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공개 강좌 <글로벌인문학>, <지역학(익산학)> 강연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이 번호에는 지난 2일 진행된 <글로벌인문학> 셰익스피어에 관한 열네 가지 의문 중 네 번째를 발췌하여 싣는다. /편집자

 
 
모든 나라와 시대의 거울, 셰익스피어는 누구인가?
 윌리웜 셰익스피어는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와 어머니 메리 아든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1564년 4월 23일 태어났다. 그 해에 미켈란젤로, 칼빈이 죽고, 갈리레오 갈리레이가 탄생했다. 셰익스피어는 1616년 3월 25일 유언장을 고쳐서 서명하고, 4월 23일 사망한 후,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 안장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사후에 한 통의 편지, 한 장의 일기장도 남기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의 이름으로 된 유언장, 출생과 사망, 결혼에 관한 기록, 그리고 몇 가지 부동산 매입 문서,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된 희곡 작품 37편과 소네트 등 시(詩)작품이다. 그런데 현재 "두 사람의 귀공자", "에드워드 3세", "써 토마스 모어" 등이 추가되어 40편 된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가 직접 쓴 원고지는 단 한 장도 남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필적이라고 생각되는 서명이 6개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시의 배우 리스트에는 그가 연극 무대에 섰다는 증거가 있다. 그가 런던에서 배우로서, 작가로서, 극단의 주주로서 성공한 자료도 남아 있다. 그의 생일이 확인되는 것은 1564년 4월 26일 스트랫퍼드에서 그가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기록 때문이다. 당시의 관습은 탄생 3일 후에 세례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에 관한 전기적 자료가 너무나 희박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필명이고, 실제로는 문인이며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본인이라는 설도 있다. 셰익스피어는 동시대인 벤 존슨(Ben Jonson)이 말한 대로 그리스어나 라틴어 실력은 부족했으나("small Latin, and less Greek") 그 언어를 배운 것은 확실하다. 당시 그라마 스쿨의 기초과목은 라틴어였고, 그리스어도 가르쳤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영역(英譯) 본(本)으로 이탈리아 문학을 접하고 방대한 양의 독서를 통해 지식을 습득(習得)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백과사전 같은 그의 작품을 보면 그의 해박한 지식을 독서를 통해 습득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당시 관객이 선호하는 해외 여러 나라를 소재로 해서 작품을 집필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 및 지중해 연안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것은 20편이나 된다. 그러나 본인은 이탈리아나 지중해 연안을 가본 적이 없다. 1593년에서 1594년 사이 전염병 때문에 런던 극장이 폐쇄되었는데, 그 기간에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 여행을 갔거나, 지방 순회공연을 했다는 추론은 제기되고 있다. 이 시기에 셰익스피어는 『비너스와 아도니스』, 『류크리스의 능욕』, 『소네트』 등의 시작(詩作)에 전념했다. 특히 『소네트』는 친구와 연인 관계가 밝혀지고 있어 셰익스피어 인생의 단면(斷面)이 노정(露呈)되고 있다.
 그의 고향 스트랫퍼드네이번(Stratford-upon-Avon)은 런던 북서 백마일 지점이고, 로마시대의 군사 도로 요충지였으며, 중세시대의 농산물 집산지요, 셰익스피어 살던 당시는 인구가 약 2천 명 되는 도시였다. 아본 강과 아든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자연의 고도(古都)는 주변에 장미전쟁을 일으킨 두 가문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자연과 역사는 이런 환경의 소산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 도시의 명사요 상인이었다. 그러나 1577년, 셰익스피어가 열세 살 때, 부친이 파산해서 그라마 스쿨만을 졸업했을 뿐이고 대학에 가지 못했다. 그는 가업을 돕다가 18세 때 8년 연상인 안 하자웨이라는 이름의 부농의 딸과 결혼했다.
 셰익스피어가 언제 런던으로 나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1587년이나 1588년경이라고 추측된다. 장녀 스잔나가 탄생하고, 햄닛트와 주디스 남녀 쌍둥이가 태어나서 셰익스피어가 세 자녀의 부친이 되었을 때였다. 어떤 사정으로 고향을 떠나, 런던에 나와서 무엇을 했는지, 누구를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졌는지에 관해서도 확실한 자료가 없다. 그래서 근년에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라는 영화까지 나와 큰 화제를 모았다. 다만 극장 일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1585년부터 92년까지 7년간, 셰익스피어 나이 21세 때부터 28세 되는 시기에 그가 무엇을 하고 지났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어서 이 시기를 셰익스피어의 "잃어버린 세월"이라고 말한다.
