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공개 강좌 <글로벌인문학>, 지역학(익산학) 강연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기 바란다. /편집자

 

 

 

4차 산업 혁명과 인공 지능

 
 몇 해 전 다보스포름에서 4차산업혁명이 선언된 이후, 전 세계는  4차산업혁명의 선두에 서기위해 전력 질주하고 있다. 그런데 4차산업혁명이란 무엇인가.
 4차산업 혁명은 가상세계와 현실세계가 상호침투하는 사이버 물리시스템이 구축됨으로써 자동화와 지능화된 생산체제가 경제구조를 급격히 혁신하는 과정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출현한 정보화 기술, 즉 IT는 4차산업혁명을 주도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 IT가 인간과 인간의 소통기술로서 실현되는 ICT의 단계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IT는 이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 만물의 소통과 조작을 실현시키는 사물인터넷 IOT, 더 나아가 만물 인터넷 IOE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만물인터넷 시대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무한양의 데이터가 광속으로 생산 순환되고, 이 빅 데이터 안에 사실상 패턴으로 인식되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진리가 숨어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진리를 정확하게 인지하여 가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의 두뇌는 빅데이터를 감당하지 못한다. 무한 규모로 집적되는 빅데이터에 내재된 진리는 알파고 같은 딥 러닝프로그램 인공지능을 통해 파악될 수 있다. 결국 4차산업혁명에서는 인공지능이 진리 인식의 주체가 되어 생산 방식과 소비 양식을 결정하고 생산작업 자체가 다시 사이버 물리시스템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생산설비와 심지어는 서비스까지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담당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인간은 진리를 인식하여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여 소비하며 삶을 영위할지를 결정하는 삶의 주체(subject)가 아니다. 4차산업혁명을 지휘하는 실질적 두뇌는 인공지능인 것이다. 과연 미래의 역사는 인공지능이 이끌어 갈 것인가.
인공지능과 인간: 튜링에게 묻다
 
 인공지능은 20세기 중반 출현하여 몇 번의 좌절을 겪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으로 알았던 많은 능력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기계를 구별할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한다. 
 컴퓨터의 아버지라 불리는 튜링은 컴퓨터와 같은 기계도 생각할 수 있다는 주장하며 다음과 유사한 가상 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려 했다.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어떤 방에 인간과 컴퓨터가 있다.
 이때 방 밖의 사람들이 방안에 있는 인간과 컴퓨터 각각에게 컴퓨터채팅과 같은 방식으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답변을 구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방 밖의 사람들이 어느 것이 인간이고 어느 것이 컴퓨터인지 구별하지 못한다면, 컴퓨터는 인간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 그 후 사람들은 과연 튜링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는 기계가 등장한다면, 생각은 이제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만일 인간의 본질이 생각하는 존재라면, 생각하는 기계는 곧 인간인 것이다.
 실로 지난번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에서  인공지능은 사실상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것이다. 만일 이 대결에서 미리 알파고가 기계라는 사실이 감추어진 채, 단순히 대국의 상황이 바둑판 모니터로만 보여졌다면, 사람들은 이세돌보다 바둑을 잘 두는 인간이 이세돌을 이긴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일견 튜링같은 천재만이 고안할 수 있을 듯한 튜링테스트에는 결정적인 어리석음이 잠복하고 있다. 이 어리석음은 튜링테스트를 튜링 자신에 적용시켜보면 쉽게 폭로된다. 만일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방에 튜링과 튜링을 목소리를 잘 흉내내는 컴퓨터가 있고 밖에 있는 인간들이 튜링과 컴퓨터에 동시에 대화를 나눈 결과 그 인간들이 컴퓨터를 튜링과 구별하지 못한다면, 이제 컴퓨터는 튜링인가? 그래서 사람들이 이제는 컴퓨터와 튜링을 구별하지 않고 튜링을 컴퓨터와 동일시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상황을 튜링은 용납할 것인가.  튜링 자신이 아닌 기계가 마치 튜링처럼 행세하고 사람들이 그 기계를 튜링으로 인정한다면, 튜링은 자신의 튜링테스트가 입증되었다고 기뻐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바로 튜링 자신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인간 - 누구와 무엇과 같을 수 없는 존재자
 
