넌 길게 말할 가치가 없어. 이 정신 나간 것아.
희규: 저도 할아버지랑 별로 말 안하고 싶은데. 우리 이제 그만 말해요. 옷 갈아입으시고 밖에 내놓으세요, 어설프게 던져두시면 오히려 사람 더 귀찮으니까.
창선:(희규를 노려보며)너!
희규:(바닥을 마저 치우며)말 할 가치가 없다면서요. 그만 말하시고 들어가세요. 저 이것들 치워야 해요. (시선은 바닥에 고정한다.)

(희규의 모습을 한참 노려보던 창선. 힘이 빠진 걸음으로 천천히 방으로 간다. 문고리를 붙잡고 다시 희규를 돌아보고 섰다.)

창선:(떨리는 목소리로)네 할머니면 절대로 나한테 이렇게는 안했다.
희규:(대답안함)
창선:(울음 섞인 목소리)네 할머니면, 그 사람이면, 아무리 내 꼴이 우습고 고까워도 너처럼 대들고 악쓰지는 않아.
희규:(여전히 안쳐다보며)그래서 할머니 어떻게 됐는데요.
창선:(흐느끼기 시작)
희규:(창선을 보며)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할머니 어떻게 되셨는지.
창선:(주저앉아 계속 운다.)
희규: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로 가며) 할머니는 할아버지 때문에 행복했다고 했어요, 그날에도. 근데 할머니 틀렸어.
창선: (희규를 노려본다.)
희규: 할머니는 할아버지 옆이라는 그 안정감 때문에 행복했던 거야.(입만 웃으며) 아니, 안정감을 행복이라고 착각했던 거야. 그게 무슨 행복이에요. 참고 사는 거지.
창선: (떨리는 목소리) 네 할머니 욕보이지 마라.
희규:(장갑을 벗으며)근데 할아버지, 난 할머니랑 다른데.
창선: 뭐? 박희규!
희규:(창선을 돌아보며) 난 내 행복이 뭔지 알 것 같은데, 그니까 저를 좀 내버려 둬주세요.
창선:(노려봄)
희규: 안 놔줘도 잡혀있을 생각 없지만.

(방으로 들어가는 희규.)
(가만히 앉아있던 창선, 눈물을 닦고 일어나서 빨래 건조대로 향한다.)
(거기서 양말을 꺼내 신고 밖으로 나간다.)

S#19. EXT/공원/낮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창선, 주변의 사람들을 보다가 담배를 하나 꺼내 문다.)

(담배를 피우던 창선, 어린아이가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신을 노려보는 아이의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고 담배를 끈다. 그때 표지판이 비춰진다. <금연구역>)

(멀리서부터 걸어와 창선의 옆에 앉는 남자. 창선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인다.)

남자:(멀어진 아이와 부모를 쳐다보며)아이고, 아가 예쁘네. 엄마아빠랑 놀러 나왔나 보네.
창선:(떨어진 담배에 발을 비비며)나는 저만 할 때 저렇게 아버지 손잡고 인쇄소에 일하러 갔는데.
남자:(창선을 보며)아이고 형님, 요즘 애기들한테 그러면 아주 큰일 나지.
창선: 그려.
남자: 요즘 집에서는 어때요?
창선: 집이 좋으면 이 시간에 왜 나와 앉아있어.
남자: 집 좋은 거랑 바깥바람 쐐는 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살아있는 사람이 밖에 다니는 게 당연하지.

(잠시 정적, 거친 자신의 손마디를 만지작거리는 창선)

남자: 형님, 그러지 말고 우리 기원이라도 나오세요, 우리 또래 갈 곳 없는 사람들 다 모여 있는데.
창선: 바둑 취미 없네.
남자: 누구는 재밌어서 합니까, 사람 그리우니 가는 거지. 예전엔 또 곧 잘 두셨으면서.
창선: 옛날엔 뭔들 못했어. 지금하고는 다르지.
남자: (주머니를 뒤지며)아이고 뭐 맘대로 하십시오, 심심하면 오세요.
창선: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담배 줘?
남자:(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씹으며)아뇨, 아뇨. 저 담배 끊고 있어요. 식구들이 냄새를 워낙 싫어해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창선)