 1592년, 셰익스피어는 "벼락출세한 까마귀"라는 비난을 동시대 유명 극작가인 윌리엄 그린으로부터 들을 정도로 그의 이름은 알려지고 있었다. 1596년까지 셰익스피어는 14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1610년 은퇴할 때까지 런던에서 배우와 극작가로 활동하면서 극단의 주주가 되고,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문화계 인사들, 궁정의 귀족들과 인연을 맺고 상류사회에 드나들면서 엘리자베스 여왕 어전 공연의 기회를 얻게 되어 궁정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1601년, 부친 존 셰익스피어가 사망했다. 동생 길버트와 리차드, 모친, 아내, 두 딸 스잔나, 주디스가 스트랫퍼드에 살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집안의 가장이 되어 가족을 책임져야하는 자리에 있었다. 1608년 모친 메리 아든이 사망했다. 셰익스피어는 1605년부터 1609년 런던을 휩쓴 전염병 때문에 그곳 생활에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는 고향의 전원생활을 꿈꾸며 서서히 런던 생활을 정리했다. 1610년 46세 때,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방 순행(巡幸)시 머물렀던 대저택 뉴 플레이스를 구입하고 은퇴했다. 1614년 그는 127 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한 재산가요 지방 유지였다. 셰익스피어는 고향집에 와서도 런던 무대와는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최후의 명작 『폭풍(The Tempest)』을 뉴 플레이스에서 집필했고, 프렛처(Fletcher)와 합작으로 1612-13년에 『헨리 8세』와 『두 사람의 귀공자』 등을 완성했다. 
 그의 인생, 사랑, 가정, 교우, 극단 활동, 사상, 재능 등 셰익스피어 연구를 위한 일차 자료가 부족하고 희소(稀少)하기 때문에 오히려 너무나 많은 것을 상상하고, 추측하고, 몽상하며, 논증하는 학술 논쟁이 전 세계적으로 해마다 되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셰익스피어 작품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자료라는 사실이다. 셰익스피어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와 자료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는 연극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1568년,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한 때 스트랫퍼드의 지방행정관이었는데, 후에 그의 친구 애드리안 퀴니(Adrian Quiney)가 시장일 때 레스터 백작 극단(the Earl of Leicester's Men)이 스트랫퍼드에서 공연을 했다. 당시 9세였던 윌리엄은 아버지와 함께 이 공연을 봤다. 이 당시, 무대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가 제임스 버베이지(James Burbage)였다. 그의 아들이 윌리엄과 절친했던 리처드 버베이지였다.
 1580년대, 이 곳을 방문했던 여왕 극단의 배우 윌리엄 닐(William Knell)이 목에 자상(刺傷)을 입고 무대에 설 수 없어서 급작스럽게 스트랫퍼드에서 젊은 대역 한 사람 구해서 그 자리를 메꾸고 런던으로 출발했다. 그 젊은이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윌리엄은 23세였다. 1587년의 일이였고, 이후 그는 1989년까지 여왕극단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서 극작가의 길을 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런던은 극작가 크리스토퍼 마로우(Marlowe)의 세상이었다. 셰익스피어는 마로우의 비극과 존 릴리(Lyly)의 희극작품을 탐독하며 극작술을 연마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신진극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증거는 1592년 극작가 그린이 "벼락출세한 까마귀"라고 윌리엄을 비난하는 글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재능과 독창성은 보통 수준을 넘는다. 그의 천재적 기량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창조적 상상력은 넓고 깊다. 우선 언어를 보자. 1만 5천어 이상의 어휘가 사용 되고, 시(詩)로 된 명언 대사는 줄줄이 급 빛으로 반짝인다. 작중 인물들은 어떤가. 햄릿, 클레오파트라, 로미오와 줄리엣, 폴스탑, 오셀로, 리어왕, 코델리아, 포셔 등 다양한 성격의,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운명의 인간들의 군상(群像)이 뇌리에 박혀서 떠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을 입증하고 있다.
 수사학(修辭學) 공부 시작은 하교였을 것이다. 그의 광범위한 독서는 한 몫을 했다. 그의 환경과 문화적 전통의 계승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의 독창성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수백만의 마음'을 지닌 셰익스피어의 본질은 어떤 방법으로도 정의를 내릴 수 있는가. 그래서 그에게 초인(超人)과 '천재'라는 이름이 따라붙는다. 그리스 시대 이후, 전무후무(前無後無) 위대한 작품을 얻게 된 우리들이 얻은 해답은 조나산 베이트가 대신 이렇게 말하고 있다.
 (1) 위대한 작품은 자연에 충실하다.
