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제프 보이스의 「나는 아메리카를 좋아하고 아메리카는 나를 좋아한다」 출처 : 구글

 독서와 고전,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읽은 것

 의사소통센터에서 진행하는 <세계고전강좌>가 어느덧 100회가 되었습니다. 2018년 11월 1일에는 <세계고전강좌> 100회를 기념하는 북 콘서트가 열리기도 하였지요. 저는 이날 행사의 이야기 손님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00회를 기념하는 북 콘서트는 사실 저에게 매우 어색하고 마음 무거운 자리였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세계고전강좌>와 함께 해온 고전 100권에 대해 평소 호기심은 많았지만, 그 모든 텍스트를 다 섭렵했다고는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땐 『톰 소여의 모험』의 작가 마크 트웨인의 재치와 입담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말했지요. 고전이란 "사람들이 칭찬은 하면서도 읽지는 않은 책"이라고. 하지만 이 말은 아무리 그럴싸한 수사법으로 치장한다 해도 고전의 중요성을 훼손하진 못합니다. 고전은 사람들의 칭찬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물음과 성찰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니까요.
 어쨌든 저는 짧은 시간이긴 하였지만, 100회 기념 북 콘서트를 준비하는 동안 제 나름의 고전에 대한 기준을 설정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물음의 답을 얻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처럼 서삼독(書三讀)을 통해 고전 속에 담긴 텍스트를 읽고, 그 필자를 읽고 최종적으로는 글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을 읽으려 노력하였지만 역시 고전은 그 존재의 개방성을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언젠가 접했던 독일의 철학자이자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년~1940년)의 독서란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읽는다는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물론 이 글귀는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 1874년~1929년)이 이야기한 명제의 대구입니다. 그가 말했듯이 "쓰여지지 않았던 것을 읽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미 쓰여져 있었던 것을 읽는 것"과 매한가지니까요.
 저는 발터 벤야민의 힘의 빌어 나름대로 독서와 고전에 대해 정의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고전이란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읽는 행위라고요. 달리 말해 저에게 독서는 언제나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읽는 행위입니다. 물론 이 말은 언어 속의 기호학적인 것과 모방적인 것 사이의 심연에서 나타나는 유사성의 현상을 일컫는 말이겠지요. 발터 벤야민 또한 독서의 현상학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듯이 독서행위는 일종의 알레고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벤야민 또한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한 번도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읽기라는 독서 모델을 현대적으로 변주하여 설명한 셈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해 고전 그리고 독서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쓰여지지 않는 것을 읽음으로써 나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재창조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술은 하나의 입인 동시에 여러 개의 입이다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세계고전강좌> 100회 기념 북 콘서트의 이야기 손님이었습니다. 제가 이날에서 맡은 역할은 "예술, 인간을 묻다"였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제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일이었지만, 그야말로 막막 그 자체였습니다. 주제도 주제지만, 1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7분 동안 예술에 대해, 인간에 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지요. 물론 학문으로 체계화된 문예사조나 다양한 예술이론, 그리고 미학적 학문의 토대에 기대어 예술이나 예술작품에 관해 이야기하면 보다 수월한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막연하고 추상적이긴 하지만 인간에게 예술의 의미와 가치가 그런 식으로 전달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날 <세계고전강좌> 100회 기념 북 콘서트에 초대된 공연팀과 강연자들의 입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심코 바라보았던 그 입이 점점 제 사유의 실마리를 미궁으로 빠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세계고전강좌> 100회 북 콘서트에 초대된 재즈밴드 '하루차이'의 노래가 강연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저는 리드미컬한 재즈가 강연장에 울려 퍼지는 동안 보컬의 입에 주목하였습니다. 보컬의 입은 끊임없이 재즈의 노랫말을 내뱉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가 끝나자 우리 대학 철학과의 김정현 교수님(중앙도서관장)의 기조 강연이 곧바로 이어졌습니다. 철학자답게 고전에 대한 학문적 깊이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조언이 알맞게 곁들어졌습니다. 저는 이때에도 강연자의 입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강연자의 입은 고전의 중요성과 고전과 인간 삶의 유기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고전의 현재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저는 그 입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무대에서는 마술사 서정현 씨의 마술공연이 있었습니다. 서정현 씨는 간단한 마술과 함께 재치 있는 입담으로 청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때에도 역시 저는 마술사의 입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물론 곧이어 진행된 이야기 손님의 단체 토크 시간에도 저는 사회자의 입과 저를 포함한 이야기 손님의 입에 주목하였습니다.
 북 콘서트가 끝나갈 때 쯤 제가 많은 사람의 입에 주목한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입은 하나로 구성되어 있지만, 상황에 따라 그 역할은 다양해진다는 것 때문이었지요. 물론 저는 이날 행사에서 입에 대해 그리고 입의 역할에 관해 말하고 싶었지만 저는 끝내 입을 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말하지 않았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변명 삼아 말씀드리자면 시간은 촉박했고, 그 부족한 시간을 쪼개가면서까지 얼토당토하지 않게 입에 대해 진지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는 입에 대한 제 생각을 끝내 말하지 못한 채 행사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행사장을 정리한 후 저는 재즈밴드 하루차이 멤버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였습니다. 늦은 저녁이어서 그런지 밥과 반찬은 아주 맛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불현듯 <세계고전강좌> 100회 기념 북 콘서트에서 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에게 예술이란 노래를 부르고 말을 하고 음식을 먹는 총체적 활동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단 사실을 너무 뒤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술은 인간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매순간 그리고 어디에서나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하나의 입으로 말하고 부르고 먹고 만드는 행위 속에서 인간의 삶과 예술은 동시다발적인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이야기하지 못한 게 조금 후회되었습니다. 저는 하루차이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 되물었습니다. 인간에게 과연 '예술이란 무엇인가?' 행여 이다음에 누군가가 저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예술은 하나의 입인 동시에 여러 개의 입이다."