남자:(라이터를 막으며)형님, 여기 금연구역이오.
창선:(격하게 반응하며) 이렇게 뻥 뚫린 데서도 못 피우면 어디서 피워! 예전에는 버스 속에서도 다 담배 물고 있었는데.
남자: 세상 바뀌는 게 맘대로 되나요.
창선: (혼잣말 하듯)다 변했지. 나만 쓸모없는 놈이야. 나만.
남자: (당황)형님 무슨 일 있었어요?
창선: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땅에 던지며) 난 이제 쓸모도 없고 구식이란다. 나도 살려고 아등바등한 죄뿐인데. 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이젠 내가 필요 없다고 저리 비키래. 서러워서 살 수가 없다.
남자: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만.
창선: (쏟아내듯)다 저희 잘되라고, 집안 잘 굴리려고, 나 좀 살아보려고 한 짓이었는데, 왜 내가 나쁜 놈이 되어야해? 못된 놈들. 내가 힘이 약해지니 이제 날 이겨버리려고 하는 요량이지.

(당황한 남자, 안절부절 창선의 팔을 붙들고 있다가 툭툭 두드리고 자리를 뜬다. 자리에 멍하니 앉은 창선은 그대로 벤치에 누워버린다.)

S#20. INT/희규의 방/밤

(노래를 틀어놓은 채 누워있는 희규)
(노래는 ‘황금별’의 2절 부분이다,)

왕은 말하곤 했지
이 세상은 파멸로 가득 찼다
난 결코 밖을 보지 않아
저 세상에서 널 지키겠다 하셨네.
성벽을 높이고 문도 굳게 닫았네.
하지만 뛰는 가슴 멈출 순 없어
왕자 성벽 넘어 세상 꿈꾸었네.
자 여길 떠나 저 성벽 넘어
그 별을 찾으러 여행을 떠나야 해
험한 세상 너 사는 이유
이 모든 걸 알고 싶다면
너 혼자 여행 떠나야만해

-뮤지컬 모차르트中 황금별-

(문 밖에서 들리는 아빠의 소리)

아빠:(희규야, 할아버지 집에 안 들어오셨어?)
희규:(노래를 끄며)아빠 뭐라고요?
아빠:(할아버지 안 들어오셨냐고!)
희규:(자기에 앉으며)들어오는 소리는 못 들었어요! 나간 지 한참 되셨을 건데.
아빠: 시간 늦었는데 어딜 가신거야.
희규: 전화해봐!
아빠: (안 받으셔, 무슨 일 생기신건가. 아까 비도 내렸는데.)
희규: 비가 왔다고?
아빠: (소리 못 들었니? 꽤 많이 내렸는데.)
희규: 저 노래 틀고 잠들어서 방금 깼어요.(시간을 확인하며)이렇게 늦었어?
엄마: (엄마랑 아빠는 밖에 나가서 둘러볼게 (신발 신는 소리가 들리며) 넌 집에서 있어. 할아버지 오시면 바로 전화하고.)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S#21. INT/거실/밤

(소파에 앉아있는 희규, 벽시계의 시간이 12시를 넘어간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지만 연결되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기는 희규, 현관문 앞으로 가서 문을 열려고 한다.)
(그 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엄마)

희규:(놀라며)아오 깜짝이야.
엄마:(같이 놀라며)임마, 내가 더 놀랐다. 너 어디가?
희규: 답답해서 나도 나가보려고 했지. 아빠는 왜 전화를 안 받아?
엄마: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오며) 아빠 입원 수속 중일거야.
희규: 입원? 무슨 입원?
엄마: (쇼파에 앉으며) 할아버지 찾았는데 비를 너무 많이 맞으셨어. 온몸이 불덩이야.
희규: 비? 어디에 있어서 비를 맞아?
엄마: 저 앞 공원 벤치에서 그 비를 다 맞고 누워계셨어. 그니까 열이 안 나고 배겨?
희규: 뭐? 비 많이 왔다며. 근데 그걸 누워서 다 맞았다고?
엄마: 그래, 아빠가 병원으로 바로 모시고 갔는데 열이 너무 심해서 입원 치료해야 한데.

