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문점을 찾은 우리들은 자유의 집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올해 6월 30일, 우리나라 문재인 대통령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까지 세 정상 간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남북미 정상의 회동 장소는 우리민족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이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전쟁 발발 이후 만 69년 만에 처음 북한 땅을 밟는 미국의 현직 대통령으로 전 세계가 기억할 만큼 큰 사건이었다.
 세 정상 간 만남의 자리인 '판문점'은 남북미 정상회담으로 인해, 전 세계 사람들에게 관심 및 호기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그동안 분단과 관련된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자주 등장했던 판문점은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까지 인기 있는 여행 관광지로 뽑히기도 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면 누구나 한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판문점. <원대신문>에서는 지난 21일 우리대학 이재봉 교수(정치외교학, 평화학)가 통일부의 지원을 받아 추진하고 있는 '통일특강 현장학습'에 취재차 다녀왔다. 교양강좌 '명사초청 통일대담'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남북 분단의 현장을 직접 살펴보면서 평화와 통일을 함께 고민하자는 취지로 '판문점'과 우리나라의 유일한 비무장지대 내에 위치한 '대성로 자유의 마을'이 주요 방문지였다.

▲ 판문점에 위치한 T2 회담장

북한과 마주보고 있는 곳
 지난 21일 오전 7시. 기자는 판문점이 위치한 파주로 출발하기 위해 이른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일어났다. 우리대학 재학생, 교수를 비롯해 일반 시민들까지 40여 명이 떠난 이번 답사는 긴 시간을 달려 오전 10시 30분쯤 통일대교에 도착했다. 창밖에는 군부대에서 보일 법한 철조망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고, 우리는 인원 한 명 한 명씩 신원 조회가 끝나서야 통일대교를 지날 수 있었다.
 오전 11시, 우리는 먼저 'JSA 안보견학관'에 들러 약 15분 분량의 판문점 홍보 영상을 시청하고, 다시 이동해 '자유의 집'에 도착했다. 자유의 집에 들어서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나가니, 뉴스에서 보이던 3채의 하늘색 건물과 그 뒤에 있던 판문각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판문점은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측엔 자유의 집과 평화의 집이, 북측엔 판문각과 통일각이 있다. 자유의 집과 판문각 사이에는 5개의 건물이 있는데, 그 중 T1(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T2(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 T3(군사정전위원회 소회의실) 3개동은 남북이 함께 사용하고 있다. T2 군사정위 본회의실은 관광객들에게 내부를 공개하고 있으며, 간혹 북한 경비병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들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T2와 T3 건물 사이로 판문각을 바라보자 지난해 4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나란히 군사분계선을 넘었던 역사적인 장면이 떠올라 눈앞에 아른거렸다.
 우리는 판문점 기념식수로 시선을 옮겼다. 기념식수인 소나무는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고 있다. 당시 남북 두 정상은 각각 한라산 흙과 백두산 흙을 뿌리고 한강 물과 대동강 물을 주며 평화를 기원했다. 식수 옆에 위치한 표지석에 새겨진 '평화와 번영을 심다'라는 문구는 우리대학 여태명 교수(서예문화예술학과)가 직접 쓴 것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특히 판문점에서는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수행원 없이 단둘이 걸으며 대화를 나눴던 '도보다리'가 가장 인기 있다고 한다. 기존의 다리를 증축해 관광객들이 더 안전하게 이용하고 있다. 다리 위를 걸으면서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감동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지난해 9월,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 공동경비구역 내에 완전한 비무장화를 합의해, 공동경비구역의 남북지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대한 조치를 하는 7개월 동안 판문점 관광을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5월에 재개함과 동시에 전보다 많은 관광객이 방문한다고 한다. 목포에서 시작해 서울과 개성,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1번 국도를 따라 돌아오면서 언젠가 이 도로를 통해 많은 사람이 남과 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대성동 자유의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 남북정상회담 기념 식수와 표지석

