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로서 필자의 이력은 좀 남다르다. 박사학위를 마치기가 무섭게 길을 나섰다. 1000일간 100개 나라 1000개 도시를 쏘다녔다.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보고 듣고 읽고 썼다. 그 견문의 소산을 100편이 넘는 글로 남겼다. 묶여 나온 것이 『유라시아 견문』 3부작이다. 1권으로는 경향신문 선정 올해의 신진저자로 뽑혔다. 2권으로는 대한민국 출판문화대상 최종후보까지 올랐다. 아깝게 고배를 마셨으나, 3권으로 올해 수상을 재도전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출판사와는 한참 영어 번역 출간을 논의하고 있기도 하다.
 대학에서 강의하고 논문을 써야 할 시기에 천일유랑을 감행한 것은 전적으로 하노이 탓이다. 하노이의 1년 경험이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본디 동아시아 냉전사 전공자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UCLA에서 2년간 머물며 박사논문을 탈고했다. 일본과 오키나와, 북조선과 남한, 대륙과 대만을 아울렀다. 제법 폭넓은 시야로 동아시아 냉전을 탐구했지만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동아시아 냉전의 모순이 응축되었던 베트남을 다루지 못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해 없이 동아시아 냉전을 온전히 해명했다고는 말하기 힘들 것이다. 또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남/북베트남으로 분단된 사정도 기막혔다. 동아시아 냉전 연구를 더욱 철저하게 하기 위하여 북베트남의 수도였던 하노이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노이는 동북아 중심의 동아시아 연구의 타성을 깨는 경험들로 가득한 신천지였다. 한반도와 만주와 중원과 대만에 가득한 일본제국주의의 흔적이 희미하다. 오히려 프랑스의 영향을 백년 가까이 받은 장소이다. 프랑스뿐인가. 1945년 이후에는 소련과도 밀접했다. 서유럽과 동유럽의 유산이 150년간 역력했던 것이다. 동북아의 감각으로 동남아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감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다시 짐을 꾸렸다. 주중에는 국립도서관에서 문헌과 씨름하고, 주말에는 배낭을 메고 동남아를 쏘다녔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유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진출 이전에는 아랍과 인도의 영향도 여실했다. 중국과 인도와 아랍과 유럽의 문명이 동남아에서 공존하고 융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리문명을 어떠한 개념으로 포착할 것인가 숙고했다. 그 끝에 유레카처럼 터져 나온 발상이 "유라시아"였다. 유럽과 아시아는 멀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한 몸으로 엮이고 묶이고 섞여 있었다.
 아메리카와 유라시아를 두루 살펴보고 7년 만에 귀국했다. 7년 전과는 전혀 다른 동북아 감각을 가지고 있다.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 자리한 지역이 동북아가 아니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가 만나는 지구의 한복판, 허브이자 허파가 바로 동북아이다. 공간감각의 혁신만큼이나 시간 또한 절묘하다. 유럽과 미국을 지나 인류 문명의 중심축이 동북아로 전이하고 있다. 동북아에서 어떠한 신문명을 구현하느냐가 전 지구적이고 전 인류적인 과제이자 화두로 부상한 것이다.
 천일견문을 마치고 '고려인'이자 '개벽파'로 살겠다고 말하고 다닌다. '고려인'은 천 년 전 이 땅에 자리했던 고려의 공간감각을 계승하겠다는 것이다. 몽골세계제국의 유라시아 네트워크에 깊숙이 참여했던 시대이다. '개벽파'라 함은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서 조선에서 자각적으로 분출했던 개벽사상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겠다는 뜻이다. 허언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3월이면 서울에서 <개벽학당>을 출범시킨다. 가을 무렵이면 <개벽+>라고 하는 신생 매체로 선보일 계획이다. 후쿠자와 유기치의 <문명론의 개략> 이래 지난 150년의 동북아는 개화파가 주도했다. 이제는 개벽파가 주도하는 다른 백년, 다시 개벽의 동북아를 준비하는 것이다.
 때도 무르익는다. 2월 27일과 28일, 북미정상회담이 열린다. 공교롭게도 장소는 다시 하노이이다. 나는 다시 가방을 챙겨 하노이로 향한다.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그 세기적 순간을 현장에서 관찰하며 새로운 연재를 시작할 것이다. 3월부터 <프레시안>에서 격주로 발행하는 <이병한의 동북아 2.0>에도 많은 관심을 바란다.
 
  이병한 교수(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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