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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신문 창간 63주년 기념 특집] <원대신문> 선배에게 듣는 "나 때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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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06  1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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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사지 동탑지 발굴사업 기사 '기획력 발군'

   
 

 나는 1973년 11기로 입사해 4학년까지 학생기자였다. 그 기간은 1972년 유신헌법 시대로 학생 데모가 일상사였으므로 대학마다 대학신문사 등 학생단체 관리와 감독이 학생처의 주 업무였던 때였다. 신문발행은 월간, 격주간, 순간(旬刊)을 모두 경험했다. 바른 주장을 펴고 사실을 그대로 전한다는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사시(社是)를 준수했다. 어떠한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필화사건(筆禍事件)을 일으키곤 했다. 소정의 연구논문 실적이 부족한 교수님들의 명단을 기사화해 해당 교수님들이 신문사로 쳐들어와 난리법석을 피운 적도 있었다. 대학의 역사와 함께 했다. 한국철학회 회장, 원광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한 철학자 전원배(田元培) 교수님의 일대기를 취재했다.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1974년에 시작한 익산미륵사지 동탑지(東塔地) 발굴사업을 기획기사로 2회에 걸쳐 게재함으로써 대학신문 기자로서 발군의 기획력과 취재력을 드러내었다. 신문은 전북일보사에서 발간했다. 최초의 컬러판은 내가 편집국장이던 시절의 172호로 기억된다. 광주의 전남매일신문사에서 찍었다.
 대학신문은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을 겸비해야 한다고 배웠다. 기사는 머리와 가슴이 아니라, 발로 뛰어야 가능하다고 배웠다.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 많이 읽고, 사고하고, 토론했다. 편집 날에는 짜장면으로 늦은 식사를 하고, 신문이 나오는 날에는 생맥주집에 모이고, 일 년 두 차례 정례 여행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졸업 후 노래방기계가 보급되기 시작할 즘 '원기회(圓記會)'회원이 됐다. 지금까지 매년 정기모임 외에 몇 차례의 애경사에서 선후배를 서로 만나고 있다. 기수별 모임은 별도이다.
 원광대학교 신문기자 경험은 내가 일반 신문사에 입사하고, 고교교사를 거쳐, 대학교수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대학교수 시절 보직(補職)을 맡으면서 각종 보고서 작성 책임자로, 기획, 평가 전문가로 행세가 가능했다. 난 지금도 기획하고, 취재하고, 광고문안 만들고, 편집하고, 토론, 커피, 맥주, 카드, 단체여행 등으로 바쁘고, 분주한 대학생 기자로 살아가고 있다. 대학신문기자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의식의 저 깊은 곳에서 여태 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해 온 무척 큰 꿈의 연속이었다.


  정종보(원대신문 11기)
군장대학교 교수, 산학협력단장, 교무처장 역임

 

 

 

화재 사건과 데모 대장의 추억

   
 

 먼저 축하부터 드려야겠다. 나의 추억은 신문사 불 내먹은 이야기부터 시작되는데 그때 겨울철 신문사 난방은 톱밥 난로가 해결해줬다. 확확 타올라 난로가 벌겋게 달아오르면 쫄쫄이 작업복으로 덜덜 떨고 다니던 나에게 배고픔도 잊어버리게 하는 그야말로 고마운 존재였다.
 입사 졸병인 나는 자연히 난로 당번이 됐고 톱밥이 덜 탔을 때는 물을 부어서, 불씨가 꺼졌다 하면 남은 톱밥을 뒤주통처럼 큰 톱밥통에 부어서 톱밥을 아껴 썼다. 그러다 어느 재수가 된통 없는 날 아직 불씨가 남은 줄도 모르고 톱밥을 처리해 버렸나 보다. 이제부터는 상상력에 맡기기로 하고, 이튿날 학보사에 가 보니 왠지 매캐한 후각 작용과 함께 실내 벽이 누르테테하고 서가 위에 쌓아놓은 신문 뭉치들이 거무스름하게 변했는데도 감이 쉬 오지 않은 나는 평소대로 내 자리에 앉았고 주필 하재창 교수님도 안경을 올렸다 내렸다 묵묵히 글만 쓰고 계셨다.
 이 희대의 학보사 불 내먹은 원인과 그 어마어마한 결과를 내가 안 것은 한참 후에서 였다. 몸 둘 바 모르는 쫄짜가 있는데 아무 책임도 묻지도 나무라지도 않고 오히려 주필님은 그 특유의 신나는 휘파람을 불며 나더러 너무 걱정할 것 없다고 위로하는 듯했다. 그렇게 그 하루가 가고 일 년 이년 세월이 갔다. 아니다,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기사화한 것 중에는 대학 측에서 발끈할 만한 거리도 많았는데 하 주필님은 피박 광박 다 쓰며 온몸으로 막아준 듯하다.
 인큐베이터에서 이렇게 숙성된 그때의 자부심은 컸다. 총학 정도야 우습게 봤을까 총학과 지면에서 전쟁을 치르다보니 적이 많다. 제대 군인 아저씨?들로 주축을 이룬 총학은 이를테면 학생자치회비 쯤이야 형님?들 마음먹은 대로 주물럭거렸다. 이런 것 저런 것들이 나름 파릇한 내 비위에 거슬렸던지 지면만 바뀌면 총학관련 MT기사를 긁어댔다. 이런 결과로 때론 그 형들이 떼뭉쳐 학보사에 몰려와 험악스럽게 공갈치고 돌아가곤 했었다.
 그때 군사 정부에 저항해 민주화 운동이 한참 분출하려 할 때 학보사 기자도 가만히 앉아 구경만 했겠는가. 나는 그때 구 약학관 건물 층계 밑 골방에서 칩거하는 신세로 나는 어느새 데모 대열에 합류해 데모 플래카드나 구호 등을 그 비밀의 방에서 생산해대고 있었다. 그 후 나는 학내 ROTC 단장으로부터 데모 대장이라는 별명을 받았고 익산시에서는 대학 측에 데모 원흉을 학내에 은폐시키고 데모를 주동한다고 따져들었다. 한때 익산경찰서장은 서장 백차에 나를 태워 이리역에서 고향으로 귀가 조치시키는 중이었는데 그때 동승한 정보과장은 난생 처음 타보는 경찰서장 백차 안에서 점잖게 한마디 했다.