 여기서 암시되지만,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개개의 인간은 무엇과도 또 누구와도 같을 수 없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데 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각 인간들이 일상에 매몰되어 그저 남을 따라 막가는 듯 살 때는 망각된다. 그러나 삶이 위기에 처할 때,  죽음이 의식되는 순간 그리하여 자신의 삶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에 직면할 때, 인간은 원래 다른 무엇과도 어느 누구와도 같을 수 없는 자기 자신이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자신은 늘 어떤 역사적 상황 안에 존재한다. 때문에 인간은 역사적 체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인간의 체험이 이루어지며 이 체험이 그에게 어떤 방식으로 체화되어 그의 몸과 함께 어떤 삶의 의미를 창조해가는 가는 인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다. 혹자는 그가 속한 역사적 상황이 비리와 모순으로 점철되어있어도 그에 순응하며 편안하고 안일한 삶을 살아가는 가하면, 혹자는 온몸으로 저항하며 고통을 감수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고난의 길을 간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기를 바라며 "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인간의 시가 탄생한다. 또 어린 시절 광주의 트라우마를 온몸으로 기억하며 인간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이 탄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현재 인공지능의 둘러싼 논쟁의 허망함, 특히 인공지능의 자율성, 창의성에 대한 논의의 허망함이 노출된다. 인공지능은 시나 문학을 쓸 수 있는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지능인가하는 질문에 앞서 인간은 어떤 존재이기 때문에 시나 문학을 창조하는가에 대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튜링테스트의 무지보다 더  무지로 가득 찬 테스트를 수행할 것이다. 즉 컴퓨터가 자동으로 출력해낸 글자들의 조합을 보고 인간들이 시인들의 시와 구별하지 못하면, 컴퓨터에게 시와 같은 예술적 창작 능력이 있다는 믿음 아래 앞으로는 인공지능을 통해 빠른 속도로 시와 소설을 제작하는 산업을 발전시키려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무지인지는 다시 한번 윤동주의 시를 상기해보면 각성하게 될 것이다. 일본 식민지 시대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조국을 잃고 간도를 떠돌던 조선인 동주의 삶, 그 삶이 없이는 동주의 시는 탄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미래로부터 탈출
 
 사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은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루어내는 인공지능이 현재처럼 어마어마한 자본을 흡입하며 범용화될 때, 인간이 처하게 될 미래의 상황을 이미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이 대결에서 우리가 목격한 인간의 미래 모습은 알파고도 이세돌도 아니다. 그것은 알파고의 지시에 따라 바둑돌을 놓던 아자황이다. 아자황은 이번 대결에서 인간으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오로지 알파고의 아바타로만 존재하였다.
 우리는 한때 그렇게 생각했다. 아바타라는 영화에서 보듯 우리는 미래에 우리의 아바타를 만들어 사이버세계나 실재세계에 나를 대신해서 운용할 수 있다고. 그러나 미래는 정 반대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아자황의 존재에서 폭로된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처럼 인공지능이 기술중심적으로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적 성능을 급속히 증강시키는 목적에만 집착한다면, 인간의 미래운명은 아무런 존재의미가 없는 존재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4차 산업 혁명- 인본적 민주정치를 향하여
 이러한 무의미한 미래와는 다른 미래로 가려면, 인공지능을 비롯한 모든 첨단기술은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며 개발되어야 한다.
 늘 각성되어야 할 사실이 있다. 인간만이 일한다. 인공지능은 다만 작동할 뿐.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성취하기 위해 일을 하기 때문에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술은 인간과 일을 매개하여 인간의 실존적 삶을 미래로 성취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대신하여 일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인간을 좀 더 지능적으로 바람직하게 중재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공지능에 주어진 일종의 윤리적 사명이다.
 그리고 또 유념해야할 사실이 있다. 4차 산업 혁명은 시장 자본(market capital)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는 점이다. 시장 자본에 의한 기술적 성장은 그것이 급속한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한다고 해도, 사회적 정의, 신뢰, 상호인정과 존중과 같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없는 곳에는 사회적 갈등만을 심화시킬 뿐이다. 사회적 자본이 빈약하여 사회갈등이 증폭되는 곳에서 4차산업 혁명은 그것을 추진할 사회적 동력을 확보할 수 없다. 따라서 4차산업 혁명이 진정으로 역사를 발전시키는 혁명이 되려면, 사회적 자본을 확충하는 협력적 창의성 증진을 위한 사회적 혁신이 우선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4차산업 혁명을 향한 기술혁신은 인간을 갈등과 소외의 늪으로 몰아넣는 불행한 혁명의 행로를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협력적 창의성은 경쟁과 서열화를 통해 생산성만을 증가시키는 현재와 같은 사회 운영체제에서는 증진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창의적 주체로 존중되고 또 그들의 참여가 적극 고무되는 인본주의적 민주정치 공간이 진정으로 열릴 때 활성화된다.

  이종관 교수(성균관대 철학과/미래인문학 연계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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