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공개강좌 <글로벌인문학>, <지역학(익산학)> 강연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길 바란다. /편집자

 
 19세기 말 영제국은 세계 육지 면적의 5분의 1,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 지배 영역은 이전 유라시아 대륙의 제국들과 달리 각 대륙에 산재해 있어서 해양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연결되었다. 영제국은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유리한 점이 없었음에도 20세기 중엽까지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직접 겪은 한국의 지식인들은 제국과 제국주의에 매우 비판적이다. 식민지 경험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적대적 시선은 오히려 영제국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살피는 데 방해가 된다. 이 책은 영제국에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가능한 한 그 실태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주로 20세기 영제국의 변화와 해체, 그리고 영연방으로 이행과정을 살피는 데 목적을 둔다. 다만, 중심부 국가의 자료에 주로 의존하기 때문에 영국에만 초점을 맞춰 제국의 구조와 변화를 서술하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밝힌다.
 이 책 1부에서 지은이는 신사자본주의 개념, 지정학적 요인을 중시하는 네트워크론, 그리고 19세기 후반 대영국(Greater Britain) 담론 등을 연결해 19세기 영제국의 특징을 살폈다. 신사자본주의는 영국 근대화의 전통을 산업자본이 아니라 귀족-지주세력의 경제활동에서 찾는 시각이다. 이런 특수성이 근대 영국사회의 특징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확장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세기 중엽 이후 토지-금융세력(신사자본가)이 백인자치령 투자를 가속함으로써 영제국은 이전과 달리 팽창국면에 진입했고 런던-백인자치령-인도를 연결하는 영제국의 기본구조가 확립된 것이다.
 네트워크이론에 따르면, 영제국의 팽창과 해체는 대부분 지정학적 요인의 한계 아래서 이뤄졌다. 19세기 팽창은 "수동적 동아시아, 유럽의 세력균형, 비호전적인 미국"이라는 국제적인 환경 아래서 가능했다. 다음세기에 이런 조건이 사라지면서 영제국은 해체의 운명에 직면했다. 한편, '대영국' 담론은 19세기말 미국, 러시아, 독일의 대두에 자극받아 나타난 제국 이데올로기이며 '제국연방연맹'의 결성이라는 사회운동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는 영국과 백인자치령 국가의 연방체제를 통해 다른 경쟁국에 대응해야 한다는 애국적 서사라 할 수 있는데, 상당수 정치인과 지식인의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기 백인자치령의 국가주의 분위기 형성과 더불어 이 이념은 '영연방체제'라는 변형된 헌정 개념으로 귀결된다.
 1부에 이어서 이 책 2부는 전간기 영제국의 근본적인 변화를 탐사한다. 1차 세계대전기 영제국의 참전과 동원을 개괄하고, 양차대전 사이의 경제 침체가 영제국에 어떤 균열을 가져왔고, 또 국제정치의 측면에서 이런 균열에 영제국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핀다. 이 책 3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연합 성격으로 새롭게 정립된 영연방 체제의 역사를 정리하고 1960년대 영국 정치가 유럽 대륙과 영연방 사이에서 표류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마지막 4부는 오늘날 영국 사회에서 '제국' 그리고 영연방이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제국의 기억과 경험이 어떻게 깃들어 있는가를 검토한다.
 이 책이 기존 연구와 다르게 접근한 점은 무엇인가. 1889-1926년간에 여러 차례 개최된 식민지회의와 제국회의 보고서를 분석해 영국과 백인자치령의 관계, 영국 정치가와 백인자치령 정치가의 제국에 대한 관점, 그리고 전후 제국회의에서 영연방체제의 이행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밖에 전간기 제국경영의 한계와 영국의 경제 불황을 연결지어 분석한 것 또한 약간의 기여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더 나아가 백인자치령 국가들의 연원과 발전과정을 조명한 것도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이 제국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운영하는 데 성공을 거둔 것은 우선 '선점 효과'의 이점을 누렸기 때문이다. 근대 문명의 힘이 농축되어 나타나기까지 발견과 정착과 이주의 과정은 먼저 시작한 세력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또 그 유리한 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 영국이 초기 산업화를 이룩했을 때 제국 네트워크 형성에 산업화의 힘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효과에 힘입은 것이었다. 영국의 확장은 바로 이 선점 효과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무심결에'라는 말도 어쩌면 이 효과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선점 효과는 오래 계속될 수 없다. 다른 나라의 모방과 추격이 나타나면서 그 효과는 점차 사라진다.
 그런데도 영제국 네트워크가 20세기 중엽까지도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근대 세계에서 영국은 일종의 강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강소국이면서도 선점 효과에 따른 이점을 극대화했다. 해군과 상선대에 바탕을 둔 영국의 해양 지배력에 강력하게 도전할 만한 세력은 근대 산업문명의 초기에는 나타나기 어려웠다. 그 세력이 가시화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나, 그마저도 새롭게 등장한 여러 국민국가들 사이의 역학관계와 국제정치 질서의 제약을 받았다. 유럽 대륙의 국민국가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세력균형에 집착하였고 대서양 반대쪽의 미국은 국내 개발과 발전에 치중했으며, 동아시아의 전통 국가들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거나 국제정치에 수동적으로만 영향받는 위치에 있었다. 유럽 대륙의 균형이 깨어지고 미국이 외부로 팽창하기 시작하며 동아시아 국민국가들이 새롭게 깨어나기 시작할 경우, 영제국과 그 네트워크는 충격을 받고 붕괴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인의 해외 이주와 정착이 가속된 것은 특히 18, 19세기 인구증가와 관련된다. 영국인이 대거 이주하던 초기부터 후대에 나타나는 백인사회 건설의 명확한 기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왕의 하사장을 얻는 형식으로 다양한 개인과 집단들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고국을 떠나 북아메리카와 남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로 이주했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이들 이주민 집단 사이에 점차로 '백인성'이 표출되고 정형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백인성을 강조했을 때 그 백인사회의 정체성은 대의제도와 책임정부에 바탕을 둔 사회, 그리고 자유로운 노동에 바탕을 둔 사회였다. 19세기 후반에 백인성이 강조된 백인정착지는 대부분 영국과 같은 정치제도를 토대로 발전해 나갔다.
 
