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신문방송사는 지난해 12월 16일부터 20일까지 총 3박 5일(이동거리 1박)간 베트남 다낭, 후에, 그리고 호이안으로 연수를 다녀왔다. 2018 신문방송사 해외연수기는 총 3회에 걸쳐 게재된다. /편집자

후에 황성을 방문한  신문방송사 연수단
후에 황성을 방문한 신문방송사 연수단

 쌀국수, 월남쌈 등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먹거리와 더불어, 지난 2017년 방영한 예능프로그램 <신서유기 4>의 촬영지로 선정됐던 베트남.
 지난해 12월 16일, 신문방송사 연수단은 온라인상에서만 봤던 익숙하지만 낯선 베트남으로 떠나,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직접 보고 들으며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새벽 공기를 맞으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그동안의 해외 연수와는 달리, 이번 베트남 연수는 오후 늦게 출국했기 때문에 비교적 여유롭게 출발했다. 때마침 즐거운 연수가 되기를 응원해주듯 눈이 내렸고, 우리는 응원의 선물을 받으며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모든 탑승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한 연수단은 약 5시간의 비행시간을 보냈다.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긴 시간은 도착지에 다다를수록 다시 우리를 두근거리게 만들었고, 마침내 새로운 땅에 발을 내디뎠다.
 다낭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베트남 특유의 더운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공항은 다양한 연령대와 인종으로 이뤄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나라와 다른 기온 차이를 느끼고 나서야 비로소 해외에 온 것이 와닿았다.
 숙소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바라본 베트남의 첫 풍경은 오토바이를 타는 현지인들의 모습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오토바이에 올라타 있었고, 그 숫자는 어림잡아 수백 대에 이르렀다. 가이드는 "과거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직장으로 출퇴근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이 필요해진 베트남 현지인들은 저렴한 오토바이를 선호했다"며, "현재 오토바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활필수품처럼 이용되고 있다"고 오토바이가 많은 이유를 설명했다. 하늘을 떼 지어 날아가는 새들처럼, 빽빽하게 도로를 메운 오토바이의 모습은 신기하고 새롭게 다가왔다
 어느새 바닷가가 보이기 시작했고, 곧이어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앞에는 세계 6대 해변 중 하나인 '미케비치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이 해변은 다낭에서 호이안까지 약 20Km에 육박한 긴 해변으로, 루프탑에서 바라본 미케비치 해변은 도시의 야경과 함께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넋 놓고 야경을 감상했던 것도 잠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둘째 날부터 진행될 본격적인 일정을 위해 일찍 잠에 들었다. '내일 날씨가 좋았으면' 하는 기대와 함께, 그렇게 베트남에서의 첫째 날이 지나갔다.

루프탑에서 내려다본 다낭의 야경(우측 미케비치 해변)
루프탑에서 내려다본 다낭의 야경(우측 미케비치 해변)

 둘째 날, 우리를 맞이한 것은 흐린 날씨였다. 베트남은 8월에서 다음 해 1월까지 우기 기간이었기 때문에, 맑은 하늘을 보기 어렵다고 한다. 우산을 손에 들고 버스에 오른 연수단은 베트남 최초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옛 수도, 후에 지역으로 가서 '카이딘 황제의 능'과 '후에 황성', '티엔무 사원'을 순차적으로 답사할 예정이었다. 
 먼저, "카이딘(阮福昶) 황제는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의 12대 왕"이라는 가이드의 말을 들으며, 각자 능의 모습을 생각하던 차에 우리는 카이딘 왕릉에 도착했다. 이 왕릉은 1931년에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절에 지어져, 베트남 건축양식과 유럽의 고딕 양식이 결합된 곳이다. 필자는 이 능을 보면서 유럽의 건축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언뜻 우리나라와 비슷한 모습이 겹쳐 보였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돌아보면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지역과 가까운 군산의 항구는 일제 수탈의 창구로 이용되며 많은 일본인이 들어왔다. 이에 따라 일본식 건축물인 '적산가옥(敵産家屋)'이 우후죽순 생겨나게 됐다. 이 가옥은 건설 감독으로 일본인이, 인부로는 조선인이 함께 만들어, 조선의 건축양식과 일본의 건축양식이 결합된 건축물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조선인들은 조국을 되찾았고, 일본인들은 조선을 떠났다. 이후 남겨진 군산의 적산가옥은 비교적 보존이 잘 돼 2000년대에 들어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현재 이곳은 베트남의 카이딘 왕릉처럼 명소가 됐다. 멈춰버린 시간 속 흔적의 아픔이 관광객의 발자취에 의해 지워져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와, 우리는 카이딘 왕릉의 36개나 되는 계단을 힘들게 올라갔다. 양쪽에는 무관과 문관의 석상이 보였는데, 우리나라와 비슷한 문화의 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딘 황제의 능 내부 모습
카이딘 황제의 능 내부 모습

