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망했기 때문일까?  우리는 백제를 '잃어버린 왕국'이라고 부른다. 백제는 수도를 '위례성(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또다시 '사비(부여)'로 계속 이동하면서 국력이 쇠약해져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심지어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던 '의자왕의 삼천궁녀'의 야사가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보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 먼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백제의 연고지를 우리대학이 자리 잡고 있는 전라도와 충청도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백제 역사는 한반도 중심지역인 한강의 위례성(한성)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이때가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근초고왕' 시절로 고구려, 신라보다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일궈낸 영광의 역사였다. 
 현재 도심이 자리 잡고 있는 서울 송파구의 석촌동에 '한국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백제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 '돌무지무덤'이 있다. 특히 이 무덤은 한 변의 길이가 50m에 이르는 한반도 최대크기로, 현재는 5기만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이 중 3호분의 크기가 실로 놀라울 정도로 규모가 엄청나, 학계에서는 이 무덤을 근초고왕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일본의 국보가 돼버린 '칠지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철제칼, 역시 당시 백제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다. 『안목의 성장』의 저자로도 알려진 이내옥 씨는 칠지도가 보관된 일본의 신궁에 찾아가 궁사에게 "칠지도를 한국에 전시하자"고 요청했지만, 궁사는 "칠지도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며, "신을 어떻게 옮길 수 있나?"라고 말한 일화도 있다. 그리고 칠지도의 앞뒤에는 글자가 적혀 있는데, 앞면에는 '백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것과 뒷면에는 '예로부터 이와 같은 칼이 없었다.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고 표기돼 있다. 이 글자는 당시 백제의 자신감과 함께, 무기 제작의 기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잘 나가던 백제는 5세기 경 고구려 남하에 의해 금이 가기 시작했고, 결국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백제는 무령왕의 등장으로 혼란스런 분위기를 수습하게 된다. 한편 무령왕의 고향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가카라시마'라는 일본의 사가현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현재 우리나라와 일본의 유쾌하지 못한 관계를 생각한다면,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이 백제왕이 됐다는 것이 마뜩지 않지만, 그 당시 백제와 일본의 긴밀한 관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다. 특히 일본은 백제가 멸망당하기 전, 백제를 지키기 위해 대규모 파병을 강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백제가 당시 글로벌한 나라임을 반증해주는 대목이다.
 이어 백제는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긴 후 문화의 화룡점정을 찍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대학의 연고지인 익산의 백제 관련 유적이다. 지금까지 익산에서의 백제 역사는 감춰져 있었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왕궁리 발굴 작업을 통해 새로운 백제 수도의 역사가 수면위에 떠오르고 있다.
 특히 익산 왕궁리 유적지에서는 한반도 최초의 화장실인 '수세식 공중화장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정원', '공방 터', '지하 배수 시설' 등이 차례대로 나타났고, 당시 조사원들은 백제의 높은 문화적 수준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알려진다.

 찬란했던 문화강국 백제의 역사는 고구려 신라에 비해, 현재까지도 베일에 감싸져 있다. 또한 백제의 역사는 패전국의 오명으로 왜곡돼 왔다. 이러한 백제의 역사는 현재 냉전 체제의 동아시아 상황에 대한 돌파구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비스마르크의 '지혜로운 자는 역사에서 배운다'는 말처럼, 우리도 익산의 백제 역사와 문화에 대해 새롭게 바로 보는 것이 어떨까? 우선은 백제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과 온전한 이해가 이뤄져야 한다. 

                 윤진형 기자 kiss7417@w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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