 
 19세기 말 새로운 경쟁국들의 대두와 경쟁을 우려하던 일단의 정치가와 지식인들은 바로 백인 자치령과 본국의 더 밀접한 결합을 통해 경쟁국들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 제국 네트워크의 취약성을 보완할 수 있는 질서가 바로 '대영국'의 형성이었다. 영국과 백인 자치령 국가들의 연방체제 구축이야말로 '거리의 소멸'을 가능케 한 기술혁신의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정치 담론이었다. 19세기 말 이래 이를 지향하는 조직과 운동이 나타났고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이 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전쟁에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한 자치령 국가들은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 네트워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적인 국민국가로의 발전의 길을 택했다. 밸푸어 선언은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는 마침표였다.
 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은 후에도, 영국의 정치인들은 시대의 제약요인들을 의식함과 동시에 마치 관행처럼 제국 네트워크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변화된 상황에 직면해서도 여전히 제국을 유지할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들이 이런 환상에서 깨어난 것은 수에즈 위기를 겪은 이후의 일이다. 그 후 영국은 탈식민운동의 파고 속에서 상당히 질서 있는 퇴각에 초점을 맞추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급증한 신생 독립국들은 이런 정책 전환의 결과다.
 오랫동안 영국 정치인과 국민은 제국 해체가 커다란 혼란과 충격 없이 온건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 제국에서 영연방으로의 평화로운 이행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해체가 영국 사회에 가져다준 충격이 작았을까. 우선 1950-60년대 영국 정치인들에게 제국 문제는 항상 중요한 관심사이자 화두였다. 다음으로, 제국 해체와 함께 수만 명의 귀환자들이 영국에 유입되면서 사회적 충격을 주었다. 그들의 제국 경험과 기억이 가족이나 친지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그들이 귀국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영국의 역사가들은 제국에서 영연방으로의 순조로운 이행을 강조하고 탈식민화 정책이 비교적 성공했다는 사실만을 강조할 뿐, 제국 해체가 가져온 사회 심리적 트라우마 또는 그것이 일상생활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 해체는 생생한 현실이었고, 그것이 사람들의 삶과 일상성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근래 유럽연합 탈퇴를 둘러싸고 영국 정치와 사회가 겪는 극도의 혼란상 또한 바로 제국의 기억과 제국의 유산이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영국은 유럽통합운동 초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제국과 유럽 대륙을 저울질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 두 차례 가입 시도 끝에 1973년 유럽경제공동체(EEC) 회원국이 되었다. 유로화 단일통화 도입 당시에도 영국은 스털링화를 고집했다. 이는 런던 금융자본의 이해와 관련되면서도, 그와 동시에 유럽연합에 소극적인 잉글랜드 중심주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영국은 1990년대 이래 세계화 과정에서 '유럽연합'(EU)의 혜택을 가장 많이 얻어낸 나라로 꼽힌다. 영국은 미국 주도의 신자본주의 세계질서와 영어 헤게모니에 힘입어 유럽연합의 시장통합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1980년대에 붕괴 일보 직전까지 몰렸던 런던 시티의 금융가가 뉴욕에 버금가는 세계적 금융중심지로 되살아난 것도 이 때문이다.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에서 영국인들은 '유럽연합' 탈퇴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잔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자체가 캐머런(David Cameron) 총리의 정치적 책략에서 비롯된 자충수였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40년 이상 지속된 유럽연합 회원국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제국에 대한 기억과 향수를 가지고 있는 노년층 백인의 향배가 탈퇴 여론 조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영제국은 과거의 기억이자 유산에 지나지 않지만, 영국이 제국 경영과정에서 근대 세계의 형성을 주도한 만큼, 영국의 역사가들은 제국 지배에서 빚어진 여러 부정적 결과들을 깊이 성찰하지 않았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비교하면서 오히려 그 부정적 측면을 상대화하려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덜 사악한 제국이나 선한 제국이라는 수사가 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제국 지배의 상대화는 그런 경험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는 사회 분위기와 관련되기도 하며, 상당히 영국 중심적인 태도에서 비롯한 것이다. 어쨌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측면에 관계없이 영제국은 근대 세계의 형성에 큰 기여를 했으며 근대 세계의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제국 지배의 기억과 그 유산은 아직도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 한마디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경험이자 실험이었던 것이다.

  이영석 교수(광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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