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충 정리해서 내놓던 재활용품에 비상이 걸렸다. 업체에서 갑자기 재활용품 수거를 거부한 것이다. 여태까지 우리가 쓰던 그 많은 플라스틱과 일회용품, 비닐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크게 고민해본 적이 없던 터라 그 일은 아파트마다 '재활용품 대란'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일회용품을 줄여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고 보니 가정마다 쌓이는 재활용품(거의 쓰레기에 가까운 것들도 있었다)은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던가. 그것은 뜻밖에도 여태 쓰레기에 가까운 고물을 사가던 중국의 업체들이 재활용품 수거를 더 이상 수입하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여태 수입하던 그 많은 플라스틱 등의 재활용품들을 그들은 왜 더 이상 수입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2016년에 상영된 한 편의 영화 때문이었다. 왕구량 감독은 <플라스틱 차이나>를 통해서 어쩌면 중국의 현실 한켠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쓰레기 더미에 눌린 중국의 모습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했고, 곧 재활용품 수입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게 된 셈이다. 한편의 영화는 중국을 넘어 한국까지 도달하여 여태까지 무의식적으로 내다버리던 쓰레기 혹은 재활용품에 대하여 우리는 철학적인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우리에게 쓰레기란 무엇인가. 그리고 미국의 환경운동가 존 라이언과 앨런 테인 더닝이 1997년 펴낸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까지 떠올리며, 우리가 그동안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 한 편의 영화는 중국인들을 쓰레기 더미에서 끌어내는 일을 시작한 셈이고 그것이 영화가 가진 힘이다.

 

 한때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던 영화 <도가니>나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한공주>의 고발은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 감독이 제작한 <로제타>나 일체의 예술문화활동이 금지된 시기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012년에 하이파 알-만수르 여성 감독이 제작한 <와즈다>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영화 <와즈다>가 상영된 이후 여자들에게 자전거 타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1999년에 제작된 다르덴 형제 감독의 벨기에 영화 <로제타>는 청년실업문제를 제기하여 정부로부터 그와 관련한 법안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렇게 영화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개인 혹은 나아가 사회에 적극 개입하여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영화가 현실에 눈을 감으면 그 사회는 성장을 멈추고 죽은 시인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때로 영화가 불의에 대한 고발도 불사함으로써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변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말릭 벤젤룰 감독의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가맨>은 남아공에서 전설이 된 가수 로드리게즈의 신화를 다루고 있다. 미국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남아공 국민들에게 저항과 민주의식을 일깨워준 슈가맨, 로드리게즈는 이 다큐가 아니었다면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말릭 벤젤룰에 의해서 그는 불새처럼 날아올랐고, 남아공을 넘어 전 세계인들에게 삶의 진실과 저항의 가치에 대해서 노래하는 가수가 되었다. 이 한 편의 영화는 예술의 힘을 우리들에게 일깨움과 동시에 기록의 가치와 소중함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이제 영화는 국경도 편견도 없이 어디든 날아가 자신의 영토를 세우는 가장 강력한 문화예술이 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사회를 바꿀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을 바꾸기도 한다.

