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대론 논쟁으로 일대의 위기 맞아
모든 차별 넘어서 ‘무상’의 경지 이뤄
상인 입적한 묘안사 『법화경』 등 유품 전해져

 니치엔상인(日延上人)이 볼모로 잡혀 고국 조선땅을 떠나 일본에서 삶을 시작한지 38년째 되던 1630년, 법화종단이 일본의 통치권자인 에도막부의 공양(供養) 즉 시혜(施惠)를 받을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 연루되어, 일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이른바 신지대론(身池對論)이라는 신앙논쟁이다. 동서와 고금을 불문하고 어느 국가에서나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성(聖)의 영역인 종교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이 있게 마련인데, 정치권이 종교계의 독자성을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우선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법화종은 니치렌성인(一蓮聖人) 당대부터 절대신앙을 강조하므로써 배타성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법화경』만이 석가의 진실한 가르침이며 중생이 구제받기 위해서는 이에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는 뜻에서 불교계의 다른 종파까지도 불신(不信) 또는 미신(未信)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불신자, 미신자로부터는 비록 국주(國主)라 하더라도 시주공양을 받지도 베풀지도 말라는 불수불시(不受不施)를 전통으로 삼아왔다.  

군주의 공양에 불응하고, 유배를 택하여
 그런데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권력을 행사하던 시절인 1595년에 교토의 동산 방광사에 대불(大佛)을 건립하고 1천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베풀었을 때 법화종에도 참석하도록 명한다. 이에 종단은 신앙전통을 고수하며 불참하는 불수불시파(교토妙覺寺 日奧등)와 신앙전통에 국주를 제외해야 한다며 참여한 수불시파(受不施派, 교토本滿寺 日重 등)로 양분을 가져온다. 원칙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이다. 이들의 내분항쟁은 도쿠가와(德川家康)가 권력을 장악한 1599년에 재연되자, 막부가 양측대표를 불러 대론(對論)시킨 다음, 불수불시파의 대표(日奧)를 국가권위에 대항한 대역죄인으로 규정하여 쓰시마로 유배시킨다.
 이후, 막부는 법화종단과의 불화를 꺼려 1623년 사면하고, 종단에 불수부시를 인정하는 공허장(公許狀)을 전달하여 신앙전통을 살려주었는데, 니치엔상인 당시인 1630년 새로운 문제로 재연을 가져온 것이다. 1626년, 장군(德川家忠) 부인(江子)의 장례식이 정토종 사찰(增上寺)에서 행해질 때, 막부에서는 모든 종단에 참여를 독려했고, 법화종에서는 미노베(身延, 山梨縣 南巨摩郡 身延山久遠寺)의 닛신(日深)과 이케가미(池上, 東京都  大田區 長榮山本門寺)의 닛쥬(日樹)가 대표로 참석하게 된다. 닛쥬가 공양을 받지 않고 돌아간 것을 계기로, 닛신이 종단전통을 훼손했다는 풍문이 돌면서 불수불시문제를 통해 양측이 대립항쟁하는 확집관계가 되었다.
 논쟁이 가열되고 드디어 미노베가 막부에 요청하여 공개적인 판결을 받게 된다. 1630년 2월 21일, 막부에서 관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수불시파와 수불시파의 대표자 6명씩이 나와 대론을 전개하였고, 불수불시파의 명백한 승리로 종결되는 듯하였다. 불수불시의 이케가미측은 그러한 재판결과를 청하였으나, 막부는 법리론(法理論)이 아니라 전대 막부가 불수불시를 금했던 바를 상기시키는 정치론으로 미노베측의 손을 들어준다. 그리고 이케가미측에 대해서 가혹한 처벌을 내린다.    
 불수불시를 주장했던 이케가미측의 대표인 닛쥬를 비롯하여 6명이 모두 추방령을 받고 전국의 외딴 곳으로 유배됐다. 불수불시파의 근본사원이 모두 몰수되어 수불시파에게 돌아갔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들이 같은 주장을 폈던 과거 유배자 니치오쿠에게도 사후의 형벌이 부가되고, 그 제자들까지도 절을 몰수하고 추방시킨다. 그런데 대표자 6명 중에는 니치엔상인이 주석하던 탄생사의 16세 법주 니치레이(日領, 1572-1663)가 들어있어 유배를 당한다.
상인은 대론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노베측은 정교(政敎)유착을 경계하여 불수불시를 주장했던 이케가미측의 근본도량 탄생사를 접수하고, 막부에 상인을 유배시키도록 작용한다. 물론 막부에서는 이를 문제삼지 않았으나, 교화의 장을 강탈당한 상인은 결국 유배를 자청한다. 그리고 이세(伊勢)를 거쳐 후쿠오카에 이른다. 오랜만에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출가지에 돌아온 것이다.

