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 비평계에 한때 적잖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근대문학의 종언"론은 무엇보다도 소설(정확히 말하면 근대 장편소설)의 운명에 관한 담론이었다. 그런데 근대소설은 가라타니의 말처럼 '네이션'을 형성하는 강력한 매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네이션을 구성하면서도 네이션의 지평을 초과하는 힘을 지닌 특권적인 문학 형식으로 여겨져 왔다. 영국의 소설가 로런스(D. H. Lawrence)가 "갈릴레오의 망원경보다 훨씬 위대한 발견"이라고 했던 그 소설은, 그래서 '위대한'이라는 관형어가 크게 어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가라타니의 '종언'론도 본질적으로는 소설에 내속된 힘의 '위대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으로서, 만물이 상품화된 '절대자본주의' 시대에 그 '위대성'이 속절없이 사라짐에 대한 애도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이 발표되기 약 90년 전에 헝가리의 사상가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acs)가 집필한 『소설의 이론』(1916)은, 소설의 불가피한 탄생과 힘을 증언하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소설의 종언을 갈망하는 또 다른 판본의 '종언' 선언이었다. 그것은 절정에 도달한 세계자본주의의 힘에 압도되어 기꺼이 혹은 무력하게 몸을 파는 처지로 전락한 문학의 현황에 대한 개탄과 탄식이 배어있는 가라타니의 '종언'론과는 달리 자본주의적 근대를 뒤로 할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상을 동경하는 가운데, 소설을 발생·발전시켰던 근대의 종언을 선언하고 그럼으로써 새 시대의 도래를 촉구하는, 파국적이자 유토피아적인 종말론적 영감으로 고취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소설의 이론』은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책을 펼쳤다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 나열된 데 질려 책장을 덮고만 독자들마저도 이 첫 문장은 즐겨 인용하곤 하는데, 우리는 바로 이 한 문장에서 『소설의 이론』이 악명 높은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성'을 지닌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텍스트의 시적 성격이라면, 다른 하나는 텍스트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동경의 정조이다.
 호메로스 서사시를 규정하는 역사철학적 상황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기능을 하는 이 첫 문장은, 자연과 인간이 조응하고 세계와 나, 나와 너가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동질적 원환(圓環)을 이루었던 시대에 대한 서술이 이어지는 도입부로 손색이 없다. 동시에, 그러한 시대에 대한 청년 루카치의 동경을, 어떤 식으로든 상실을 앓고 있는 현대의 독자들도 같이 느낄 수 있게 하는 매력을 지닌 문장이다. 하지만 저자의 동경은 과거로의 회귀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는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 회귀는 불가능한 일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그리스인들이 그 속에서 형이상학적으로 살고 있는 원은 우리 것보다 더 작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그 원 속에 우리 자신을 생생히 옮겨 넣을 수가 없다"). 『소설의 이론』에서 동경은 호메로스의 세계라는 절대적 과거를 우회하여 미래로 향한다. 텍스트의 대미는 "영혼에서 영혼으로 이어지는 (…) 길들"로 이루어진 "영혼현실"에 대한 동경, 호메로스의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원환적(圓環的) 총체성"의 구축을 가능케 하는 새 시대에 대한 기대로 채워져 있다.
 우리의 세계, 우리의 현실인 근대는 그 사이에, 즉 향수의 대상으로서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간 '황금시대'와 그 도래가 갈망되는 새로운 시대 사이에, 그 성질에 따라서 보자면 양극으로부터 가장 먼 지점에 놓여 있다. 동경의 주체인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는 그 내실에 있어 이러한 동경이 추구하는 시대상과 정확히 반립적인 양상을 띤 역사철학적 시대로 자리매김된다. 이렇게 『소설의 이론』에서 근대는 한마디로 균열의 세계, 소외의 시대로 그려지며, 피히테(J. G. Fichte)의 말을 빌려 "죄업이 완성된 시대"로 규정된다.
 루카치에 따르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이 대상적 자명성을 띠고 가시화되었던 호메로스의 세계와는 달리, 근대는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시대이다. "칸트의 별이 총총한 하늘은 순수인식의 어두운 밤에만 빛날 뿐", 근대적 인간인 "고독한 방랑자 (…) 어느 누구에게도 그가 가는 오솔길을 더 이상 밝혀주지 않는다."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 전에 썼던 일련의 에세이들을 규정했던 주도적 물음, 즉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 수 있고 또 살아야만 하는가?"라는 물음 역시 이러한 시대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루카치의 이른바 "에세이 시기"(1908~11)의 대표작 『영혼과 형식』(1910/11)에서 이 물음은, 근대 내에서 가능한 대안적 삶의 모색을 낳았다. 여기에서는 근대 너머의 세계에 대한 기획 가능성은 부인되며, 근대의 조건 내에서 개인 차원에서 근대적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실존적 구상이 여러 매질을 통해 실험되고 있다. 하지만 1916년에 학술지인 『미학과 일반예술학지(誌)』에 처음 발표된 『소설의 이론』에서는 동일한 물음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대답이 모색된다. '역사'가 본격적으로 사유되면서 근대는 역사적인 체제로 파악되고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한 탐색이 시작된 것이다.
