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지않아 역사를 바꾼 자유민주주의 운동인 4.19혁명 기념일이 다가온다. 4.19혁명을 모르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알고 생각할 수 있으면 된다. 

 
▲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광주고등학교 4.19민주혁명역사관이 지난 3월 20일 개관했다
 
 부패했던 독재 정부 
 지금으로부터 59년 전인 1960년 제4대 대통령, 제5대 부통령 선거는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로 인한 부정선거 결과, 이승만 85%, 이기붕 73%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지만, 2년도 채 되지 않아 6.25전쟁을 겪으면서 국토는 완전히 폐허가 됐다. 그러나 국가를 재건하고 경제를 일으켜야 할 이승만 정권은 자신들의 장기집권을 위해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반대세력에 대한 폭력 등 온갖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일삼았다. 1956년 민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자, 이에 자유당인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에 있을 정·부통령 선거를 대비해 선거 1년 전부터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였다. 이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은 3월 15일 오후 12시 45분에 3.15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를 최초로 전개했다. 이후 오후 5시 30분에 3.15 마산의거가 일어났다. 4월 11일 3.15의거 당시 행방불명됐던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 되면서, 분노에 들끓은 시민들이 12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갔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18일 오전 3천여 명의 고려대 학생들은 "민주 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며 재선거 실시를 요구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시위는 격렬해졌고 많은 사상자를 내며 계엄령까지 선포됐다. 이에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27일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드디어 민주시민이 승리하던 날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시발점 
 <원대신문>은 지방에서 전개된 4.19혁명을 자세히 알아보고자 광주를 다녀왔다. 광주시내에선 광주고를 기점으로 광주여고, 광주숭일고 등 11개의 광주 내 고등학교 학생들이 4.19혁명에 참가했다. 4월 18일 저녁 이홍길(광주고 3년)학생의 하숙방에서 시위를 결의한 11명의 광주 학생들은 19일 오전 10시 40분 경 교내 시작종을 신호로 시내에 진출했고, 나아가 전남여고, 광주여고 등지를 돌며 동참을 호소했다. 오후 2시 이후 금남로 일대에서 벌어진 시위는 순식간에 대규모로 발전했다. 계속된 시위 중 오후 8시경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강정섭(17세)학생이 좌우 상박부 관통상으로 사망하며 광주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후에도 계속된 발포에 맞선 수천의 시위대는 오후 9시 40분경 경찰의 집단 발포가 이뤄지면서 금남로와 충장로 일대에서 6명이 사망했다. 4.19혁명에 의거한 사상자 수는 전국에서 186명이 사망했고, 6천 26명이 부상을 입는 희생이 뒤따랐다. 광주에서 시위가 최초로 시작된 광주고등학교에 위치한 4.19민주혁명역사관 내부에는 광주 학생들의 시위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흑백의 사진들은 하나같이 그날 현장의 모습을 바로 오늘의 일처럼 보여주고 있다. 역사관 입구를 들어서니 광주 4.19혁명의 서막을 여는 광주고 학생들이 교문 앞에서 경찰과 선생님들을 뚫고 있는 당시 사진과 함께 영상을 시청할 수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는 광주시위에 참여한 각 고등학교 대표 7인의 사진을 실제 크기로 마주할수 있다.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답게 굳은 신념과 용기로 뭉친 그들의 외침이 사진 속에서도 느껴졌다. 역사관에서는 사진 이외에도 자세한 설명이 담긴 기록과 그때 당시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함성 체험실이라는 곳은 과거 현장의 함성을 듣고, 직접 소리를 질러보며 그때 당시 학생들의 함성 크기와 비교할 수 있는 현장을 재현한 곳이었다. 한쪽에는 광주가 4.19혁명의 진원지라는 기록이 전시돼 있었다. 1960년 3월 16일자 동아일보와 부산일보, 17일자 전남일보에 따르면 정확한 시간과 함께 시위를 처음 광주시민이 시작했다는 기사가 남아있다.
 
 전국에서 울려퍼지는 외침 
 우리대학 학생들뿐만 아니라 익산시민들, 또 여행객들은 익산역을 자주 방문한다. 하지만 익산역 광장에 4.19학생의거기념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4.19혁명  당시 익산에서는 남성중·고등학교, 이리상업고등학교, 이리농업고등학교, 원광중학교 등, 중·고등학생들이 3.15부정선거와 이승만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또 당시 우리대학을 포함한 전북대, 중앙대 등 3천여 명의 재학생들이 장기 집권 자유당 타도를 외치며 익산 역 앞 거리를 가득 메운채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정의를 향해 타오르는 민족의 숨결을 전하고자 4.19학생의거기념탑이 그해 기공돼 이듬해 준공됐다. 기념비는 2002년 작고하신 우리대학 배형식 교수가 제작했고, 글씨는 익산출신 서예가 석당 고재봉(1923~1966)선생께서 썼다. 
 4.19혁명때 대학생 시위는 전북지역 대학에서 최초로 시작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서울학생들은 비겁하다'는 비난과 함께 서울지역 대학생들보다 앞서 시위를 주도했다. 4.19혁명은 이처럼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인천, 대구, 광주, 마산, 익산 등 전국에서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부정과 불의에 대항해 목숨을 걸고 역사를 바로 세운 항거이다. 어떤 역사가의 평대로 4.19혁명은 서울의 명문대 학생을 위주로 기록하고 있고 명문대 졸업자들만 그 성과물을 전유해 왔지만 4.19혁명의 진실은 전국적인 항거였다. 국립4.19민주묘지 기념탑비문에는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린 186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됐다.'고 적고 있다. 4.19혁명, 뜻깊은 날을 맞이한 만큼 민주열사들의 정신을 오랫동안 계승하고 앞으로도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바람을 다져본다.
 영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은 시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대학 학생들은 현재 다가오는 중간고사를 앞두고 학업에 집중하느라 역사적 아픔에는 깊은 신경을 쓰기에는 힘들 수도 있다고 지레짐작해본다. 
 하지만 우리나라 민주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4.19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관심과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 역사 발전에 큰 획을 그은 4.19혁명 기념일은 365일 중 딱 하루이다. 적어도 하루쯤은 우리는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고 민주주의와 정의는 무엇인가를 되뇌는 날이 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익산역 앞 광장에 위치한 4.19학생의거기념탑
 이애슬 기자 dldotmf3295@wku.ac.kr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