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露西亞란 1917년의 커다런 국내 혁명과 그 뒤를 니어 이러난 連 3개년의 戰慄할 만한 대기근, 또 한 가지 세계자본주의 국가의 경제봉쇄 등으로 인하야 비록 건설 途程에 올낫다 할지라도 국내의 모든 질서와 시설은 그의 常軌를 밟아 드듸기에는 너무도 요원한 장래를 말하고 잇섯다. 그러나 1917년에 그에게로부터 전수한 세계인의 커다런 경이와 충동은 그를 한편에 잇서 욕하고 질시하면서도 한편에 잇서는 그를 오즉 『신비의 나라』 『XX의 나라』로 일홈 지엇스며 그리하야 다혈질의 세계청년학도들은 입국수속의 준험한 곤란도 무릅쓰고 맛치 샘물줄기를 따르는 魚群들과 가치 북쪽나라 露西亞를 향하야 만흔 발길을 옴겨 노앗던 것이다.
 1932년,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중앙위원이었던 임원근(林元根)은 위와 같이 해외 망명의 첫 순간을 회고한다. 주지하다시피, 1920년대는 "세계의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이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사회주의 운동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통해 "전 지구적 지형에서 유토피아적 미래를 제기"한 이후의 시점이었다. 당시 신생국이었던 소련은 혁명의 성공 직후 "무병합·무배상의 강화(講和), 구 러시아 제국이 지배했던 모든 민족이 독립할 자유, 약탈했던 영토와 권익의 반환" 등을 제창함으로써 제국주의적 국제 정치의 흐름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었다. 나아가 소련은 1920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열에는 백색, 황색, 흑색 피부의 사람들, 전 지구의 노동자들이 형제와 같이 결합해 있다"는 코민테른의 규약을 발표함으로써, 인종·국가·지역·민족의 경계를 초월하는 수평적 연대의 형성을 선언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표명에 힘입어 소련은 당대 조선인들에 의해 "인류 구제의 빛!"으로 표상되었으며, 소련의 신생(新生)과 함께 펼쳐진 "아즉 새로운 세계의 큰 길거리"는 조선인들에게 있어서 제국주의·인종주의적 질서로 홈 패이고 얼룩진 기존 공간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연대의 형성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매끈한 공백과 같은 공간으로 인지되었다.
 이때 기존 경계나 위계가 사라진 이러한 공백에 대한 매혹은, 조선인들로 하여금 "샘물줄기를 따르는 魚群들과 가치" 바다를 건너 해외에 구축된 혁명 거점들을 향해 나아가게끔 하는 근간이 되었다. 가령 1930년에 발표된 심훈의 『동방의 애인』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넓은 무대를 찾자! 우리가 마음껏 소리 지르고 한껏 뛰어 볼 곳으로 나가자!"
 하고 부르짖은 것은, 서대문 감옥문을 나서자 무악재를 넘는 시뻘건 태양 밑에서 두 동지가 굳은 악수로 맹세한 말이었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정의의 심장이 뛰놀고 새로운 희망은 그들의 혈관 속에서 청춘의 피를 끓였다.
 …간신히 노자만 변통해 가지고 그믐밤에 안동현에서 중국인의 목선(木船)을 타고 아흐레 만에 황해(黃海)를 건너니 상해(上海)는 동녘 나라의 젊은 투사들을 물결 거친 황포탄(黃浦灘)에 맞아들였던 것이다.
