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 자

   박서영(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가끔은 온몸이 알록달록한 시체를 마주치는 것이다
 
아파트 담장 앞이라든가 운동장이라든가 관공서의 입구 같은 곳에서
머리맡에는 화분 깨진 조각이 있는데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알록달록해진 것 같지는 않고
하여간 그렇다, 사건은 언제나 하여간 종결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강해져야 할 것 같았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은 손에 파리채를 들고 있고
선이 가로로 세로로 아무렇게나 그어진 격자 문양의 파리채,
그 격자가 진짜 내 코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수화기만으로도 쉽게 외상을 입곤 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는 24시 콜센터
고객님의 파리채를 위해 기꺼이 파리가 되겠습니다
 
달팽이관의 달팽이가 꿈틀댔다
이곳은 너무 아프다고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손에 칼이라도 쥐어주면 덜 아플 거야
일부러 몸에 칼을 그려 넣는 사람도 있는걸
대장장이처럼 바늘머신은 무기를 그리고 색깔을 채우고
 
이것은 무슨 문양입니까?
가갸거겨아야어여
그런 흉물스러운 글자도 몸에 새기는 겁니까?
아프게 한 걸 왜 몸에 새깁니까?
아픔으로써 증명됐잖아요, 강한 무기라는 것이
 
그러므로 나는 귀밑에 격자를 새기게 되었다
파리채가 자꾸 부딪히는 그 곳에
내일은 오늘보다 더 강해져서 출근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 셋을 만났다
집에 도착하기 위해선 총 세 번 아파야 했다
아파트 승강기에 올라 거울을 보았다
 
알록달록했다
 
 
시 부문 당선 소감
 
 

 

 지난 계절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작년 이맘때 시를 쓰기 시작했으니 오늘로 딱 일 년째입니다. 드러내면 감춰야 한다 하고 감추면 드러내야 한다 하고, 짧게 쓰면 길게 써야 한다 하고 길게 쓰면 짧게 써야 한다 하고! 중간이 어려워 머리를 싸맸던 지난 계절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작품을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사실 문학상 같은 것에 냉소적인 태도를 꽤 오랫동안 견지했었는데, 이유는 고등학교 때 백일장을 전전하면서 연거푸 겪었던 낙방 때문이었습니다. 그 경험은 굳은살은커녕 어떤 상처로 자리 잡아버려서, 저는 시도조차 안 하고 포기하는 데에 버릇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해야겠습니다. 상처는 사실 그럴듯한 핑계에 불과했음을요.
   소설만 쓰던 제게 시의 언어를 가르쳐주신 문창과 선생님들과 함께 작품을 합평하는 문청들, 더없이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수상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하시던 부모님, 모두 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라는 뜻으로 알고 앞으로 정진해 나가겠습니다.
 
 
시 부문 심사평

   높은 수준과 거침없는 상상력의 전개
   올해 원광 김용 문학상 시 부문 심사는 특별했다. 문학보다 콘텐츠가 더 논의되는 시대에도 여전히 시를 쓰고 시인을 꿈꾸는 문청들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응모작들을 심사하며 새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특히 시 부문에서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무척 고무적이었다. 지금도 시를 쓰겠다고 불면의 밤을 보내는 문청들로 인해 심사는 자못 즐거웠다.
   결선에 오른 작품은 「모래의 온도」 외 2편, 「격자」 외 3편, 「정육점」 외 2편, 「떨기나무」 외 2편, 「유리창의 기억」 외 2편 등이었다. 이들 작품들은 제각각 근사한 시적 상상력을 펼치고 있어 매력적이었고, 물론 또한 제각각 어딘지 균형이 완전하지 않은 풋풋함도 보여주고 있었다.
   「모래의 온도」나 「얼음의 알츠하이머」 등의 작품은 간결한 시행 전개와 응축된 표현이 돋보였다. 수준이 고르게 높아서 안정적이기도 했는데 다만 조금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격자」나 「자세」 등은 작품 속에서 활달한 스토리텔링과 서사적 맥락이 뛰어났다. 그런 만큼 작품들이 대체로 길어 좀 더 압축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정육점」과 「모래시계」 등의 작품은 세밀한 관찰을 통한 시적 형상화가 두드러졌다. 습작의 연륜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는 얘기와 함께 한편으로는 다소 밋밋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떨기나무」와 「언어의 기원」 등은 시적 표현이나 언어의 구사가 활달하고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설명적으로 풀어져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유리창의 기억」과 「수몰지구의 소문」 등은 능숙한 표현과 세련된 어법을 구사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새롭지 않고 너무 익숙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최종적으로 당선작을 골라내다 보니 「격자」와 「유리창의 기억」 두 편이 마지막에 남게 되었다. 심사위원들은 「격자」가 펼쳐내고 있는 거침없는 상상력의 전개와 「유리창의 기억」이 보여주고 있는 안정적인 세련미 사이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선택은 늘 망설임을 동반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24시 콜센터에 근무하면서 언어폭력에 시달리는 화자의 내면을 포착하고 있는 「격자」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안정적인 세련미보다 문청의 거침없는 패기를 택한 것이다. 투고한 모든 분들에게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 강연호(시인,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신(시인, 문학평론가)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