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이 봄이 오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어김이 없어 징글징글하게 치근덕거리던 추위도 어느새 멀어져 가고 있다. 사람들에게 계절의 변화와 같은 자연의 섭리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원리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자연이치에 빗대어 진리와 도덕과 예술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계절의 변화. 늙어간다는 것의 자연스러움과 시간의 불가역성에 따른 인간의 비애, 약육강식의 원리, 모성본능, 올라가면 떨어져야만 하는 중력의 법칙 등등. 예술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통칭해서 자연주의자라고 부른다. 물론 문학이나 연극, 회화 등 그 장르에 따라 자연주의자라 불린 사람들의 특질들은 달랐고 각 장르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는 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보다 정교해져 갔을 때, 그리고 이로 인해 기계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해 가면서 인간은 이런 자연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세상은 전혀 그런 순리에 따라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 저 대자연마저도 우리 눈에 쉽게 관찰되는 그런 현상들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의 첫 단계에 아마 광학의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렌즈의 발전은 빛을 과학적으로 규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빛이라고 하는, 세상이 우리 인간에게 인식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 더 나아가서 아예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개가 색맹이라는 사실이나 자외선과 적외선의 존재를 굳이 예로 들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의 섭리가 송두리째 거짓과 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인간은 젖어 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발상 속에서 예술가들은 모더니즘이라는 것을 탄생시켰다. 모더니즘은 자연주의에 대한 의문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모더니즘은 자연스러운 깨우침, 인간 삶의 자연스러운 경험으로는 다다르기 힘든 인식, 즉, 지적인 노력과 전복적인 사고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는 교육과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평생을 문맹으로 농사를 짓던 농부가 자연스럽게 깨우치던 인생의 진리와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여기서 그런 깨우침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깨우침만으로 인생이 행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만으로 인류가 공통된 행복한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그런 깨우침만으로 견디기에는 너무나 다른 것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제 다시 그런 깨우침의 중요성을 우리는 새삼 느끼고 그리워하고 있지만, 모더니즘적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그런 깨우침을 유지해 나가기에는 너무나 벅찬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는 격랑과 과도기로 말해질 수 있는 모더니즘의 홍역을 앓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다시 깨우침과 섭리를 이야기 할 수 있게 되고 그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파계해 본 경험이 있는 스님처럼 말이다. 영화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고 대응이다. 영화가 늘 정확한 결론과, 사필귀정의 끝막음으로 자신의 맘을 편안하게 해 주어야만 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내가 너무 세상을 쉽게 이해하려 드는 것이 아닌가 한 번 생각해 보라. 세상에 우리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섭리는 없다.                

 권 병 철 (필름토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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