 "시란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우편배달부인 마리오 루폴로는 칠레의 민중시인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칠레의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책,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원작으로 한 영화 <일 포스티노>는 작은 섬, 칼라 디 소토에서 단순하고 지루한 삶을 살던 마리오가 시의 세계에 눈을 뜨면서부터 어떻게 세상과 마주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마리오 루폴로(마시모 트로이시)는 평범하고 심심한 우편배달부이다. 그러나 우연히 자신이 살고 있는 섬으로 유배를 온 파불로 네루다(필립 느와레)를 만나서 메타포를 이해하게 되고 은유의 세계를 건너 시인이 된다. 시는 낯선 세상을 데리고 왔고 그는 비로소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와 소통하고 참여하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 더불어 사는 세상을 향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마리오는 파블로 네루다가 떠난 뒤, 섬에 남아서 노동자들을 위한 시를 쓴 뒤 낭송하려다가 군중들에 파묻혀 그만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시를 쓰는 자의 의무로써 사회에 일조하려 했고, 그 뜻이 바래지 않았다고 믿는다. 파블로 네루다를 만나서 시를 알게 되었고, 그는 그 시를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데 썼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는 앎으로써 얻는 지혜와 기쁨을 바탕으로 사회에 기여할 방법을 찾았고, 그렇게 이 영화는 스스로가 주인된 삶을 살았던 한 남자의 기록이 되었다. 연세 지긋한 관객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난 후, 그분들의 표정에 드러난 작은 미소, 그것이 바로 마리오가 깨달은 표정이기도 할 것이다.
 시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가는 문화자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그의 저서 <구별짓기>에서 논했던 것처럼 '문화자본'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타인과 자신을 구별짓는 가장 강력한 자본이 될 것이다. 특히 영화에 관한 취향은 때로 상대방의 문화적 위치를 알아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나아가 영화는 한 인간이나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직, 간접적으로 감독이나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자신이 가진 권한 내에서 개인과 사회를 바꾸기 위해 끊임없는 말 걸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삶이 바뀌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영화로 인해 인생의 길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이탈리아의 타비아니 형제 감독이 교도소를 배경으로 하여 만든 <시저는 죽어야 한다>에 출연했던 죄수들의 사례를 봐도 그러하다. 이 영화를 계기로 중범죄를 저질렀던 그들은 배우나 감독, 작가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우리는 많은 자본을 가지고 있고, 사회는 우리에게 더 다양한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 걸리고, 긴 시간의 노력이 필요한 것은 문화자본일 것이다. 이것은 처해진 현실이나 나이 듦에 따라서 낡거나 빛이 바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될수록 더욱 삶을 공공히 해주는 재산과도 같다. 젊은 날에는 학력자본이나 인적자본 경제자본 등에 의해서 삶이 좌우된다고 믿었지만, 어느 순간 인생의 균형을 잡아주고 삶의 철학을 세워주는 것은 이러한 예술문화의 힘이었다. 문화자본의 형성은 태생적인 환경에도 기인하겠지만 20대가 가장 적기라고 믿고 있다. 스스로 취하고 버릴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고, 삶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순수한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20대라면 꼭 시작해야 할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문화자본을 획득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연세 지긋한 관객들을 대상으로 영화 강의를 하다보면 혼자 오신 분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띈다. 자기만의 세계, 또 낡아가는 삶을 보다 풍요롭고 가치 있게 보내고 싶은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분들에게 "다시 20대가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라고 여쭤보면 대부분 "좀 더 젊었다면 예술문화를 많이 접할 것"이라고 하신다. 학창 시절에는 미술이나 음악, 영화 등이 한 켠으로 밀려나지만, 살다보면 그것들이 영어나 수학 공부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특히나 작품성이 뛰어난 예술영화들을 너무 늦게 접해서 아쉽다는 분들도 의외로 많다. 어느 날인가 눈도 마음도 침침해지니 삶의 가장 빛나는 시기인 20대에 많이 해야하는 것이 책 읽기나 예술을 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더욱 간절히 든다. 그것은 낡아도 색이 바래지 않는 삶의 유산 같은 것이다.
 광고인 박웅현 씨의 [여덟단어]를 읽다가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다. 맹자가 말하기를 '만물개비어아 반신이성 낙막대언 萬物皆備於我 反身而誠 樂莫大焉' 이라고, 만물의 이치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나를 돌아보고 지금 하는 일에 성의를 다한다면 그 즐거움이 더 없이 클 것이라는 말이다. 만물이 모두 준비되어 있음을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세상은 늘 우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어떤 것을 해도 지치지 않았고, 아무리 많은 양이라도 넉넉히 품을 수 있었으며,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 시간에 한 줄의 글을 더 읽었더라면, 한 편의 영화를 더 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도록 아낌없이 삶을 누리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 청년의 삶에 꽃이 되어줄 매개체로 영화를 감히 추천해본다. 어쩌면 꽃보다 아름다운 것, 사람다움과 세상을 이해하는 힘 그것이 영화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주인된 삶을 살기는 쉽지 않지만 우리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대사처럼 "나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파블로 네루다는 '사람은 의지만 있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고 했다. 그렇게 한 편의 시가 되거나 의지를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한 편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영화가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다.

최하진(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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