 결국, 예술과 삶은 하나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인간의 삶과 예술은 하나여야 합니다. 삶과 예술은 언제나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보완해 가야 하는 생활 속의 실천이자 운동이어야 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여러분께 이 한 권을 책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고전은 아닙니다. 책의 표지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예술체험과 예술창조의 새로운 가능 조건에 대한 미학적 탐구서일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이 책에 주목한 이유는 플럭서스(Fluxus) 예술이 주는 매력 때문입니다. '플럭서스'는 라틴어로 변화와 변동을 의미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인간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힘과 강도', '항상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그리고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힘'을 지시하기도 합니다.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 1931~1978)에 의해 「플럭서스 선언문」이 작성된 이후 존 케이지와 요제프 보이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백남준이 이 예술 경향을 추구하게 됩니다.
 제가 이 책을 굳이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 싶은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플럭서스 예술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예술정신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해체하길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또한, 예술적인 것에 대한 제도와 전통적 통념을 넘어서서, 예술과 삶 그리고 존재와 생명의 통일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저 또한 이 책에서 동조하는 싶은 부분은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예술은 결국 물질과 정신의 분리를 가져오게 한다는 부분입니다. 예술과 삶의 소외과정 반복은 결과적으로 근대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예술가와 예술작품을 상호 분리하게 만듭니다. 아울러 독자를 예술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지점에서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지금까지의 전통적이고 정태적이며 경직된 재현적 예술체제를 해체하길 원합니다. 그들은 예술과 삶을 다시 통합시키는 방법이 무엇인지 늘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플럭서스를 넘어, 예술의 자기 고독력으로
 이 책에서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가는 비구성주의 작곡가 존 케이지와 독일 현대 미술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 그리고 예술적 시공간의 확장을 이뤄낸 백남준 등입니다. 먼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는 근대 구성주의 음악과 작품을 넘어 잡음, 소음, 침묵, 자연의 소리 등에서 지금껏 배제된 삶과 생명의 소리를 예술화하였습니다. 그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통조림통 등 어쿠스틱한 오브제들의 음악적 사용도 너그러이 허용하였습니다. 덧붙여 우연성의 원리에 기대어 새로운 소리를 어떻게 다룰 것이며, 소리를 어떻게 연결 지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 유명한 「4분 33초」로 표현되기도 하였지요. 다음으로 요제프 보이스는(Joseph Beuys, 1921~1986)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도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되길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술작품은 미술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회'에 존재한다고 보았지요. 그는 도발적인 오브제를 통해 예술 매체의 통합행위가 결국 하나의 소통행위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술의 오브제의 전개 방식과 퍼포먼스 구성을 통해 예술의 관람자까지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치유의 장이 되길 희망하였습니다. 만약 조금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요제프 보이스의 작품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와 「나는 아메리카를 좋아하고 아메리카는 나를 좋아한다」를 찾아보며 그 의미를 다시금 곱씹는 것도 권해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백남준의 예술실천은 예술을 탈목적론적 방법으로 보면서 미의 문제를 관계성 속으로 가져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장르들, 비디오나 TV 같은 매체들, 전기나 전자와 같은 기술들이 서로 접목하면서 그는 인터미디어와 관계예술 그리고 총체 예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백남준은 이를 통해 예술 장르의 존재론적 형태를 변화시키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 과정은 백남준이 결과적으로 미지의 것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미지의 만남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한 예술가임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세 예술가가 플럭서스의 방향성을 모두 대변해 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당시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지닌 한계는 분명합니다. 가장 큰 비판은 이들은 예술가 제도의 경계를 깨뜨리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들 역시 전문적 예술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예술가를 비판하고 예술 제도를 비판하며 예술을 혁신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결국 예술의 경계에 대한 사유를 끊임없이 예술 내부로 귀환시킨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예술의 경계에 대한 비판 자체가 예술가의 정체성 속에서 이뤄지다 보니 모든 사람의 공감을 얻기 힘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이밖에도 많은 비판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삶과 예술은 늘 통합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플럭서스의 예술혁명에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은 것은 '자기 고독력'입니다. 한국어에는 '홀앗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나이 들어 홀로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의미만 놓고 보면 그리 유쾌한 단어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홀로 산다는 것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다시금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자는 한자로 치면 '孤'에 가까울 것입니다. 말 그대로 외로운 삶입니다. 후자는 '獨'에 가깝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독'은 홀로인 삶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독거(獨居)'는 외로운 삶이 아니라 홀로인 삶이 됩니다. '독행(獨行)'은 외로운 실천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실천하는 노력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예술의 독서(讀書)는 독서(獨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혼자서 자신만의 자기 고독력을 가질 때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숙제로 남겨놓았던 인간의 삶과 예술은 진정으로 하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정배 교수(융합교양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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