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배 몇몇과 함께 석탑의 복원 현장을 찾은 것은 2013년 2월 15일. 탑의 해체 과정 중 탑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심초석(心礎石) 안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4년 전인 2009년 1월이라고 했다. 그때 발굴된 사리봉영기에 적혀 있기로 639년 정월에 사리를 받들었다고 하니, 그 사이에 아무도 이를 열어 보지 않았다면 사리는 무려 1370년 만에 햇빛을 본 셈이다.
 화려하기 그지없다던 사리장엄구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때 내게 매우 깊고도 굵은 인상을 남긴 것은 다름 아니라 사리공 주변에 남아 있던 먹줄이었다. 우리를 안내해 주시던 연구원 선생님의 다소 상기된 음성, 그리고 1370년 전 탑을 쌓던 때 사리를 정중앙에 모시고자 십자 모양으로 쳐 놓았던 금. 아마 사리장엄구를 보았더라도 난 그 먹줄에 더 강한 공명(共鳴)을 느꼈을 것이다. 마치 엊그제 공사장의 인부들이 그어 놓은 듯이 선명하게 내 눈에 새겨졌던 그 먹줄은, 이제 다시 복원된 탑 속에서 텅 빈 사리공을 지키고 있을 게다.
 한참이 지난 작년 6월 20일, 6층까지만 쌓아 다행이다 싶은 미륵사지의 서쪽 석탑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나는 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그 오랜 시간을 오롯이 복원 작업에 바치신 분들께, 저 탑을 만들었던 사람들과 우리들 그리고 우리 후손들이 두고두고 고마워할 것이라고. 최근 감사원에서 탑 내부에 쌓은 석재와 그 틈을 채우는 충전재 사용에 일관됨이 없다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뒤늦게나마 옛 부재를 쓰기로 한 것이나 천연 재료인 황토를 쓰기로 한 것이 대과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리공에 먹줄을 남겼던 이들에게 그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현존하는 최고이자 최대의 석탑이 무너져 가는 것을 내려다 보며 먹줄을 튕기고 탑돌을 쌓던 그들의 마음도 함께 무너졌으리라. 백제의 무왕은 그의 아들 대에서 국운이 다하였으니 석탑에 마음을 둘 여유도 없었을 것이요, 절의 창건에 재정적 뒷받침을 했을 왕후 사택(沙宅) 씨는 막강한 귀족이었을 테니 탑 하나 무너진 것에 마음을 쓰지는 않았을 터. 목탑의 형식을 가져와 튼튼한 석탑을 축조해 보고자 했던 도전적 설계자들, 수많은 기술자들과 그들의 지시에 따라 밤낮 없이 일했을 일꾼들, 용화산(龍華山) 미륵의 구원을 바라며 푼푼이 시주를 하였을 궁핍한 중생들. 이들 모두 오늘의 복원을 그 누구보다 고마워할 것이다.
 조선 초기의 유학자 김종직(金宗直)이, 비웃듯이 노래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용화산 만 길 능선을 넘었다(上龍華萬岡)고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였을 미륵사지 석탑. 이 탑은 언제, 왜 무너지게 되었을까. 16세기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3권 전라도 익산군에 대한 설명에는 미륵사가 용화산에 있으며 그 탑이 동방의 석탑 중 가장 크다는 언급이 있는데, 절터만 남아 있다거나 하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미륵사나 석탑―동탑인지 서탑인지 둘 모두인지 알 수는 없지만―이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와유록(臥遊錄)>의 '유금마성기(遊金馬城記)'는 미륵사의 터에 100년 전 벼락으로 절반이 허물어진 석탑이 있는데, 농부 세 명이 그 위에 올라가 누워 있는 모습을 그림 그리듯이 보여 준다. 후자의 기록이 정확한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에 따르자면 18세기에 이미 동탑은 자취를 감춘 상태이고 서탑은 대략 17세기 언젠가 무너져 내리지 않았을까 싶다.
 만일 누군가가 고의로 탑을 무너뜨렸다면 아마 그 사람도 당시의 판단을 후회하며 탑의 복원에 고마움을 느꼈을지도 모를 텐데. 그러나 탑은 자연의 힘에 의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복원 작업에 참여하셨던 한 선생님의 논문에 따르면, 오랜 옛날에도 탑을 개축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지금처럼 절반 이상이 허물어지게 된 것은, 붕괴 상태를 볼 때 지진이나 낙뢰 같은 현상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지하수나 지표수 및 빗물로 인하여 기단이 침식되고 그 결과 외부 마감 구조물들이 바깥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과도기에서 목탑의 형식을 따라 설계한 기단이 돌의 무게를 버티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미륵삼존이 나타났다는 큰 연못을 지명법사(知命法師)가 하룻밤 만에 메우고 절을 지었다고는 하나 절 아래에는 지하수가 아직 남아 침하를 일으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내가 줄곧 알고 있던 미륵사지 석탑 형상의 작자, 1915년 시멘트로 탑을 받쳐 두었던 이들도 역시 지금의 복원을 고마워할 것이다. 걷어 내느라 애를 먹게 한 일제의 보수 작업. 한숨이 날 만도 하지만 그들이 사용했던 시멘트는 당시의 첨단 자재여서 일본 내의 문화재를 복원할 때에도 쓰였다고 한다. 1968년 광화문을 복원할 때에 시멘트를 쓴 것은 문제일 수 있지만 일제 강점기 때에는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본격적인 발굴 조사도 없이 거의 무너져 가던 탑을 그저 넘어가지만 않게 미봉의 조치를 취했던 그들도 이제야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눈을 돌려 저 번듯한 동탑 복원에 참여했던 분들의 심정은 어떨까. 90년대 초 많은 전문가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의 말에 휘둘려 졸속으로 복원되어 버렸다는, 서글프게 말끔한 동탑. 그 사업에 동원된 분들에게 무슨 큰 잘못이 있으랴. 그분들도 마주한 탑이 제대로 복원되었다는 데에 자신의 못다 한 임무가 대리 완수되었다는 고마움을 느끼지는 않을까.

 탑이 되살아났다. 빡빡한 시멘트를 털어내고 묵은 숨을 내쉰다. 지금의 우리들은 아마도 그저 여행 중 구경할 거리 하나가 제대로 남겨졌음을 고마워할 수도 있다. 그나마 나는 1370년 만에 그 생생함을 살짝 드러내고는 다시 영영 모습을 감추고 만 먹줄을 보았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허나 내가 아무리 고마워한들 그들만 하랴. 세상을 구원해 줄 미륵을 간절히 기다리며 돌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아 쌓아 올렸건만, 세월을 이기지 못하여 무너져 가는 석탑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던 이들, 무너진 탑을 되살려 보려 했지만 제 뜻을 이루지 못했던 이들은 화강암처럼 무거운 마음을 이제야 내려 놓으셨으려나.

 

김현 교수(서울대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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