(엄마는 창선의 방으로 들어가서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희규는 다시 소파로 돌아가 앉는다. 고개를 숙인 채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만진다. 그러나 이내 담담해지는 얼굴과 행동.)

S#22. INT/병실/밤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창선. 열린 문 밖에서 지켜보고 있는 희규)

희규Narr. 그 날 쏟아진 비는, 할아버지에게 폐렴이라는 병을 던지고 도망갔다. 담배는 고사하고 더 이상 호통도 칠 수 없게 된 할아버지는, 사실 이날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살아 숨 쉬는 시체. 내 눈에 비친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랬다.

(병실 밖의 희규와 눈을 마주치고 그를 향해 베개를 던져버린 창선. 쏟아지는 기침을 못 견디고 앞으로 꼬꾸라진다.)

(희규는 자신의 근처에도 못 오고 떨어진 베개를 주워 창선의 다리 쪽에 올린다.)

(눈을 마주친 두 사람, 기침으로 벌게진 얼굴을 한 창선과 담담한 표정의 희규)

(희규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눈을 다시 맞춘 후 병실을 나온다.)

S#23. INT/다락방/아침

-현재 시점-

(휴지통을 옆에 놓고 잠들었던 희규, 햇빛 때문에 눈을 뜬다.

(휴대폰을 들어서 시간과 문자를 확인한다.)

(모델이 촬영을 취소했다는 연락이 와있다.)

희규: 와, 염병......

(장희에게서 전화가 온다)

Rrrrr
희규: (눈을 비비며) 여보세요 장희야,
장희: (일어났어?)
희규: 응, 깜박 잠들어서 지금까지 쭉 잤나봐.
장희:(괜찮아. 나도 전화 기다리다가 그냥 잤어, 오늘 촬영은 언제야?)
희규: 모델이 못 온데. 당일 취소 진짜 정신이 있냐. 없냐.
장희: (뭐? 아니다, 너 피곤 할 텐데 차라리 잘 됐어.)
희규: 그래, (한숨) 그렇게 생각해야지 뭐.
장희:(아, 희규야, 이따 좀 볼 수 있을까? 내가 할 말이 있는데)
희규: 음, 잠깐만(휴대폰 달력 어플에서 일정을 확인한다.)밀린 작업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공모전 날짜가 아슬아슬해서.
장희: (잠깐도 안 될까?)
희규: 저녁 잠깐은 괜찮아. 나 카페에서 작업하고 있을게. 거기로 올래?
장희:(그래, 저녁에 커피 한잔하자.)

(전화를 끊은 희규, 스트레칭 하듯 몸을 이리 저리 움직인다.)

(송희의 독사진은 주머니에 넣고, 휴지통을 챙겨 방밖으로 나간다.)

(앵글 밖으로 희규의 모습이 사라지고, 불이 꺼진다.)

S#24. INT/카페/늦은 오후

(카페에 앉아 컴퓨터로 사진 보정 작업을 하고 있다.)

(카페 스피커에서 ‘황금별’의 후반부가 흘러나오고 있다.)

사랑이란 구속하지 않는 것
사랑은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
때로는 아픔도 감수해야 해
사랑은 눈물 그것이 사랑
황금별이 떨어질 때면
세상을 향해서 여행을 떠나야 해
북두칠성 빛나는 밤에
저 높은 성벽을 넘어서
아무도 가보지 못한 그 곳으로
저 세상을 향해서 날아봐
날아올라

-뮤지컬 모차르트中 황금별-

‘띠링’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던 희규. 문자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나자 희규가 휴대폰을 들고 확인한다.)

(서울국번을 쓰고 있는 번호로부터 온 문자다.)

서울 부동산: 「박희규 고객님, 문의하신 원룸 관리자분과 계약내용 합의한 것을 전달해드립니다. 첨부해드린 파일을 확인하시고,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유선전화 혹은 홈페이지를 이용해주세요! 」

(문자의 내용을 한참 들여다본다.)

희규: 아따, 월세 빡세네.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화면을 보는 희규. 하단에 내려놨던 이력서 파일을 띄우고 빈칸을 채우기 시작한다.)

