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기(韓彰璂, 1936년~1997년)는 우리 시대의 문화인, 출판언론인, 국어학자, 에세이스트, 그리고 우리말의 올바른 사용법과 의식을 앞장서 이끌고 바꾼 일꾼이었다. 그이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고읍리에서 태어나 1954년 순천중학교를 졸업했다. 1957년 광주고를 거쳐 1961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혼자 중학교 시절부터 미군 단파 방송을 청취하며 익힌 빼어난 영어 구사 능력을 발판으로 삼아 1968년 1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한국지사인 한국브리태니커회사를 세웠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현대적인 세일즈 기법을 들여와 마케팅에서 혁신을 일으켰다. 그이의 업적 중에서 으뜸으로 꼽을 만한 것은 1976년 3월,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를 앞세운 월간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한 점이다. 이 잡지가 1980년 8월 계급의식과 사회 불안을 조성한다는 트집을 잡아 신군부 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되자, 그이는 다시 1984년 다시 '샘이깊은물'을 내놓았다. 그이가 권력의 누름과 윽박지름에도 불구하고 주눅이 들지 않고 펴낸 월간지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은 한국의 잡지사에서 큰 혁신을 이루었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 우리나라 월간지들이 다들 국판으로 획일화되어 있을 때 46배판으로 크기를 키우고, 레이아웃을 바꾸는데 아트디렉터라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데 앞장선다. 그것도 다른 잡지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혁신이었다. 잡지 발행부수가 최고에 이르렀을 때 7만 부를 넘어섰을 정도로 독자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두 월간지는 이 땅의 사회정치적 올바름에 앞장서며 지식인 사회에 돌풍을 일으킨 1960년대의 '사상계'나 '씨알의소리' 등의 정신을 이어받아 사회 변화의 혁신을 일구는 불꽃이 되고자 했다. 그이는 일찍이 그 빼어난 안목으로 우리말과 글·옷·한옥·문화상품의 가치를 새롭게 알아내고 그걸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데 그이가 펴낸 두 잡지를 발판으로 삼았다. 두 월간지가 특별했던 것은 전에 없던 방식으로 한글의 꼴과 쓰임을 다시 디자인 했다는 점이다. 그이는 우리 토박이말이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말에 눌리고 해방 뒤에는 미군과 함께 들어온 영어로 덧칠된 채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차츰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 나라의 토박이말은 곧 그 나라의 얼이니 그게 올바르지 않은 방식으로 쓰이는 것은 그 얼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그이는 '철공소'가 되어버린 '대장간', '식당'이나 '레스토랑'이 되어버린 '밥집', '양조장'이 되어버린 '술도가', '서점'이 되어버린 '책방', '정종'이 되어버린 '청주' 등에 맞서 그걸 제 자리로 돌려놓는 일에 앞장섰다. 그것말고도 판소리 음반과 칠첩반상기 제작,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 11권과 '민중 자서전' 20권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한국의 토박이 문화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데 앞장선 점도 그이의 안목과 부지런한 실천이 일군 업적이다.    

  한창기의 사람됨 이모저모를 조금 더 소개해보자. 서울에서 '양복'을 가장 잘 짓기로 소문난 집에서 지은 옷이 500벌은 넘는데도 그 옷집에다 맞춤 양복을 주문하기가 무섭게 '입을 옷이 없다'고 빨리 옷 지어내라고 재촉하던 사람, 제대로 지어 입은 한복은 높이 쳤지만 개량 한복이라고 불리는 계통 불명으로 그 맵시가 떨어지는 옷을 미워하고 멸시한 사람, 대놓고 누구를 가르친 적은 없지만 많은 사람이 그이를 흠모하는 마음이 넘쳐나 스스로 따르고 배워 제자임을 자랑스럽게 발설하게 한 사람, 한글학자가 아니면서 한글학자보다 더 한글에 애착을 갖고 그 가능성을 믿었던 사람, 디자이너가 아니면서 디자이너보다 더 맵고 짠 디자인에 대한 눈썰미와 철학을 지닌 사람, 쓸데없는 장식과 군더더기를 혐오하고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의 품격을 높이 산 사람,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그 아름다움을 따르고 지키려는 노력을 많이 하면서도 남이 하지 않을 일들을 처음으로 시도하고 그것의 쓸모 있음을 기어코 증명해보인 사람, 큰일에는 대범하고 작은 것에는 엄격해서 인쇄물로 박힌 작은 실수에 분을 참지 못하고 "다 총살시켜버리겠다 !" 하고 호통치던 사람, 그 사람이 한창기다.  