비무장지대 속 마을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 대해 들어 봤는가? 우리나라 측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DMZ)에는 엄격하게 출입이 금지된 민간인 통제구역을 넘어 단 하나뿐인 민간인 거주 마을이 있다. 이곳은 군사분계선과 약 400m 떨어진 곳으로,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에 위치한 곳이다.
 이런 곳에 마을이 조성된 이유가 무엇일까? 1950년, 한반도에 끔찍한 아픔을 준 6·25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을 통해 마무리됐다. 당시 '남북 비무장지대에 각각 1곳씩 마을을 둔다'는 규정에 따라, 대성동 마을은 1953년 8월 3일 북한의 '기정동 평화의 마을'과 함께 비무장지대에 조성됐다. 그리고 군사정전위원회는 대성동 마을을 '자유의 마을'이라고 불렀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 코앞에는 북한 인공기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인공기 뒤에는 뛰어가면 금방 닿을듯 한 북한의 기정동 평화의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실제로 이 두 마을의 거리는 800m 남짓으로, 지금은 언뜻 평화로워 보이지만 지난 66년 동안 뼈아픈 분단의 역사를 바로 앞에서 지켜봤기에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기정동 평화의 마을과는 오갈 수 없는 현실이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한편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는 총 46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 쌀과 콩, 고추 등 농사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여느 시골 마을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토지에 대한 경작권은 주어지지만, 소유권은 가질 수 없었다. 또한 마을 곳곳에는 군인들이 철통같은 경계 작전을 펼치고 있어서, 주민들의 24시간은 통제 속의 생활이었다. 매일 19시에는 인원 점검과 함께 24시부터 5시까지는 통행이 금지됐다. 또한 일반인들이 이 마을을 방문하는 것은 사전에 신청한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했고, 친척이나 직계 가족들만이 유엔사의 허락을 받아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9시부터 17시 30분까지, 정해진 시간에만 마을에 출입할 수 있었다. 심지어 마을 안에는 조그만 구멍가게조차 없었고, 장을 보기 위해서는 파주시 문산읍까지 나가야 했다. 그리고 급하게 몸이 아파 병원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육군 헬기를 타고 이동하는 등 주민들에게는 많은 불편함이 있었다.
 이런 불편함 탓일까? 대성동 자유의 마을의 주민들은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로부터 면제를 받고 있다. 그리고 혹여나 이를 악용할 수도 있어서, 정전협정 당시 거주했던 원주민들과 그 자손들만이 거주할 수 있었다. 또한 이를 충족한다고 하더라도 1년 중 8개월 이상을 자유의 마을에서 거주하지 않으면 주민권을 박탈 당하기도 한다. 또한 남성이 외지인 여성과 결혼한다면 주민으로 남을 수 있지만, 여성이 외지인 남성과 결혼한다면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마을의 특성 때문에 대성동 자유의 마을 사람들은 옆집의 숟가락 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족같이 지내 왔다.
 특히 이 많은 불편함 중 대성동 마을 주민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아침부터 새벽까지 들려오던 대남방송이었다. 그러나 2018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대남방송이 중단되며, 주민들에게는 점점 평화의 기운이 깃들기 시작했다. 대성동 마을의 주민인 장단면새마을협회장 전종삼 씨는 "주민들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없어서 통일이 되면 쫓겨나야 한다"고 현실을 대변하면서도 "대성동 마을 안에서 사는 것이 너무 불편하고, 규제가 많아서 통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하기도 했다.

▲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서 바라본 북한 인공기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현장으로
 66년 전, 정전협정으로 마무리한 남·북이 종전협정의 매듭을 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분단의 상징이었던 '판문점'과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 이제는 평화의 현장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전보다 낮아졌음을 우리의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4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 판문점 선언으로부터 1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판문점의 남측지역만 견학할 수 있고, 판문점의 북쪽 지역을 자유 왕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여전히 아쉬운 점이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남·북의 국기 게양대는 남·북이 한민족이었지만, 갈라져 살아온 분단국가임을 상기 시켜 주는 듯해 보였다. 우리는 언제까지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야 할까? 그러다 문득 버스 안에서 이재봉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남·북은 3년을 싸우고, 66년을 쉬었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곳, 세상 어디에 있는가? 이제는 종전협정이 맺어져야 한다"고.
 견학의 모든 일정을 마친 뒤 판문점과 대성동 자유의 마을을 뒤로하고, 돌아가는 길은 남과 북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 지난해 4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산책한 도보다리

임지환 기자 vaqreg@wku.ac.kr
윤진형 기자 kiss7417@wku.ac.kr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