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산그림 픽쳐 북일러스트

 

 기억이 역사의 주인이다

 2017년 12월 한국의 대통령이 처음으로 중국 중경(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다. 그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복원과 중국 내 사적지 보존에 대한 중국측의 태도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일정한 압력(?)을 행사하려고 간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수행하면서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항전했던 곳을 기억하기 위해서 찾았을 것이다. 늦었지만 벅찬 일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주의에 주권을 넘겼던 이른바 경술국치는 융희황제 즉 순종이 일본 명치에게 주권을 넘긴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순종이 주권을 넘긴 그 시간에도 새로운 주권국가를 만들기 위해 싸웠다. 중국 대륙에서, 미주에서, 유럽에서 전 세계에서 주권을 되찾기 위해 싸웠으며, 마침내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그해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이 3·1절을 기념하는 것은 바로 3·1독립선언의 적장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12월에 3·1절(독립선언일)을 기념하였으며, 오늘날에도 국가가 기념하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들 누구나 3월 1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 그 가운데 젊은이들에게 '대한민국 국치일'은 언제인가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답을 주저하거나 포기하고 만다. 이웃나라 중국에 가서 중국인들에게 '중국의 국치일'이 언제인가라고 물으면 학생들까지도 '9월 18일'이라고 빠르게 대답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은 1931년 9월 18일 이른바 '만주사변'이 일어난 날을 국치일로 기억하고 기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만주사변'의 원인을 제공했던 '柳條湖' 철로 옆에 '9.18역사박물관'을 세워 1931년 9월 18일을 해마다 소환해서 기념하고 있다. 그것도 국가의 주도로 말이다. 한국은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대한제국의 주권이 완전히 넘어간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날을 기억하고 기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이 날이 국치일임을 잘 알지 못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경복궁을 찾는다. 그 가운데는 중국인을 비롯한 상당수의 외국인들도 있다. 그들은 광화문을 지나 근정전으로 바로 가기도 하고 좌측에 자리잡은 국립 고궁박물관을 관람하기도 한다. 고궁 박물관에는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의 어진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부터 영조의 어진을 둘러보고 나왔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면서 과연 태조가 500년 뒤에 이민족 일본에게 조선이 지배를 받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았을까 라고 생각했다. 1910년 8월 29일 경복궁 근정전 앞에 일장기가 펄럭일 것이라고 역대 조선의 임금들은 생각했을까.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냉혹했다. 그로부터 벌써 108년이 지났는데 마치 천 년 전 이야기처럼 아주 먼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느낌이 든다. 저마다 현실의 삶의 무게를 견디느라 돌아볼 여유를 찾지 못하거나 또는 아예 망각해 버리고 싶은 과거의 역사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자문해 본다.
 과거에서 기억을 소환하는 것은 그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이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새롭게 전망하려는 뜻이다. 이런 기억의 소환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국경일이다. 여러 국경일 가운데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와 관련이 깊은 것이 3·1절이다.

 독립을 선언하다

 대한민국은 1년 뒤에는 '대한민국' 국호를 탄생시킨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3·1운동은 전 세계에 비폭력의 평화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불굴의 민족정신을 보여준 민족독립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 대하여 정의와 인도, 인류평등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주창하였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다. 그래서 시간을 소환해서 기념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우리에게 3·1운동은 단순히 망각해야 할 사실이 아닌 대한민국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는 기념일인 것이다. 그것도 국경일이다. 나아가 현행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여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대한민국의 역사적 관계를 분명히 했다.
 한국의 유명한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희승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탑골공원의 3·1운동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서울의 거리는 열광적인 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는 군중들로 가득 찼다. 어느 틈에 만들었는지 종이로 만든 태극기의 물결, 대열 앞에는 학생들이 선두에 섰으며, 서울 시민들과 지방에서 올라 온 시골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시위 군중들의 맹렬한 기세에 일본 관헌들도 멍청하게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지금의 광화문 세종로 거리인 육조 거리가 콩나물시루같이 인파로 빽빽하였다. 그 속을 인력거를 타고 지나던 일인 경기도 지사에게 모자를 벗어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니까 혼비백산한 이자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만세를 불렀다.

▲ 전북 익산시 창인동 2가에 있는 3·1운동 기념비

 3·1운동은 민족의 거대한 함성이자 대한민국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상해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국가건설에 전념했다. 그 열기는 고스란히 3.1운동에서 나온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정부는 3·1정신의 계승으로 삼균주의와 자유, 평등, 진보를 새로운 이념적 가치로 하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지향했다. 정의와 인도를 핵심 가치로 하는 진보는 전후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반제·반침략 사상이었다.
 