희규:(키보드를 위에 손을 올리고)내 이름에 한자가 뭐더라.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낸다. 지갑의 신분증 칸에는 송희의 사진이 들어있다.)

희규:(화면과 주민등록증을 번갈아가며 보며)쌍희 희, 부르짖을 규 (이력서에 적는다.)

(휴대폰으로 이력서 화면과 주변을 포함해 사진을 찍는 희규, 사진의 여백 공간에 Viva independence day 라고 적는다.)

S#25. INT/카페/저녁

(화면 앞에서 집중하고 있는 희규, 카페 입구에 들어온 장희가 희규의 앞자리로 걸어온다.)

장희: 희규!
희규: (놀라며)어, 왔어?
장희: (앞에 앉으며)작업은 다 했어?
희규: 끝도 없지 뭐. 밥은?
장희: 회사 사람들하고 먹었어. 너는?
희규:(노트북을 닫으며) 계속 앉아만 있으니까 생각이 없네.
장희: 뭐 사올까?
희규: 아니, 이따 밤에 작업하면서 뭐라도 집어먹을게.

(음료를 주문하러 가는 장희,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희규.)

S#26. INT/카페/저녁

희규: (음료를 마시고 내려놓으며) 그래서 할 말이 뭐야?
장희: 아, 그거?
희규: 뭔데? 나 하루 종일 궁금했어.
장희: (손바닥을 비비며) 각도에 따라 좋은 일이야.
희규: 각도에 따라는 또 뭐야? 좋은 일이면 그냥 좋은 일인거지.
장희: 들어보면 알아요.
희규: 그래, 말해봐.
장희: (머뭇거리며)나 일본 지사로 발령 났어. 1년 안에 들어올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장기로 넘어갈 수도 있고.
희규:(진심으로 기뻐하며) 오 완전 멋있어. 완전 축하해 서장희!
장희: (웃으며) 고마워, 네가 좋아해줄 줄 알았어.
희규: 근데 각도에 따라는 뭐야? (째려보는 눈)나가서 바람피우려고?
장희: 아니, 그 정반대야. (숨을 크게 쉬고) 나 너랑 같이 나가고 싶어.

(눈을 마주친 채 정적)