  한창기를 수식하는 말은 여러 가지다. 직판 세일즈맨 1세대를 키워낸 교육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창의적인 출판 언론인, 한 세대를 앞서간 의식과 뛰어난 자기 논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을 가진 드문 문화비평가, 눈썰미가 빼어난 문화재 수집가, 한국 전통음악을 살리는 데 힘을 보탠 사람, 한복과 한옥을 아끼고 사랑한 사람, 국어학자를 울린 재야 국어학자, 그 사람이 바로 한창기다. 모든 사람이 먹고사는 일, 혹은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일에 제 몸을 던질 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먹고 잘 사느냐를 고민한 사람이 한창기다. 그이는 여러 사업을 훌륭하게 일궈 큰돈을 벌었지만 그 돈을 제 한 몸과 그에 딸린 피붙이들이 호의호식하는 데 쓰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찾는 데 아낌없이 썼다.    

  한창기가 그 방법적 도구로 찾아낸 게 월간지를 만드는 일이다. 월간지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을 내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분별이 또렷했던 사람이 한창기다. 그이는 잡지쟁이들이 '와리스께'라고 부르던, 우리 잡지 편집의 틀과 내용을 바꿔놓은 사람이다. 우리 잡지 편집의 역사는 한창기 이전과 이후로 뚜렷하게 나뉜다. 잡지의 체제와 판형, 그리고 '와리스께'를 뒤집어놓고 그 속의 고갱이와 표현방식도 바꾸었다. 우리 토박이말 들을 찾아내 쓰는 데 앞장서고, 애써 자연스러운 한글 문장의 본을 따른 사람답게 품격이 떨어지고 거친 한글 문장을 끔찍하게 여겼다. 그래서 제 잡지에 글을 내는 이들의 비틀리고 눌린 문장들을 바로 펴고 세워 내보냈다. 거기에 따르지 않는 이들의 글은 그 대가만 치르고 잡지에 내보내지 않았다. 그이는 우리 잡지들이 금과옥조처럼 섬기던 여러 관행을 버리고 새로움을 궁리했는데, 새것을 무조건 숭상하는 습성 때문이 아니다. 그이는 잡지 만드는 사람들이 떠받들던 옛 관행을 과감히 다 버렸다. 옛것이 시효를 지나 낡아지고 현실에서 쓸모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이 요구하는 혁신의 불쏘시개가 되지 못할뿐더러 그 오래된 것의 굳건한 보수성으로 새 기운을 누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참말을 하자면, 그이는 오히려 새것보다 낡고 묵은 옛것을 더 섬기는 사람이다. 옛것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두루 꿰뚫어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살려내고 빛낼 방법을 찾는 일에 열중하고, 그것들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도록 말로만이 아니라 몸의 실천으로 도왔다. 그이는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인 전통 옹기, 유기 칠첩반상기, 징광잎차, 판소리 등을 되살려내는 데 제 돈과 시간과 힘을 보탰다.  

