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공개강좌 <글로벌인문학>, <지역학(익산학)> 강연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넓혀 가길 바란다. /편집자
 
 세계문학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작가 톨스토이는 82세를 일기로 1910년에 타계할 때까지 치열한 삶을 살았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은 이론의 여지없이 <전쟁과 평화>,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지만 그 두 장편만으로는 톨스토이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는다. 조금 재미나게 표현하자면 톨스토이는 두 얼굴의 사나이다. 걸작을 쓴 예술가라는 얼굴이 하나고, 동시에 인류의 스승, 혹은 인생 교사라는 얼굴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히며 사랑받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신은 진실을 알지만 때를 기다린다> 등이 바로 후자를 대표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필두로 한 이야기들의 특징은 바로 짧고, 쉽고, 교훈적이라는 점이다. 톨스토이가 이런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게 된 시점은 1870년대 초반이다. 톨스토이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시골영지에 뿌리를 내리고 직접 농부들과 함께 농사를 짓는 지주이기도 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농부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이 컸다. 그래서 자기 영지에 학교를 세우고 대학생들을 초대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브나로드' 운동을 실천하려는 열망을 가진 대학생들이 시골로 갔다). 또한 작가 스스로도 아이들 교육에 참여했는데 아이들에게 깊이 감명 받았다. 루소주의자인 톨스토이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선하게 태어나지만 문명의 세례를 받으면서 오염되어, 타고난 순수함을 잃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른보다 아이들이 낫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농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톨스토이는 <초급 독본>(Azbuka)란 책을 썼다. <신은 진실을 알지만 때를 기다린다>는 여기 실린 이야기다. <초급 독본>은 농촌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교재인 만큼 소설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기초 지식을 담고 있다. 산수 및 과학 지식을 담은 글을 비롯해 이솝 우화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야기가 쉽고 교훈적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초급 독본>이 톨스토이의 글쓰기 경향을 일거에 바꾸어놓은 것은 아니다. <초급 독본> 이후 작가의 또다른 걸작 <안나 카레니나>(1875-1878년)가 문예잡지에 연재되었다. 톨스토이의 삶과 작품 세계에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은 1880년대에 찾아온다. 일명 '회심'이라고 불리는 정신적 위기를 거치며 최정상급 작가 톨스토이는 순수문학을 썼던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그는 순수문학을 비판했다. 교육 받은 지식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고급' 문학은 귀족들이 여가 시간을 때우는 취미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러시아의 문맹률은 전체 인구의 90퍼센트에 달했다. 톨스토이는 삶에 즉각적인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880년대에 발표된 이야기들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악마적인 것은 차지지만 신적인 것은 단단하다>, <두 노인>, <두 형제와 황금> 등이다. 그러면 이 이야기들이 대체 삶에 어떤 효용을 갖는가? 이 이야기들을 읽는다고 돈이 생기나, 밥이 생기나? 톨스토이가 찾은 효용성은 교훈에 있다. 짧고, 쉬운 이야기들이라 남녀노소 누구나 이야기에 담긴 교훈을 알아차릴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는 둘 다 제목이 곧 질문이다. 그런데 굳이 이야기를 읽지 않아도 답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사람에게는 별로 많은 땅이 필요하지 않다 (즉, 욕심을 버리자는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다). 그렇다. 상식선에서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정답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읽어보면 짐작한 대로다. 물론 거장 톨스토이의 필력은 어디 가지 않아서 놀라운 흡인력을 자랑하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들의 단순명료함은 단연 도드라진다.
