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카페나 식당의 출입문에는 영업시간과 함께 '아이는 동반할 수 없다'는 문구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통제가 되지 않는 아이들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가게들은 '노키즈존'을 영업 방침으로 내세우고 있다.
 부산의 한 카페에서는 중·고등학생의 매장 방문을 거부하는 '노틴에이저존' 안내판을 내걸기도 했다. 안내판에 의하면 학생들이 직원에게 무례한 행동을 일삼고 심지어 욕설까지 내뱉는 행위를 하고 있어 매장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 청소년들의 출입을 금지하게 됐다고 밝혔다.
 민폐를 끼치는 아이들에게 지친 업주들은 자신의 영업장을 '노키즈존'과 '노틴에이저존'으로 선언하며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아무리 아이나 부모에게 양해를 구해도 말이 통하지 않고, 다른 손님들에게도 피해를 주기 때문에 가게의 수익 감소까지 감안하면서 내린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영업주의 권리라는 의견과 약자인 아동과 청소년을 차별하는 정책이라는 의견으로 맞붙어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도 내 돈 내고 밥 먹는데 조용히 먹고 싶다며 아이들의 출입 금지에 대부분 옹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아동과 청소년 집단 전체를 거부하고 있는 가게들이 증가하고 있지만 과연 아이들의 출입통제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일부의 행동을 빌미로 소통하지 않은 채 선을 긋고 거부하는 행동은 약자를 차별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영업장이라는 이유는 아이들의 출입 금지의 정당한 사유가 아니라, 아이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적인 공간이 될 뿐이다.
 어른들에게 조용하고 편하게 식사하고 싶은 권리가 보장되는 만큼, 아이들 역시 식당에서 식사할 권리도 보장받아야 한다. 일부는 부모에게 "아이를 통제할 자신이 없다면 밖에 나오지 말고 집에만 있어라"라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경제활동을 하는 어른이 경제력 없는 아이를 무시하고 있다고도 해석될 수 있다. 결국 힘이 있는 성인의 권리만 우선시 된다면 힘이 없는 아이의 권리는 무시되고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각박한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무시당한 아이들은 성장해 또 다른 차별을 낳는다. 여전히 보호받아야 할 미래의 아이들에게 보호가 아닌 차별과 배제를 반복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흘러 성인에서 노인이 된 우리를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노시니어존'을 통해 배제할 것이다. '노키즈존'과 '노틴에이저존'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노시니어존'은 이미 예견된 우리의 미래이며, 어쩌면 또 다른 집단의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부분을 가장 우선시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차별과 금지가 아닌 공존을 통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에 적합한지도 고려해봐야 한다. 성인과는 달리 스스로 통제하는 힘이 부족한 아이에게 어긋난 행동 하나로 혼을 내는 게 우리 어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더불어, 아이들을 배려하는 시설 역시 부족해 불편을 겪고 있다는 목소리들은 우리가 아이들을 배려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면 얽히고설킨 실뭉치를 풀어낼 수 없다.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아동과 청소년의 특성을 이해하고, 혹여 민폐라고 판단되는 행동이 일어나더라도 인상을 찌푸리기보다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부모의 역할을 맡으면 된다. 통제하고 억압하기보다는 아이가 공동체에서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일깨워주고 이해해주면 좀 더 따뜻한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김나영 기자 piny6767@wku.ac.kr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