희규: 어디를, (눈치를 보며) 설마 일본을?
장희: 응.
희규: 아니 이 사람아, 우리 집 엄한 거 뻔히 알면서, 안 그래도 사진하느라 밉보여놨는데, 외간 남자랑 일본 간다고 하면 부모님이 가만히 계셔?
장희: (웃으면서) 외간 남자 아니면 되는 거 아니야?
희규: 뭔 소리야, 우리 집 아들하려고?
장희: 우리도 이제 적은 나이 아니고, 만난 지도 꽤 됐으니까 결혼 얘기 슬슬해도 될 것 같아서.
희규:(가라앉은 목소리, 느리게) 장희야, 나 어제 할아버지 보내드리고 왔어, 타이밍 너무 구리다고 생각 안 드니?
장희: (당황하며)나도 급하게 얘기하게 돼서 정말 미안해, 진짜 미안한데,
희규: (말을 끊으며) 미안할 행동을 왜 굳이 해서 싫은 소리를 듣냐고.
장희: 내가 너랑 그렇게 오래 떨어져있을 자신이 없어서 그래. 타이밍이 이런 건 정말 미안해, 진심이야.
희규: (화를 참으려 노력하며) 아니 너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나 못들은 걸로 할게.
장희: 희규야.
희규: (억지로 웃으며) 일본가는 거 축하해. 내가 가진 게 없고 생활에 쪼들려서 가보진 못할 것 같고 연락은 매일하자.
장희: 조금만 쉽게 생각하자, 외국 나가서 살아도 사진은 찍을 수 있어.
희규: 그냥 사진은 어디서나 찍겠지. 근데 난 아직 공부도 필요하고, 마음도 불편하고, 결정적으로 결혼비용이 없어요.
장희: 당장 떠나는 거 아니니까, 병원 계약직 구하는 곳 있으면 알아올게.
희규: 서장희 씨, 나 하기 싫은 일까지 해가면서 결혼하고 싶지 않아.
장희: (답답해하며) 어차피 언젠가 해야 하는데 굳이 떨어져있을 필요가 없잖아.
희규: 그 시점이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생각난 듯) 아 그래, 나도 할 말 있어. (심호흡) 나 서울 가. 벌써 집도 다 구했어.
장희: 뭐? 갑자기 무슨 서울이야. (마른세수) 너 혹시 같이 가기 싫어서 거짓말 하니?
희규: 거짓말 아닌데? 포트폴리오 보여드렸던 작가님이 연락 주셨어. 이력서 써서 가져오라고. 만약에 거기 입사 못해도 계속 서울 살면서 공부할 거야.
장희: (충격 받은 표정, 더듬더듬)어, 어떻게 상의도 없이, 멀리 간다는 말을, 이렇게 통보해?
희규: 나도 너처럼 갑작스럽게 기회가 왔어. (장희의 손을 잡으며) 장희야, 너도 축하하고 보내줘, 나 드디어 사진으로 돈 벌수도 있다니까?
장희: (침묵)
희규: 장희야, 응? 축하해줘.
장희: 내 생각은 안했어? 난 어떻게 하려고 했어?
희규: 난 자신이 있었어, 마음이 안 변할 것도, 일을 잘 해낼 거라는 것도.
장희: 미안해, 난 기쁘게 축하 못해줄 것 같아. 너한테 조금, 실망했어.
희규: 아, 그래? (입만 웃으며 손을 놓는다. 길게 눈을 맞추다가 말을 시작한다.) 사실, 나도 너한테 축하받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렸어. 할아버지 장례식 다음날에 결혼 얘기 꺼내는 건, 정말 내가 알던 너 답지 않아서.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하는 희규. 당황한 장희는 희규의 손목을 붙잡는다.)

장희: 너 지금 그 말 무슨 의미야?
희규: 일본가는 거 축하하고, 앞으로는 나 없이 더 멋있고 주체적으로 살 길 바래. 생각도 하고. 먼저 갈 테니까 이것 좀 놔줄래?

(희규가 일어나서 걸어간다.)
(그 뒤에 소리치는 장희)

장희: 박희규, 너 지금 이렇게 가면 후회해.

(희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S#27. EXT/카페 앞/저녁

(문을 열고 나와 걷는 희규)
(카페 안에서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장희가 창에 비춰진다.)

S#28. INT/집(희규 방)/밤
※문자 내용은 내레이션 처리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는 희규)
(고개를 들고 잠시 안정을 찾는가 싶다가 다시 엎드려 울기 시작한다.)
(좀 더 울다가 꺼져있던 휴대폰을 키는 희규)
(꺼진 사이 와있던 문자와 전화들이 알림소리를 내며 화면에 표시된다.)

띠링
띠링
띠링

(문자를 확인하는 희규)

장희:「희규야, 아까는 내가 정말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어. 타이밍도 너무 나빴고. 정말 미안해 이건 진심이야..」

「하기 싫은 일 하라는 말 안할게. 그냥 몸만 와줘도 괜찮으니까, 나랑 같이만 있어줄래?」

「나 진짜 너 없이는 못살겠어서 그래. 내가 많이 부족한 거 알아, 내가 정말 잘할게. 희규야. 제발 연락 좀 줘.」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울기 시작하는 희규)

희규:(울면서) 어떻게 끝까지 자기 생각 밖에 못할까, 착한 멍청이새끼야.

(답장을 쓰기 시작하는 희규)

희규:「장희야, 나도 너랑 헤어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아. 그런데 나는 이제 너 없이 사는 것 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게 더 무서워. 네가 살고 싶은 방법은 나랑 맞질 않아. 몸만 와줘도 좋다고 했지? 고마운 말이야, 하지만 그거야 말로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거야. 나의 전부가 네가 되는 거.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해주는 너보다 네가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나를 바라. 그동안 고마웠어. 외국 나가서도 아프지 말고 잘 지내.」

(전송을 누르려다가 문자를 지운다. 그리고 다시 쓴다. )

「그동안 고마웠어, 너도 행복하길 바라. 진심이야.」

(울다가 장희의 번호를 지우는 희규.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보고 눕는다)
(휴대폰을 들어 천장을 사진 찍는 희규.)
(천장을 찍은 사진에 EXODUS라는 글씨를 쓴다.)

