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생인류를 규정하는 수많은 용어 중에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표현이 있다.  선사시대에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슬기로운 인간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러나 디지털 세계가 열어놓은 새로운 구술문화 환경에 착안해 말하건대, 지금 우리는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곧 '이야기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2000년대 이후 눈부시게 발전해 온 초고속 인터넷망과 유무선 복합 미디어는 이야기를 통한 소통의 수단과 방법, 범위를 크게 변화시켰다. 지금 우리는 놀이성, 구술성, 가상성이 점증한 디지털 환경 안에서 '내가 참여해서 만드는 이야기'로 교유하는 풍경에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이야기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 계기를 디지털 환경의 전면화에서만 찾아선 안 된다. 사실상 인류는 근본적으로 호모 나랜스였다. 진화 심리학적 관점에 따르면, 인류의 마음 구조 속 기억 저장소부터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신화, 전설, 민담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곧 오래 살아남은 이야기들은 집단의 경험 저장소, 기억 관리소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오랜 세월 구술되다가 적층 문학으로 내려앉은 옛 이야기들을 보면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인류 보편의 원형(archetype)을 환기시키는 경우가 많다. 잘 알려진 예를 들자면, <신데렐라>와 <콩쥐팥쥐>의 유사성을 통해 그 근거를 확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소녀의 불행에서부터 출발한다. 소녀의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새로 장가를 든다. 그로 인해 소녀에게는 계모와 자매들이 생긴다. 이후 아버지마저 죽자 그녀는 힘든 가사 노동을 홀로 떠맡으며 심한 구박에 시달린다. 이때 마을 전체를 들썩이게 하는 왕자님의 큰 파티가 열리는데, 계모에 의해 그녀는 파티에 참석할 수 없게 된다. 소녀에겐 입고 갈 옷과 교통 수단도 마땅히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돕기 위해 나타난 요정이 호박을 마차로, 쥐와 말을 마부로 만들어준다. 더러운 옷과 헌 신발을 멋진 드레스와 유리구두로 바꿔주기까지 한다. 다만 요정은 자정이 되면 이 모든 마법이 풀린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자정이 되기까지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왕자님과 춤을 추던 그녀는 요정의 금기를 뒤늦게 떠올리게 된다. 급하게 왕자님의 궁을 나서던 그녀는 유리구두 한 짝을 그곳에 흘리게 된다. 권선징악으로 수렴되는 이후의 결말은 굳이 여기서 첨언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콩쥐팥쥐>는 시공간적 배경이 바뀌고, 왕자님 파티가 고을원님 잔치(혹은 '외갓집 잔치')로 바뀐 것만 다를 뿐 전체적인 이야기 맥락이 매우 흡사하다. '부모의 죽음-시련과 고난-초자연적 힘의 개입-왕자님(원님)과의 대면-신발(구두) 분실- 왕자님(원님)과의 재대면-결혼-계모와 자매에 대한 처벌' 등 모티프의 순서까지 일치하는 편이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신데렐라>와 <콩쥐팥쥐> 이야기의 유사성을 두고 양자가 실크로드를 따라 전승 관계에 놓인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정도 차가 있지만 <신데렐라>, <콩쥐팥쥐>와 상동성을 가지는 이야기가 세계 곳곳에 최소 500여개 이상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데렐라>, <콩쥐팥쥐>의 유사성은 좀 더 근본적인 현상으로 확대해서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인류는 일정 수준 이상의 상동성을 내보이는 보편적인 선악관을 내재해 왔다. 시원적인 가치체계를 공유하면서 이를 이야기 안에 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러한 관습은 인종, 민족, 국가, 성별 등에 따라 크게 다르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인류가 호모 나랜스로 소통해 왔다는 사실은, 선사시대 생활양식에서부터 다면적으로 드러난다. 예컨대 우리 주변의 저명한 지형지물에는 모두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거대한 바위, 특이하게 생긴 고목, 오래된 절터 등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심어져 있다. 이는 우리 민족만의 두드러진 현상이 아니다. 하늘의 별자리를 두고 말하면, 그곳에 이야기를 만들어두지 않은 민족이 없을 정도다. 수많은 별자리 중 '거문고자리'에 대해서만 말하면, 그리스인들은  그곳에 오르페우스 신화를 심어두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일한 별자리에 견우와 직녀 이야기, 곧 일 년 중 칠월칠석날이 되면 오작교를 건너는 연인(부부)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 공교롭게도 동일한 별자리에 슬픔으로 귀결되는 다른 형태의 사랑 이야기가 착종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이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적확한 답을 내놓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반대로 가능성있는 여러 추론을 제시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여기서는 한 가지 사소한 추론을 통해 답안에 근접할 수 있는 길을 상상해보고자 한다. 먼 구술문화 시대를 산 선조들에게 별자리는 동서남북 방위를 판단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을 것이다. 그 시절, 해안가에 살면서 뗏목을 타고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 있었다고 하자.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물고기를 좇아 너무 먼 바다까지 나갔다고 하자. 밤이 깊어 사방이 어두워졌고 아무리 둘러봐도 육지라곤 뵈지 않는 상황이라고 하자. 그는 어떻게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있었을까.