 기미년 시위운동에 동참한 끝에 제국 순사에게 포박당해 "일 년이 넘는 형기"를 마쳐야 했던 위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와 같은 치외법권·다국적의 혁명 거점은 핏줄·민족·제국주의적 질서로 얽힌 고국의 "조그만 보금자리"를 벗어나, "같은 계급에 처한 남녀노소"가 새로이 공통된 연대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너른 세계"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이 땅의 어둠을 헤쳐 볼 새로운 서광"을 추구하고자 고향을 떠나 해외로 나아갔던 사회주의자들의 여정은 들뢰즈·가타리가 논의했던 바, "(부당한) 법이 지배하는 홈 패인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기존 법질서의 둑을 무너뜨리고, 평평해진 대지 위에 이데올로기의 흐름들을 다시금 방출하고자 하는 "매끈한 공간"을 향한 과정으로 독해되기도 한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이들은 제국주의적 억압에 짓눌려 "한 몸뚱이조차 의지할 곳이 바이없던 조선놈"으로부터 "전 세계 무산대중과 약소민족의 동지"로 전환되는 과정을 선보이고 있거니와, "'동포'니 '형제자매'니 하는" 그간의 협소했던 혈연·민족의식을 떠나 "피차에 '동지'"로 나아가고자 했던 이들의 "새로운 길"이란 인종·국가·민족·계급의 수직적 위계를 무너뜨리고 이데올로기적 흐름들의 연합을 형성하기 위한 횡단운동이라는 측면에서, 들뢰즈·가타리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홈 패인 공간(espace stri)"은 국가를 비롯한 사회 구성체들의 지배 및 통제에 의거하여 형성되는 것으로, 인구·사상·자본 등 세계 공간을 가로지르는 흐름의 총체를 포획하여 계량하고 위계화함으로써 "법이 지배하는 지대"로 재구성하는 과정에 의해 생성된다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지배가 미치고 있는 공간에 홈을 파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임무 중 하나이며, "국가의 응수를 넘어서려는 모든 위협에 맞서 국가는 공간에 홈을 파는 것"으로, 즉 폐쇄적 구조와 분극화된 경계, 정형화된 형태에 입각한 법질서를 부과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반면 매끈한 공간(espace lisse)은 정확한 구분선이나 조직화된 형식, 소유의 규제가 없는 바다나 사막과 같은 곳을 의미한다. 매끈한 공간의 경우 일정한 위치나 척도가 설정되어 있지 않으며, "정박도, 분극화도, 덧없는 자국도 없는 흐르는 공간"으로서 "모든 것이 모든 방향으로 모든 것과 연결될 수 있는 무한한 유연성"을 지닌 채, "(국가장치가 파놓은 홈의) 양쪽 둑을 갉아내는" "출발점도 끝도 없는 흐름"으로 표상된다.
 들뢰즈·가타리의 관점에 따르자면 역사란 홈 패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 간의 지속적인 경합의 과정인데,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의 투쟁 또한 제국주의에 의해 포획되어 홈 패인 공간으로 조직된 근대 이후의 지형을 노동자·피억압 민중들의 수평적 결연에 의거하여 다시금 매끈한 공간으로 융해(融解)하고자 했던 전 지구적 경합의 일종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너른 바다"로 표상되는 매끈한 공간성을 성취하고자 했던 식민지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은, 식민지 말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제국의 두터운 '홈'에 직면한 이후에도 문화적 융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눈길을 끈다. 식민지 말기는 총력전 체제의 강화 및 동아봉쇄주의로 인해 사회주의 투사들 대부분이 "구금되었거나 운동을 정지하고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 놓였으며, 이로 인해 해외 혁명 거점들로부터 단절되어 "절해고도(絶海孤島)"와 같은 위치에 놓인 사회주의자들에게 제국이 보낸 '전향'의 메시지가 도착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설야 등 식민지 말기 사회주의자들은 좌절의 위기에 직면한 사상적 전망을 "살려 나가기" 위해 문학작품 속에 "바다"라는 매끈한 공간의 표상을 동원하며, 이를 통해 여전히 "투쟁"의 흐름 속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고자 하는 면모를 보인다. 『마음의 향촌』 등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이러한 문학적 상상들은 비록 실현 불가능한 층위에 머무른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 당대 정치지리적 경계 너머로 나아가기 위한 문화적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시대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하신애 교수(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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