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 덕선은 1988년 9월 17일 열린 서울올림픽 개회식에 참가한다. 온 마을이 덕선을 자랑스러워했고. 올림픽을 신랄하게 반대하던 보라마저 동생을 자랑스러워했다. 당시 한국 사회를 살아가던 이들은 경제적 성장과 민주화로 인한 자신감과 장밋빛 희망을 저마다 품었다. 우리 대학 출신의 소설가 윤흥길의 1989년 작 <말로만 중산층>에서, 주인공의 아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누가 감히 거꾸로 돌려요? 지엔피가 올라가고 생활수준이 날로 향상되는 우리 앞날을 누가 가로막아요?" 라며, 아직은 자동차를 살 때가 아니라는 주인공에게 발전과 성장에의 자신감을 피력했다. 올림픽은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가난에 허덕이던 국가가 이뤄낸 경제적 발전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무대였고, 이를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열망의 분출구였던 것이다.
 또한 올림픽은 우리 사회가 아시아를 만나는 계기였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으로 갈라진 동북아시아 대부분의 땅은 금단의 영토였다. 서울올림픽 전까지, 김포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소련과 중공(당시에는 이렇게 불렀다)의 하늘을 날 수 없었다. 비행기는 일본 하늘을 지나 북태평양을 건너, 알래스카에 잠시 머문 뒤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크로 향해야만 했었다. 서울올림픽은 그런 동북아시아의 빗장을 열어젖혔다. 서울올림픽에는 중국과 러시아의 선수들이 참가했고, 이듬해에는 중국과 소련의 동포들이 '세계한민족체육대회'에 참가했다. 아시아의 많은 이들이 한국을 달리 보았고,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여 경제적으로 성공해보려는 '코리안드림'을 꿈꾸는 아시아인들이 한국을 찾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분명 이전보다 잘 살게 되었지만, 자신처럼 성공하지 못한 이들을 돌볼 마음은 없었다. 성장과 발전을 향해 앞만 보고 뛰었던 사람들은, 비록 가난하고 어렵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연대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중공과 소련의 우리 민족 동포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는 뜨겁게 환영했지만, 이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자 우리 사회는 이들을 중국과 러시아에서 온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라 불렀다.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 사회는 아시아를 만났지만, 아시아가 우리보다 가난하다는 사실에 이들로부터 등을 돌려 버렸다.
 이것은 1988 서울올림픽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인들에게 도쿄올림픽이란 자신들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이벤트였다. 패전 이후 가망이 없어 보였던 경제를 얼마나 빠르게 되살려냈는지를, 또한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얼마나 그럴듯하게 복구했는지를, 올림픽을 통해 보여준 일본은 화려하게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이듬해엔 한국의 외교관계도 수립했다. 그렇게 일본은 아시아를 만났고, 자신보다 경제적으로 아래에 있는 아시아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발전과 성장에의 욕망을 지닌 채 만난 아시아는 무시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2008년 베이징에서 열린 올림픽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올림픽이 만든 세계에 산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중산층이 되어 아파트 한 채와 자가용 한 대 정도는 갖고 살기 원한다. 중국과 러시아 하늘을 지나 유럽을 방문하거나 아시아의 어느 해변에서 휴가를 즐길 수 있는 삶을 원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우리는 우리 곁에 다가 온 수많은 아시아인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필자는 지난 추석 당일 밤 원광대 캠퍼스를 벗어나 익산역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시아에서 온 젊은이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추석을 보냈을까? 이들 중에는 영덕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태국인 노동자들의 친구가 있진 않았을까? 아시아인들은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 사회는 그들과 대화하지 않는다. 혹시나 하여 대합실 대형TV에 눈을 돌렸지만, 타국에서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들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박해남 교수(한중관계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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