 (2) 위대한 작품은 우리들 마음에
   강렬한 정서를 일으킨다.
 (3) 위대한 작품은 현명하다.
   우리로 하여금 사색을 하게 만든다.
 (4) 위대한 작품은 양식(樣式)적 아름다움이 있다.
 (5) 위대한 작품의 위대성은 과거 인정된
   세계적인 작품의 가치에 따라 평가되고 판단된다.
 셰익스피어는 이상에 제시된 고전 작품의 미적 기준에 어떻게 부합되는지 계속 조나산 베이트의 설명을 들어보자.
 (1)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것은 셰익스피어 작품은 자연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자연에 충실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고결하고 저속한 것, 비극과 희극을 결합시킨다는 뜻이다. "자연의 시인" 셰익스피어는 넓은 의미에서 자연은 세상사 모두를 내포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도시의 반대 개념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의 체험에 충실하다. 『오셀로』는 질투의 체험에 충실하다. 『멕배스』는 야망의 충동에 충실하다. 『햄릿』은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의 어려움에 충실하다.
 (2)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독자와 관객들에게 강렬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켰다. 여러 세대에 걸쳐서 남녀들은 『리어왕』 결말에 감정이 소진(消盡)되었다. 『십이야』와 『당신이 좋으실 대로』에서 기분이 그럴 수 없이 행복했다. 『오셀로』의 데스데모 나의 버드나무 노래 때문에 연민(憐憫)의 정에 사로잡히고, 『겨울 이야기』 허미온의 동상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신기한 감정에 휩싸인다. 
 (3) 도덕적이며 정치적인 교훈은 그의 작품에서 많은 실례를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코리올레이너스』는 전시(戰時)에 필요한 것은 평화 시대에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베니스의 상인』과 『자에는 자로』는 자비와 정의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문제'는 셰익스피어가 찾아낸 원천적인 소재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는 도덕과 교훈을 설득하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세상일을 극화(劇化)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에 그의 작품       에서 '도덕'이 얻어지면, 그것은 작품의 우수성 때문이다. 극적인 위상은 그와 상반되는 위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의견의 제시 보다 더욱더 가치 있는 내용으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셰익스피어의 영감은 신(神)의 경지요, 그리스도가 그 원천이라고 해석되고도 있는데, 그의 작품 『폭풍』에서 들리는 대기(大氣) 중의 음악은 체현(體現, Incarnation)의 표현인 천사와 평형(平衡)을 유지하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4) 이 항목은 어렵다. 양식적 미(美)에 관한 서구의 기준은 고대 그리스에서 개진된 바 있다. 판테논 신전은 균형미(symmetry), 명료함(clarity), 그리고 디자인의 이법(理法, economy) 때문에 아름답다. 같은 이치로 소포클레스의 드라마는 아름답다. 코러스의 노래와 다아알로그의 발성, 절제된 언사(言辭), 그리고 시의 형식은 아름답다. 비극의 단순성, 극적 논의의 명확한 줄거리(특이하게도, 무대에는 항상 두 배우만이 서로 상반되는 가치와 행동으로 맞서고 있다) 등 양식적인 아름다움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의 본질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느슨한 에피소드 장면의 형식, 다층(多層)적 플롯, 비극에서 희극으로 어지럽게 오가는 드라마의 흐름, 잡다(雜多)한 인물의 혼성(混成), 풍성한 언어와 대사 말투, 뒤범벅된 시와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5) 이 항목은 (4)의 입장을 바꿔서 말하는 경우가 된다. 만약에 우리가 소포클레스의 기준에 맞춰 셰익스피어를 판단한다면, 셰익스피어는 곤두박질 패배한다.
 셰익스피어는 정해진 형식이 없는 예술가였다. 이런 문학의 움직임은 지극히 막가는 난동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런 창조력으로 그는 서양문학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이 때문에 그는 천재의 칭호를 받을 만했다. 천재는 개인적 특성(individuality)과 토마스 맥하란드(Thomas McFarland)가 언급한 "복제할 수 없는(unduplicability)" 그 무엇을 갖고 있다. 조나산 베이트는 셰익스피어의 창조적 영감은 한 줄기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샘솟는 것으로서 그가 받은 교육, 그의 문학 선배들, 그가 속한 극단의 배우들, 그의 관객들의 영향을 지적하고 있다. 그란빌 바아카(Granville Barker)는 "햄릿 서론"에서 셰익스피어를 "워크숍의 천재"라고 말했다. 셰익스피어는 극장 현장에서 연극의 이치(理致)를 체득했다는 해석이 된다.
 
 
 이태주 교수(영문학자, 예술공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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