 익산의 3·1운동을 소환하다
 3월 1일 전주, 옥구로 전달되었던 독립선언서가 익산에 도착하였으며, 이중렬은 가장 중심적으로 만세운동을 기획하였다. 이중렬은 익산군 북일면 현영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익산시 신용동이다. 이 지역 천도교 책임자를 맡고 있었던 이중렬은 각 면의 천도교 만세운동 조직책을 구성해 놓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황등, 함열, 여산, 용안, 황화, 팔봉 등 8권역을 정해놓고 3·1운동을 계획하였다.
 이중렬은 자신이 담당한 지역뿐 아니라 이형우, 서상윤과 송일성, 민영순에게도 독립선언서를 주어서 이리 일대와 논산, 강경 등 충청도 지방까지도 배포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3월 12일 이중열은 함열장 한복판에서 수백명의 장사꾼들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높이 치켜들고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여 그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게 하였다고 한다. 익산시에서는 여산지역에서 3·1운동은 기운이 가장 먼저 퍼졌다. 1919년 3월 10일에 전개된 여산 3·1운동의 주동자는 이정·박사국·이병석 등이다. 이들은 여산면 원수리의 정영모 집에서 여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 독립운동에 분발할 것을 강조한 다음 '조선자주독립(朝鮮自主獨立)'이라고 크게 쓴 기를 만들어 들고, 여산면 헌병분견소의 남쪽 400m 지점으로 진출하여 약 200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6월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그 이전 3월 3일 읍내 노상에서 고총권이 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를 부르다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이어 박영진·정대원 등도 체포되었다. 3월 30일에도 만세시위가 있었다.
 금마에서는 3월 18일과 28일 금마장날을 기하여 두 차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3월 30일에도 만세시위가 있었다. 3월 18일에는 왕궁면에 사는 김광덕(金光德)·송종석(宋宗錫) 등이 친지와 면민을 설득하여 참여하게 한 후 오후 1시 경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시장 한복판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때 주위의 군중 수백 명이 호응하였다. 28일 오후 3시경에는 춘포면에 사는 소진석(蘇鎭碩)이 주동하여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대오를 이루어 거리로 나왔으나, 대기 중이던 일제 경찰에 의해 소진석은 체포되었다.
 무엇보다도 익산을 전국구로 알린 3·1운동은 익산(솜리장터) 3·1운동이었다. 1919년 4월 4일 장날을 기하여 이리장터(일명 솜리장터)에서 전개되었다. 남전교회 최대진 목사와 예수교인인 문용기(文鏞祺), 김치옥(金致玉), 박성엽, 박도현(朴道玄)·장경춘(張京春) 등은 4월 4일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협의하였다. 4월 4일 12시 30분, 이리장터에 예수교인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이자 문용기는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문을 학생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때 서울에서 유학하던 중 귀향한 중동학교 학생 김종현(金宗鉉)·김철환(金鐵煥)·이시웅(李時雄)·박영문(朴泳文) 등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군중들과 함께 시가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시위 군중들이 점차 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일경은 소방대원과 대교농장(大橋農場) 직원들을 동원하여 시위 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고 곤봉과 갈고리로 폭행을 가하였다. 시위현장에서 문용기·박영문·장경춘·박도현·서공유(徐公有)·이충규(李忠圭) 등 6명이 순국하였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39명이 체포되었다. 문용기의 피묻은 옷은 가족들이 보관해 오다가 독립기념관이 개관하자 기증하였다.
 이 가운데 문용기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문용기는 1878년 5월 익산군 서일면 관음리(현재 오산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집안일과 함께 한문을 수학하여 인근마을 서당에서 훈장까지 하였다. 24세 되던 해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1908년 목포의 왓킨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미국 남장로교회 목포 선교부에서 개설한 중학교로서 나중에 영흥학교로 개명하였다. 문용기가 독립운동에 눈을 뜬 것은 이승만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 후 YMCA총무로 전국 강연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승만이 목포에 왔을 때 문용기와 합동연설을 하였으며, 이것이 익산의 4·4 독립만세운동에서 문용기가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11년 학교를 졸업한 문용기는 학교의 추천으로 함경도 갑산에 있는 미국인 금광에 통역사로 취직하였다. 8년간 모은 돈은 독립운동을 위해서 썼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익산으로 내려와서 4월 4일 솜리장터 3·1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문용기는 보다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군산 영명학교 후배이자 전북지방 만세운동의 연락책이었던 김병수(세브란스의전 학생)와 만나 이리에서의 거사 계획에 대해 숙의하고, 그에게 거사 당일 직접 행동대원으로 나서서 대열을 선도할 청년 포섭의 임무도 부탁하였다. 4월 4일 문용기는 빨간 글씨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플랜카드를 오른손에 쥐고 군중 들 앞에서 독립선언의 의미와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3·1운동 100년, 익산 독립운동은 소환되고 있는가
 2018년 11월 어느 날 이러한 상상을 해보았다. "익산역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 익산을 방문한 날이다. 그가 왜 익산에 왔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의아해 하지만 역사는 결코 우연은 없는 것 같다. 1949년 4월 백범 김구가 연설했던 익산 이리여자고등학교를 찾아왔을까. 아니면 백범의 옛 친구이자 동지인 김홍량이 꾸렸던 여관의 장소를 찾았을까." 기분 좋은 상상이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하다.
 1949년 4월 백범은 1895년 의병으로 거듭 태어날 때 동지 김형진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그것도 고향을 떠나 만주와 평안북도에서 활동했다. 김형진은 이미 세상에 없지만 그의 혈육을 찾아 익산을 방문한 김구는 이리여자고등학교에서 구름처럼 모인 4천여명의 군장 앞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러한 감동의 역사를 익산에서는 해마다 남부 시장에서 4월 4일 개최한다. 하지만 전 익산인들이 그날을 온전하게 기억하기 위해서는 문용기 열사뿐만 아니라 3·1운동 이전과 이후에도 활동했던 익산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의병장 이규홍이나 이리농림학교 학생들을 기억하지 않는 삼일절 기념행사는 반쪽자리일 수밖에 없다. 정의와 공의가 살아숨쉬는 익산, 그것이 독립운동가들이 '나를 버리고' 조국을 찾기 위한 열정의 응답일 것이다.

  김주용 교수(HK+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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