 "병건이, 데모도 하겠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돈을 벌어야 하네."


 그 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사회생이 된 나는 어쩌다 스승님들이나 동기 친우들이 나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거부감이 심했던 곳에서 밥 빌고 있었으니 인생의 굴절이었던가. 남은 생은 많이 고민하고 살고 있다.


  유병건(원대신문 4기 편집장)

 

 

 

40대가 돼 되돌아 본 <원대신문>과 IMF 구제금융

   
 

 대학 새내기로 입학했던 1998년은 밀레니엄 시대를 앞둔 격변의 시기였다.
우리는 H.O.T, S.E.S, 핑클 등 한국가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댄스 그룹들의 히트곡을 구시대 유물인 카세트 플레이어 대신 고음질의 시디플레이어로 듣고 다녔다.
인터넷이 보급·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관심사도 종이 매체가 아닌 컴퓨터로 손쉽게 검색할 수 있었다.
 기성세대의 문화에서 벗어나 개성을 중시하는 20대 X세대라는 용어도 이 시기에 생겼다.
 바야흐로 아날로그 시대의 막을 내리고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IMF 구제금융을 받던 국가적으로 큰 시련의 시기이기도 했다.
 대학교 1학년 시절인 1998년에 원대신문사에 들어가, 군 입대 전인 이듬해 1999년까지 학생기자로 활동했다.
 학생기자 취재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보다도 IMF 구제금융으로 인한 학우들의 시련이었다. 그 시절 많은 기업들이 줄도산했고, 이는 가장의 실직으로 이어졌으며 학우들의 학업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 곤란해진 가정의 학우들은 생활비, 학비 등의 압박을 받게 됐고, 알바로도 현실의 무게가 감당이 되지 않던 일부 학우들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특히 사채는 절박한 학우들에게 큰 유혹이었다. 복잡한 심사절차 없이 주민등록증과 학생증만 있으면 대출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법정 이자를 훨씬 초과하는 고금리로 인해 빚은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기간 내에 이자를 갚지 못할 경우 사채업자들의 협박과 폭행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피라미드 사기 판매에 속는 사례도 있었다. 고수익을 미끼로 순진한 대학생들을 현혹해 결국에는 돈만 잃게 하는 수법이 성행했었다. 초기에 가입한 기득권 회원은 고수익을 올리고, 나중에 가입한 후발 회원은 물건만 강매 당하고 손해를 보는 구조였던 것이다.
 이러한 학우들의 피해 사례를 실제 피해자와 그 주변인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원대신문에 기사화했었다. 진술 청취에만 머물지 않고 잠입취재도 생각해봤지만 사채업자 대면하기 겁이 나서 실천하지는 못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당시는 IMF로 인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단기간에 이를 극복하고 20여년간이 지난 지금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20대 초반 시절에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했던 나, 그리고 당시에 경제난으로 힘들었던 학우들도 IMF 시련의 극복사와 함께 한 단계 성장한 40대가 됐으리라 믿는다.