(화면에 탁류, the ready made- EXODUS 라는 자막이 뜬다.)
-끝!-

 

 


 

 

희곡 부문 당선 소감


 
자존감 바탕으로 더 나은 글 쓸 것

 김은송(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충격적으로 더웠던 이번 여름 내내 저는, 더 이상 글을 써도 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졸업반들이 그렇듯 현실적인 대안을 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시놉시스를 기획할 때도, 시나리오로 옮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원광대학교에서는 제가 글을 포기하려고 할 때 마다 한번 씩 수상의 기회를 주십니다. 시를 포기하려고 했던 18살 때의 입선과 23살의 지금이 그렇습니다. 저를 당선작으로 뽑아주셔서 제가 얻은 것은 상이라는 영예보다 글을 더 써도 된다는 자존감에 가깝습니다. 부족한 글 솜씨지만, 이 자존감을 바탕으로 더 나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함께 희규를 응원해준 친구들, 탁류라는 소재를 추천해주신 구민정 교수님, 그리고 채만식을 만나게 해준 군산이라는 공간에게 감사드립니다.
 
 
 

 
 
 
시나리오 부문 심사평

 

 

소설 두 편, 하나의 시나리오로 묶은 파격

 
 모든 분야에서 융복합이 일상화된 지 오래 되었다. 장르의 융복합은 원형텍스트의 본질을 변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장르의 융복합은 동시대 문화예술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받는다. 공연과 영상예술 분야에서도 이러한 변화는 점점 강조된다.
 올해 투고 작품 중에는 이런 장르적 변형에 대한 시도가 많았다. 소설을 영상으로 각색한 「탁류, the ready made-탈출」 부터, 소설을 인형극처럼 재구성한 「괴물, 또는 현대의 시시포스」, 영상을 무대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항명」, 극의 배경을 영화 촬영장으로 설정한 「공터」, 음악적 요소를 이용하여 극적 긴장을 유도하는 「파블로와 머리핀 소녀」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장르 사이의 긴장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연극의 원형을 고수하는 작품도 적지 않았다. 「다름, 닮음, 닳음, 다음」은 부조리극 형식으로 연극적 장치를 고려한 작품으로 다른 작품들과 차별성을 보였다. 「대가리가 커서 슬픈 짐승들」은 극적 시공간을 분명하게 제한하여 단막극의 긴밀성을 갖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예심을 거쳐서 「탁류」, 「괴물」, 「항명」, 「다름」, 「대가리」 5편을 다시 검토했다.
 「다름」은 의미에 너무 치중하려다 이해를 확보하지 못하는 문제를 갖고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은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대가리」는 제시된 사건들이 의미를 너무 담지 못하고 있다. 좀 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건을 보충하면 재미있는 작품이 될 것 같다. 군사쿠데타를 소재로 하는 「항명」은 정치적 시의성뿐 아니라 수사극이라는 극 형식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러나 극진행이 너무 단조롭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각색한 「괴물」은 원작의 의미를 인형극 형식으로 담아내는 아이디어가 돋보이지만, 단조롭게 인물만 교체되면서 반복되는 사건 진행이 극적 긴장을 만들지 못한다. 채만식의 '탁류'와 '레디메이드 인생'을 시나리오로 각색한 「탁류」는 소설 두 편을 하나의 시나리오로 묶은 다소 파격적인 시도의 작품이다. 원작의 가부장제와 기성사회라는 틀을 후대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이 시나리오는 내용이나 주제가 너무 평이하다. 그러나 「탁류」가 사건의 구성 방식, 인물 구조화, 간결한 대사 등에서 가장 안정적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러한 점들을 평가하여 심사위원들은 「탁류, the ready made-탈출」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응모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며 더 즐거운 창작 여행을 하기 바란다.
 
 심사위원 : 이상복(원광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진(원광대 유럽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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