 별자리마다 이야기가 있는 이유는 그러한 현실적 상황으로부터도 유추가 가능하다. 이미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이야기는 그 자체로 몰입감이 높고, 내부의 정보들을 장기 기억시키는 힘을 가진다. 따라서 별자리에 심어진 전승된 이야기를 통해 방위를 판단할 수 있었다면, 뗏목에서 위기를 맞은 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생존을 위한 도구적 지식이 되는 셈이다. 그 연장선에서 생각해 보면, 글자가 아직 발명되지 않아 지식을 정확히 전수할 수 없었던 선사시대라면, 이야기의 중요성은 훨씬 더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지혜와 소소한 생활의 지식, 마땅히 추구해야 할 도덕적 가치 등을 이야기 안에 응축해 후세에 전수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후 역사시대가 되면서 호모 나랜스의 역사는 급격한 전환을 맞이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소설이나 연극과 같은 스토리텔링 매체는 이야기가 예술적으로 양식화 된 증거다. 이야기를 담아내는 예술적 형식이 널리 공유되면서 당대 대중들의 문화 속에 이야기가 유통되는 공인된 플랫폼들이 자리 잡기에 이른다. 다만 인쇄술의 발명 이전에는 활자화 된 이야기 예술이 널리 공유될 순 없었다. 이야기 소비의 대중화가 일어난 시점은 인쇄술의 발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최근 20여년 사이에 인류의 삶을 흔들어놓은 디지털 문화의 정착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호모 나랜스의 관점으로 인류사 전체를 통시적으로 훑는다고 할 때, 이때의 전환은 인쇄술의 발명만큼이나 큰 의미를 가진다고 믿는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이야기가 유통되는 방식과 플랫폼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물론, 이야기 형식 자체의 변화도 광범위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작금의 디지털 환경을 언급하는 여러 용어들, 이를테면 방송통신 융합시대, 멀티소스 플래닝 시대 등의 용어에는 이야기 매체를 둘러싼 환경과 가치사슬이 급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수렴되어 있다. 또한 매체의 성격, 매체 플랫폼의 기술 기반에 맞는 콘텐츠를 맞춤으로 기획해야 한다는 시대의 요청 등이 짐작된다.
 그런 까닭에 과거 '서사학'으로 불렸던 학문영역의 유산만으로는 제대로 창작·기획하기 힘든 대중예술의 영역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미 엄청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MMORPG 게임은 전통적인 이야기 예술인 소설처럼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콘텐츠 형태를 완전히 벗어난다. 이를테면 MMORPG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외형부터 특정한 후, 자기 호흡으로 성장서사, 모험서사를 써가는 주체가 된다. 작가에 의해 완성된 이야기가 수용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소통구조를 넘어서는 셈이다. 이즈음에서 우리는 거의 틀림없는 예측을 해볼 수 있다. 이후의 스토리텔링 콘텐츠는 이야기(story)의 현장성(-ing)과 상호작용(-tell-)성이 더욱 점증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늘날 디지털 환경이 새롭게 재편하고 있는 구술문화는 종전의 서사학과 다른 '스토리텔링학'을 요구할 것이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며 '스토리텔링학'은 인문학의 작은 출구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문화콘텐츠 산업 분야에서는 '스토리텔링'이 이미 중요한 전략적 용어로 분류되고 있다. 그에 따라 스토리텔링에 관한 학계의 담론 지형도도 매우 세분화되어 가고 있다. 전공이 다른 여러 연구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토대 위에서 스토리텔링 이론을 갈래화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스토리텔링학'이 엄밀하게 분류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 분과학문의 경계로부터 자율성을 갖는 새로운 학문으로 체계화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이러한 상황을 대략적으로 확인해보기로 한다면, '스토리텔링'이란 키워드로 출간된 책을 검색해봐도 좋겠다. 문화 연구서나 관련 대중 교양서에서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이 큰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스토리텔링'이란 용어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 곳은 교육용 참고서를 출간하는 분야다. 그 외에도 브랜드 및 상품 스토리텔링, 자기계발 스토리텔링, 미디어 및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결합된 스토리텔링, 공간 및 관광 스토리텔링, 인지·감성 과학과 결합한 스토리텔링 등 매우 다양한 주제에 걸쳐 '스토리텔링' 개념이 범용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나 이론이 체계를 갖춰가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개념상의 혼란이 상당하다. 어쩌면 이후에도 스토리텔링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도출하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언급한 것처럼 스토리텔링 개념은 디지털 기술과 미디어 플랫폼의 형태, 콘텐츠의 형식과 밀접하게 결속된다. 따라서 스토리텔링에 대한 개념 정의는 항상 '과도적'이거나 '유보적'이 될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한 실용적 접근에 있어서도 시각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요즘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곳저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시의성 높은 주제인 건 맞지만, 생각할수록 추상적인 화두로 느껴진다. 우리는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기술을 중심으로 시대를 읽어 왔다. 예컨대 '증기(1차 산업 혁명)', '전기(2차 산업 혁명)', '인터넷(3차 산업 혁명)' 등은 비단 산업구조뿐만 아니라 문명의 풍경을 전면적으로 변화시킨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차원의 기술 문명으로 진입하고 있다. 추상적이라고 여겨졌던 앞의 질문을 이렇게 바꿔 묻고자 한다. 4차 산업 혁명의 시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어떤 방식으로 나를 스토리텔링해갈 것인가. 세상은 넓고 써내려갈 이야기는 많다.

  안숭범 교수(경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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