 이후, 둘러본 왕릉의 내부는 외관과는 다른 화려함에 감탄이 나왔다. 벽과 천장은 서양의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아름다운 유리로 장식돼 있었고, 내부 장식도 형형색색의 자개가 부착돼 있어 무덤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느껴졌다. 
 카이딘 황릉을 뒤로하고, 우리는 후에 황성으로 이동했다. 후에 황성은 카이딘 황릉에서 가까운 곳으로, 버스에 오르고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후에 황성에서는 현지 가이드가 함께했는데, 그 가이드는 자신을 '베트남의 박보검'이라고 소개하며, 대단한 한국어 실력을 보여줬다. 그가 구사하는 한국말을 듣다 보면 구수한 한국말이 나와 한 번씩 우리를 놀라게도 했다. 그는 "한국말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운 말이 욕"이라고 말하며 "욕 배우느라 욕봤다"라는 재치 있는 표현 등으로 시종일관 우리를 재밌게 해줬다. 특히 그는 한국어를 공부할 때 베트남에 불어온 한류의 영향으로 좀 더 쉽게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어, 한국말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래서 필자는 한류가 세계에 끼치는 영향이 단순히 'K-POP' 등의 매출이 오르거나 거리에서 "Korea!"를 외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문화와 역사까지 관심 가질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었다.
 가이드의 소개에 따라, 후에 황성을 바라본 우리의 눈에는 중국의 자금성과 비슷해 보이는 건물이 보였다. 우리 눈에 비춰진 후에 황성의 모습은 실제로 그것을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내부 장식, 규모 등을 비교해 보면 자금성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후에 황성이 자금성의 모습을 따라해 베트남과 중국은 우호 관계일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 요인으로 반일 감정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베트남도 중국에 대해 반중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979년 2월, 중월전쟁 이후 서로 감정이 좋지 않던 양국은 10년 뒤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로 또 한 차례 충돌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양국은 수차례 마찰을 빚었고, 그 결과로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에 대한 묵은 감정이 폭발해 최근 양국 분쟁은 지속해서 가열되고 있다.
 한편,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함께 한자를 사용하는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학계에서는 베트남의 한자 단어가 60%에 이를 정도로 한자어도 많고 자신들의 이름도 한자로 짓기도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한자 이름 뜻도 모르고 이름을 한자와 연관시키면 그 뜻을 짐작할 수도 없는 단어들이 돼가고 있다. 기본적인 한자도 알고자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베트남은 한자 자체를 중국문화로 여겨, 더 이상 중국문화에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다. 베트남 현지인은 "후에 황궁 안의 내부에 적힌 한자표기에 대해서 모르며, 배우고 싶지도 않다"고 전했다. 
 우리는 둘째 날의 마지막 일정으로 후에 지역의 사찰 중 '역사가 살아있는 사원'이라고 불리는 티엔무(天寺) 사원으로 향했다. 또한 이 사원이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모으는 큰 이유가 있다면, 바로 틱광둑(釋廣德) 스님의 사연 때문이다. 
 틱광둑 스님은 1960년대에 베트남 독재 정권에 항의하며, 소신공양을 하신 분이다. 당시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제네바 협정으로 인해 프랑스로부터 독립이 되고 남북이 분단돼 있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에서는 응오딘지엠(吳廷琰)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화려한 업적으로 등장했지만, 이후 부정부패로 인해 무능한 독재자의 대명사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특히, 자신이 로마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국민 90% 이상이 불교 신자인 남베트남에서 '석가탄신일'행사를 금지했다. 또한 승려에게 총격을 가하기도 하고, 가톨릭을 믿는 신도들에게 세금을 감면해 주는 등 불교를 탄압하는 일을 일삼았다. 그 시기인 1963년 6월 11일, 틱광둑 스님은 미국 대사관 앞에서 가부좌를 튼 후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틱광둑 스님은 몸에 불이 타는 중에도, 끝까지 가부좌를 풀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가 정권에 저항한 분신자살의 성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후 남긴 유서를 통해 '자신의 희생으로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열망을 기반으로 한 소신공양임이  밝혀졌다. 그 결과로 뿌리 끝까지 부패했던 남베트남 정권의 무능함에 베트남인뿐만 아니라 남베트남 정권을 지원하던 미국 정부까지 폭발했고, 결국 응오딘지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러한 사건이 베트남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약 7년이 흐른 우리나라에서도 젊은 노동자인 전태일 열사가 틱광둑 스님과는 다른 형태로 분신을 감행했다. 그 결과로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이를 계기로 눈을 뜨게 됐다. 이때부터 비로소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은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재정립이 될 수 있었다. 전태일 열사 또한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남겼던 글들을 통해 단순한 저항의 죽음이 아닌, 사회정의를 위한 소신공양이었다고 생각해본다.

오토바이를 앞에 두고 활짝 웃는 베트남  상인
오토바이를 앞에 두고 활짝 웃는 베트남 상인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등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역사 속 인물들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이러한 사실을 아는 우리가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숭고한 사명감을 마음에 담고 다낭의 숙소로 돌아가는 길, 베트남의 길거리는 퇴근길과 맞물려 오토바이가 가득했다. 문득 헬멧 안의 운전자의 표정이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지환 기자 vaqreg@wku.ac.kr
윤진형 기자 kiss7417@w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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