꾀꼬리만다라에 새긴 고국혼
 유배 당시인 1631년, 상인은 이미 43세의 불혹을 넘긴 원숙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유배라는 형식의 귀향이었지만 법화종의 근본정신에 충일했던 그를 죄인으로 대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법화종의 근본사찰인 탄생사 법주(法主)인 그는 많은 수행자들이 흠모하는 복전(福田)이었다.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대표적인 선지식(善知識)을 모시게 된 다행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주민들의 열열한 환영과 귀의를 한 몸에 받게 된다. 1632년에는 그에게 귀의한 번주(藩主) 구로다(黑田忠之)가 넓은 폐사지에 향정사를 창건하여 바친다. 그로부터 72세인 1660년까지 30년에 가까운 기간이 그에게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이미 명예와 권위, 논리와 대립 등 모든 차별의 세계를 넘어서서 마음속에 거리낌이 없는 이른바 무상(無相)의 경지를 맛보는 그였다.
 지금 향정사 정원에는 「상인다리(上人橋)」는 표석이 서있다. 도로확장으로 다리가 묻히게 되자 옮겨온 것인데, 상인이 어느날 번주와 바둑을 두기 위해 성(城)으로 향했었는데 비가 많이 와서 개울을 건너지 못하자, 번주가 장정들을 동원하여 다리를 놓게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한 여유로움 속에서도 골수에 새겨진 것이 고국산천이라, 만년의 그는 고국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암자 묘안사를 짓고, 생의 마감을 준비한다. 그의 교화력은 조선의 유민(流民)들이 동네를 이루어 회한을 함께 하는 바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상인이 입적한 사원 묘안사에는 유려한 『법화경』 사경작품을 비롯하여 숨결을 느끼게 하는 여러가지 유품이 전한다. 자신이 제작하여 받들어온 본존은 「꾀꼬리만다라」라 불린다. 「월조(越鳥)도 남쪽가지 골라 앉아 운다」고 하였던가, 만다라에 그려진 나뭇가지에 앉은 꾀꼬리 한 마리는 상인에게 고향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이 아니었을까?
 상인의 누이 소식은 알 수 없으나, 목조의 존안상(尊顔像)을 누이가 출가한 집안의 도가와(戶川俊勝, 1646~1712)가 조각한 것을 보면, 부덕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 차례 화재로 얼굴만 남은 상인의 존안상은 필자의 발원에 의해, 조선왕조의 개기지(開基地)인 전주 모악산금산사(平常주지)의 후원을 받아 2002년 11월 합장입상(合掌立像)으로 다시 태어났다.
 일본의 혼(얼굴)에 한국의 몸(신상)을 합체한 형태이다. 존안을 모시고 방한했던 묘안사 주지(門田正英) 일행은 종묘-선조왕릉-임해군묘-전주경기전을 거쳐 금산사에서 개안법요를 수(修)하고, 합체된 상을 일본으로 다시 안치하였다. 입상은 어두운 시대를 살다간 왕손의 고향을 향한 눈길이 오늘 평화세계를 향한 염원으로 거듭 태어난 형상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400년이 되도록 상인의 부도(묘)를 광택이 나도록 쓰다듬어 온 묘안사의 정경은 새로운 시대의 한일관계를 말해주는 살아있는 메시지로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 바가 있다.  <끝>

양 은 용 (한국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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