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79호 <학술>란 9면에 게재한 <세계고전강좌> 아서 단토의 『무엇이 예술인가(What Art Is)』 ①에 이어, 『무엇이 예술인가(What Art Is)』 ②를 게재한다. /편집자
 
 미학은 "가치로서의 미, 현상으로서의 미, 미적 체험 등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한마디로 미학은 아름다움에 관한 학문이며, 미학적 특질은 곧 아름다운 특질이다. 예술을 자연미의 모방이라고 생각하는 전통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은 어떻게든 아름다울 테니, 예술은 미학과 자연스럽게 일치할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에 예술은 미를 벗어던지고 미학의 울타리 밖으로 달아났다. 이때부터 미학은 지독한 딜레마에 시달렸다. 미적 취미와 관계가 없는 추한 예술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추의 유미화"를 제안할 것인가? 아니면 미와 추, 숭고와 비속, 희극성과 비극성 등을 모두 미학적 특질로 받아들이고 미학이라는 학문의 경계를 넓힐 것인가? 물론 단토는 후자의 길을 선택한다.
 단토는 미학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먼저 미를 하찮게 보는 견해의 근원이라 알려져 있는 흄의 철학에서 미의 가치를 되살려낸다. 흄은 "사물의 미는 마음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 말은 후에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다"는 생각을 낳았다. 하지만 흄은 미를 다른 감각적 성질과 구분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감각과 느낌에는 충분한 일정성uniformity이 있어서, 이 모든 성질을 예술과 추론의 대상으로 만들고 삶과 관습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따라서 미는 보편적이고, 그 출처는 자연의 일정성이다. 또한 단토는 무어의 사유에 기초해서 미의 "객관적 실재성"을 논증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로 미는 오랫동안 부르주아의 가치로 여겨져 예술가들로부터 배척당해왔다. 미를 도덕성의 상징으로 본 예술가들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부르주아의 도덕성을 증오했고, 그와 함께 도덕성의 징표인 미를 추방했다. 전위예술 운동은 성공해서 몇십 년 뒤에는 혐오미술Abject Art까지 등장하고, 미는 예술의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제 예술은 미에서 해방되어 많은 가능성을 누리게 되었지만, 미는 오갈 데 없는 늙은 귀부인의 신세가 되었다.
 단토는 전위예술 운동이 추방한 미를 적당한 위치로 귀환시킨다. 다시 말해, 미는 "예술에서는 선택일 뿐, 필요조건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어떠할까? 단토는 자연미와 예술미의 중간에 「미화(beautification)」를 위치시키고, 미화 자체는 어느 쪽으로도 흡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미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함해 주변의 것들을 아름답게 꾸미는 행위를 말하는데, 칸트의 부용미와도 비슷하다.
 
 

  이렇듯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미를 추구한다. 미는 신체의 능력과 건강을 보여주고, 부와 여유를 상징하고, 평화와 안녕을 나타내고, 생명과 번영을 암시한다. 미를 추구하는 본성은 우리의 DNA에 깊이 새겨져 있다. 요컨대 미는 예술에서는 선택이지만, 우리의 삶에는 선택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미는 진·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고한 가치인 것이다.

   김한영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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