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나에게는 무척이나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름이다. 국어국문학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향가 '서동요'의 설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며 국어학적으로 많이 언급된 지명 '솝리'와 관련된 곳('솝리'는 '이리(裏里)'의 고유한 이름으로 현대어 '속'의 고형인 '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학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이기도 하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고향 가는 KTX열차의 정차역으로서 그 이름이 매우 귀에 익은 곳, 나아가 가까운 지인 하나가 터를 잡아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몇 번은 인연을 맺었어야 당연할 것 같은데, 이번의 익산 방문이 초행길이라니 내가 생각해 봐도 무척이나 의아스러울 뿐이다.
 근래 '익산'이 뉴스에 자주 등장했다. 바로 미륵사 석탑과 관련해서다. 지난달 미륵사 석탑이 20년 가까이 보수·정비를 마치고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후 며칠 동안 논란거리의 핵심은 복원 과정에 문제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갑론을박에 집중되고 있는 느낌이다. 문화재 복원 과정의 옳고 그름의 판단이야 전문가들의 몫이고 나로서는 그 복원된 석탑을 직접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일던 차에, 좋은 기회가 생겨 익산 일대의 문화 유산을 둘러볼 수 있게 되니 무척이나 감회가 새롭다.
 지금 이 순간 우선 우리를 위해 고생한 문화 해설사가 떠오른다. 사투리도 적당히 섞인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맴돌고 크지 않은 여성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열정이 눈에 선하다. 그분은 익산의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물론이려니와 익산에서 자라는 야생식물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는 듯했다. 첫 만남에서 꽃을 대신하여 '남천'을 선물하는 것도 특이했거니와 '개불알꽃'을 보여주며 지금은 이름이 '봄까치꽃'으로 바뀌었다고(개인적으로는, '개불알꽃'이 이름은 좀 민망하기는 하지만 '봄까치꽃'보다는 더 정감이 가고 식물을 떠올리는 데에도 더 나을 듯하다) 설명해 준다거나 서양 민들레와 토종 민들레의 구분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아마도 이는 익산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에서 저절로 움트는 것이라 생각하며 이런 분들이야말로 익산의 또 다른 문화적 자산이 아닌가 한다.
 해설사를 따라 미륵사 터에 들어서니 그렇게 보고 싶었던 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가까이서 석탑을 보고 있노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선 국보 문화재의 역사적 가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최선의 복원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6층까지만이라도 온전한 탑의 모양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아가 전문가들에게 몰매를 맞을 일이지만 지금과 같은 탑의 모습이라면 시계방향으로 90도를 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도 한번 해 보았다. 한편 이 거대한 석탑을 보고 있노라니 언제가 배운 '옛사람도 나를 못 보고 나도 옛사람을 못 본다'는 문구가 떠올랐던 것은 왜일까? 나와 백제인이 서로를 볼 수는 없지만 1400년 가까이 이들을 모두 보아온 저 석탑은 지금 나를 내려다보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라니….
 익산에는 '고도리(古都里)'라는 마을이 있다. 처음에 이 이름을 들었을 때는 딴 의미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는데 주위를 살펴보니까 나만이 들었던 생각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선돌 같기도 하고 장승 같기도 한 두 석불이 서로 마주하고 서 있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무척이나 키가 큰데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는 얼굴이다. 그리고 왕궁리에는 석탑이 하나 있는데 낮에 보아도 좋지만 밤에 보니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끝으로 1박2일 동안 줄곧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익산이 백제의 왕자 서동과 신라의 공주 선화의 설화가 숨쉬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나로서는 이 설화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실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설화를 만들어 낸 데에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백제인과 신라인의 화합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우리가 사는 지금도 이 소망은 여전히 절실하지 않은가 한다. 그리고 갈등을 해소하는 가장 큰 힘, 그것은 바로 문화의 힘이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익산은 커다란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신라인의 후예들과 소통하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에는 기암절벽을 뚫어 만든 통문이 있다. 이름하여 '나제통문(羅濟通門)'인데 신라땅과 백제땅을 연결해 준다는 문이다. 나는 새로운 의미의 '나제통문(羅濟通文)'을 희망해 본다. 바로 신라인과 백제인의 후예들이 문화로서 서로 소통하여 진정으로 하나 될 수 있는 그런 '대동(大同)'의 세상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서동'의 도시 익산에 부여된 숙명과도 같은 과업이 아닐까?
 
  정인호 교수(대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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