 송호연(원대신문 38기)

 

 

 

내 자신을 시험한 <원대신문>의 기자 생활 '큰 행운'

   
 

 이번 63주년 글을 부탁받으면서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일상 속에서 원대신문사의 추억을 하나씩 떠올려 보는 계기가 됐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남과 동시에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모습을 보며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워 다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추억이 있다는 게 새삼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대신문사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 남는 일은 원대신문사의 편집권 확보를 위해 학생회관 앞에서 신문사 선후배와 목소리 높였던 일이다. 꿈 많은 학생기자 시절 우리가 만든 원대신문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부단히도 애썼던 진정성 있는 모습이 전부였다. 시간이 걸려도 큰 일 아니 작은 일에도 열정과 정성을 다했던 그때가 그리울 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 모습으로 원대신문사를 잘 이끌어주고 있는 후배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
 그 때도 지금도 늘 '진정성'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한다. 학생기자 신분으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취재할 때도, 한 주의 신문이 나올 때까지도 진심을 다해 정성을 다했다. 내 자신을 시험하며 원대신문사에 몰두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큰 행운 같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원대신문사 활동을 하며 스스로 얻게 된 선물이기도 하다.
 학업에 몰두하고, 직업 그리고 사회생활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덧 공허함이 찾아올 때가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대학 졸업 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결혼, 출산, 육아, 학업 등 반복되는 삶의 연속이었다. 어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왔다. 그러면서 내면의 균형이 깨져 공허함은 찾아오고 그때 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해 본다. 그럴 때마다 느낀 것은 '기본에 충실한' 진정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지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한 발 먼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직업상 말이 늦은 아이, 심리적인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과 부모님을 하루에도 수없이 만나게 된다. 상담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우리 아이가 또래에 비해서…" "다른 사람과 다르게…"로 시작하는 말이다. 마음을 읽어주지 못하고 시선에 의식하는 말,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다른 무언가에 비교하는 말. 이런 행동과 말로 우리는 '진정성'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누구에게나 강점과 약점이 동시에 존재하듯이 어떠한 기준에 의해 우리가 판단돼서 안 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후배들은 이 시기에 '진정성'을 되새기며 자신의 강점을 발전시키고 약점을 뒤돌아보는 내면의 균형을 경험해봤으면 한다.


  김종숙(원대신문 45기)
올바른언어심리발달센터 센터장

 

 

  

가장 빛났던 <원대신문> 기자 3년

   
 

 "꿈이 뭐냐"고 물으면 "글을 잘 쓰는 것"이라고 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지금은 제대로 된 글을 쓴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자기소개서쯤?
 창간기념호 원고를 청탁받고 <원대신문> 기자였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렸다. 수습기자가 되기 위해 썼다 지웠다 반복했던 지원서부터 선거 기간 밤샘 취재, 더 나은 신문사를 고민하던 합숙, 그리고 마지막 종강호 기사 작성까지. <원대신문>에서의 3년은 그야말로 나의 성장기다.
 선배들은 20살의 내가 신문사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나는 글쓰기보다 취재원에게 하는 전화를 더 어려워했다. 대본을 작성해 전화하는 연습을 했다. '안녕하세요. 원대신문사 강신지 기자입니다'로 시작하는 대본에는 인터뷰 목적, 질문 등이 적혀있었다. 수습기자라는 이유로 맡겨진 '신용벌단상' 청탁도 어려움을 극복하는 기회가 됐다.
 정기자가 된 후에는 더 많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다. 우리대학 구성원부터 각 분야의 전문가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더 넓은 시각을 갖게 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취재는 2013년에 열린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이다. 왕복 12시간이라는 거리를 당일치기로 다녀온 것도 있지만 경기를 끝마친 선수와 현장에서 즉석 인터뷰를 한 특별한 경험 때문이다.
 '3학년이 되면 조금 편해지지 않을까'라는 행복한 상상도 잠시, 윗 기수 선배들이 떠나고 4명의 기자만이 남았다. 그렇게 편집장을 시작했다. 신입 기자를 뽑기 전까지는 매일 야간 근무를 했다. 매주 5~6개의 기사를 맡아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취재, 밤에는 기사 작성을 했다. 신문사에서의 하루하루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배움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원대신문>을 작은 사회라고 불렀고, 그 안에서 더 큰 사회로 나가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3년의 기자 생활은 온전히 내 의지로 했던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나로 발전할 수 있게 한 <원대신문>의 창간을 축하할 수 있어 감사하다. <원대신문> 창간 63주년, 1379호 발행을 축하하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신문이 되기를 응원한다.


  강신지(원대신문 52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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