  한창기가 죽은 뒤 그이의 이른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2007년 9월, 그이가 그동안 써서 발표한 글들을 모아 단행본 「뿌리깊은 나무의 생각」, 「샘이깊은물의 생각」, 「배움나무의 생각」을 내놓았다. 그 이듬해인 2008년 2월에는 잡지 형식의 추모집 '특집! 한창기'가 나왔다. 한창기의 사람됨과 그이의 업적이 얼마나 빼어난 것인가를 알려면 '특집! 한창기'(창비 간)라는 책을 반드시 봐야 할 것이다. 강운구를 비롯한 쉰아홉 사람이 모여서 그들의 기억에 남은 한창기를 불러낸다. 저마다 한창기를 만난 때와 사정이 다르니 그이에 대한 기억이나 평가도 제각각이다. 더러는 그이와 함께 한 사무실에서 일했고, 더러는 태어나 산 시대가 달라 이승에서 아무 인연이 없던 사람도 있다. 쉰아홉 명이 밥 벌어먹는 방식과 생각하는 바는 크게 달라도 한 가지로 닮은 생각은 그이의 부재를 애통해하고, 이마적에 새삼 그리운 사람으로 그이를 떠올린다는 점이다. 그중 일부를 뽑아서 보자. "근엄한 영국 신사 이미지였던 한창기 사장은 뜻밖에도 유머 감각이 풍부한 사람이었다."(김당), "'뿌리깊은나무'와 '한창기'는 한국 현대성의 랜드마크다."(선완규), "세일즈맨의 '전설'이었기 때문에 눈앞의 실리만 취하는 사람인 줄로만 알기 쉽지만 꿈이 많은 이상주의자이며, 단순한 것을 좋아하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사람이다."(강운구),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줏대 있는 열린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이명현), "그 자유분방함, 오만한 자신감, 파격적인 발상, 터무니없이 핏대를 올리며 펴는 자기주장, 좀처럼 굽히지 않는 고집, 해박한 지식, 궤변에 달변, 다방면에 걸친 집요한 관심, 인정머리 없는 태도, 영악한 이기심 들이 정말 싫었다. 어떤 문제를 제기해도 늘 준비되어 있는 것 같은 막힘없음도 그랬다. 그를 별난 세계의 별난 사람쯤으로 치는 것이 편했다."(강창민), "그에 대해 허물을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막상 허물이라 해보았자 총각 홀아비로 늙는 것에 대한 수군거림, 아니면 그에게 골동을 팔고 값을 더 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차지 않아 나오는 뒷소리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수군거림, 뒷소리도 허물은 허물이라 치더라도 한창기는 단연 시대의 전위에 섰던 인물이다."(김형국) 쉰아홉 사람은 그이와 이러저러한 인연을 맺은 사람이고, 그이의 사람됨에 감화되었거나 그이의 얼과 뜻을 높이 사고 따르는데 부지런을 떨던 사람들이다. 한창기를 그리는 쉰아홉 개의 인연의 특별했음과 주관적으로 해석됨을 강조하는 이 작은 그림들을 꿰어 맞춰 보면 그이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 볼 수 있다.    

  한창기는 세월이 더 흐르면 잊힐 사람이 아니라 더 크게 자라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될 사람이다. 그만큼 그이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이의 생각은 당대에 함께 산 사람들보다 적어도 한 세대는 앞서갔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생각조차 너무 앞서 있어 아무도 따라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시대에 그 앞선 생각들을 고스란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그이의 실천으로 처진 시대를 따라오던 사람들의 생각은 크게 바뀌었고, 그 힘이 미친 현실의 여러 부면도 따라서 바뀌었다. 그러니까 한창기는 문화의 변화와 혁신을 이끈 선구자였던 셈이다. 넉넉한 관용의 정신과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품고 끌어안으며 혼자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일의 사무침과 보람을 찾고 묻는 일에 평생을 바친 이 '전라도' 사람 한창기는 1936년 전라남도 보성의 '고읍 촌놈'으로 나서 한반도 휴전선 이남에서 약동하는 삶을 살다가 1997년 2월 3일 저녁에 서울 강남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석주(시인·인문학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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