 『소설의 이론』은 소설에 관한 미학적 담론으로서는 진작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1930년대 이후의 루카치에 대해서는 지성의 타락의 한 표본을 대하듯이 혹평해 마지않았던 아도르노(Th. W. Adorno)마저도 이 책을 두고는 "구상의 깊이와 활력을 통해, 서술의 비범한 밀도와 강도를 통해 철학적 미학의 한 척도를 세웠다"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다소 과장된 그의 평가가 전혀 그릇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은 이 책의 영향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세기 서양에서 제시된 몇 가지 소설 담론만 보더라도, 마르쿠제(H. Marcuse)와 골드만(L. Goldmann)의 소설론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확인할 수 있으며, 벤야민(W. Benjamin)과 아도르노(Th. W. Adorno)의 소설관이나 바흐친(M. M. Bakhtin)의 소설론에서도 『소설의 이론』의 사유를 수용하거나 그것과 대결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1930년대 이래 루카치가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한 '마르크스주의' 소설론에는 『소설의 이론』을 '지양'한 것으로 볼 수 있음 직한 측면들이 있다. 여기에다가 프랑코 모레티(F. Moretti)가 시도하는 '세계문학론'까지 놓고 보면, 소설론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경향 중 한 경향, 즉 형식과 역사의 내재적 관계를 중심에 놓고 사유하는 소설론 내지 소설관들의 전개 과정에서 『소설의 이론』은 이론적 영감의 한 원천으로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소설의 이론』에서 루카치가 서사시 및 소설을 위시한 서사문학의 형식들을 탐구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서사문학의 장르론이나 소설사를 집필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청년기 미학 『하이델베르크 예술철학(1912~1914)』에서 루카치는 "진정한 경전적 작품들의 역사적·초(超)역사적인 본질적 특성"을 인식하고 그것들에서 "한 단계, 한 시대의 역사철학적 의미"를 간파해 내는 것을 과제로 하는 "예술의 역사철학자"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는데, 『소설의 이론』 전반에 걸쳐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이와 유사한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유럽의 정체, 유럽의 근대성을 유럽의 역사 속에서 파악하고, 현재의 역사적 순간에 가능하고 필연적인 삶의 좌표와 방향("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을 찾는 데 그의 관심의 초점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그가 택한 매체는 "대(大)서사문학"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대서사문학은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초험적 근거에 있어서 경험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대서사문학은 역사적 순간의 경험에 결부된 형식"이기 때문에 역사를 역사철학적으로 조감하는 매체로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소설의 이론』을 체계적인 소설론이나 본격적인 소설사의 차원에서 읽는 것은 루카치가 원래 설정했던 목표를 중시하지 않는, 별로 생산적이지 못한 독서방식이 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 수 있고 또 살아야만 하는가?"라는, 그의 "에세이 시기" 전체를 규정했던, 하지만 체계적인 미학을 집필하면서 잠시 억제되었던 문제의식이 1차 대전의 발발로 다시 전면에 부상한 국면에서 쓰인 "(한 편의) 긴 에세이"였다.
 이렇게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을 찾고자 하는 절박한 문제의식에 강하게 규정되어 있는 것이 『소설의 이론』이긴 하지만, 『소설의 이론』은 '소설론'으로서도 충분히 고전으로서의 자격이 있는 작품이다. 예술형식과 결부된 총체성 범주, 소설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추상성, 이러한 추상성에서 비롯되는 위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소설이 견지해야하는 세계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 소설 고유의 과정적 성격, "문제적 개인"으로서의 소설 주인공, 소설 주인공의 심리와 연관된 "마성", 소설의 형식원리로서의 반어(反語, Ironie), 소설에서 시간이 갖는 새로운 기능, 소설에서 "위대한 순간"이 갖는 의미 등등에 관한, 『소설의 이론』 이후 개진된 수많은 소설론에서 거듭 재론되는 선구적인 통찰과 인식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설이 근대의 대표적 장르로 부상하는 현상을 근거 지우는 데 성공한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도 이 책이 '소설론'으로서 거둔 성취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미셸 푸코(M. Foucault)의 표현을 빌자면 『소설의 이론』의 루카치는 마르크스나 프로이트 같은 "담론성의 창설자"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 속에서 다른 저자들과 다른 책들이 각기 자리 잡게 될 이론, 전통, 연구 분야의 저자"로서 "'관(貫)담론적'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삶에서 소설이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갖지 않게 되는 상황이 전면화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소설에 관한 사유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소설의 이론』은 어떤 식으로든 참조될 수밖에 없는 책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김경식(자유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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