 톨스토이가 이 쉽고 교훈적인 이야기들에서 그려낸 세상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가 꿈꾼 유토피아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우선 무엇보다도 톨스토이의 이야기들은 시골을 공간 배경으로 한다. 사람이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황금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명확히 드러나는 곳은 모두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다. 톨스토이가 보기에 시골이 도시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자연에 가깝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자연 속에서 직접 노동하는 삶을 살아야 소박하고 바른 삶을 살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반대로 문명의 산물인 도시는 인공적이며, 영혼을 타락시키는 온갖 유혹이 들끓는 곳이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도입부는 이와 같은 작가의 생각을 뚜렷이 보여준다. "도시에 사는 언니가 시골에 사는 아우를 보러 왔다. 언니는 상인과 결혼해 도시에 살았고 여동생은 농부와 결혼해 시골에 살았다. [중략] 언니는 도시 생활을 떠벌리며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얼마나 여유롭고 깨끗하게 살며 돌아다니는지, 애들은 또 얼마나 예쁘게 입히는지, 달콤한 음식을 먹고 마시는 얘기와 마차를 타고 놀러 다니거나 산책하거나 극장에 다니는 얘기도 늘어놓았다." 폼 나는 도시 생활을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아우에게 거드름을 피우는 자세는 허세에 다름 아니다. (도시에 사는 언니가 돈을 대표하는 상인의 아내라는 점도 상징적이다.) 이에 맞서 여동생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굴곡이 없는 탄탄한 시골 생활의 장점을 내세운다. 그러나 언니는 "네 신랑이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결국 거름이나 나르다가 죽을 거고 그건 너희 자식들도 마찬가지겠지"라고 더욱 약을 올린다. 자매의 대화를 듣던 여동생의 남편인 농부는 땅을 탐하게 되고, 이를 포착한 악마가 그를 유혹해 결국 파멸시킨다. 땅을 불리는 데 집착하던 농부가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도 모자라 종국에는 욕망에 잡아먹혀 죽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계속해서 농부를 유혹하는 계략을 꾸미는 것은 악마지만 그 출발점이 도시인의 거드름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배금주의는 톨스토이가 쓴 민화풍의 이야기에서 일관되게 발견된다. 엄청나게 땅을 불렸지만 결국 죽어서 2 미터 정도에 불과한 땅만을 소유하게 된 농부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황금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는 <두 형제와 황금>도 재물의 유혹을 멀리 하라는 작가의 가르침을 반영한다.
 그리고 메시지를 한층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민담에서 흔히 발견되는 숫자의 원리를 적극 활용한다. 구체적으로 톨스토이가 즐겨 사용한 숫자는 2와 3이다. 2를 근간으로 한 이야기는 '두 노인,' '두 형제와 황금' 등, 제목에서부터 부각된다. 2는 대비 효과를 낸다. 굳이 선악이 아니어도 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두 사람이 대비되어 그 중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독자가 쉽게 알아차리도록 제시하는 것이다. <두 노인>을 보면, 함께 예루살렘으로 순례길에 오른 두 노인 중 한 명은 표면적인 믿음과 재산에 집착하는 노인이고 다른 한 명은 진정한 믿음을 실천하며 돈에 연연하지 않는 노인이다. 작가는 이 둘을 대비시키며 진정한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삶의 양식을 보여준다.
 한편, 숫자 3은 마지막에 제시되는 핵심을 강조하는 데 효과적이다. <세 가지 물음>을 보자. 어느 왕이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백방으로 찾는다. 첫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왕은 여러 학자들에게 묻지만 결국 자연 속에 칩거하는 은자를 찾아가 행동을 통해 답을 깨우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도 '세 가지 물음'의 변주라 할 만하다. 신의 명령을 어긴 벌로 땅에 떨어진 천사가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천사가 씨름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 안에 무엇이 있는가? 둘째,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셋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마지막 질문이 제목으로 사용된 데서 추론할 수 있듯이 마지막 세 번째 질문과 답이 핵심이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과 답을 통해 톨스토이는 사람들 사이의 이타적 사랑, 즉 선행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근본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톨스토이의 교훈적인 이야기는 쉬클롭스키가 지적한 것처럼 "느리지만 굳건한 삶"을 그리며 "사라져가는 옛날 농촌에 대한 향수"를 담고 바른 삶을 지향한다. 이곳에서는 선악이 분명하다. 악마의 존재는 그 점을 가리킨다. 악은 악마의 농간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재물이나 권력을 미끼로 인간을 유혹하는 악마에게 휘둘리지 말고 바른 삶, 즉 타인을 사랑하고 선행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전하는 단순하지만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이다. 단순하기에 한층 더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책에서 눈을 떼고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톨스토이의 이야기가 자아내는 울림이 다르게 느껴진다. 황금으로 대변되는 물질에 연연하지 말라는 작가의 말은 과연 현실적인가? 가령, 악마의 유혹에 빠진 욕심쟁이 농부에게 정작 필요한 땅은 고작 2 미터에 불과하다고 작가는 말하지만 정말 그런가? 살아서는 어느 정도의 땅이, 즉 일정 수준의 재물이 필요하지 않은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톨스토이의 실제 삶도 이야기에서 그린 이상과는 다른 모습을 띤다. 기본적으로 톨스토이는 평생에 걸쳐 바른 삶을 살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저작권, 즉 막대한 인세를 포기했다. 그러나 생활력이 강한 그의 아내는 절대 돈을 포기할 수 없었다. 톨스토이 부부는 자식을 열셋 낳았는데 이중 여덟이 장성했다. 자식들을 잘 먹이고 입히고, 교육 시키고 결혼시켜야 한다는 명제 앞에 소피아 부인은 남편과 극심한 불화도 불사하며 저항했다.
 톨스토이의 글과 가르침은 교회와도 큰 마찰을 일으켰다. <지옥의 붕괴와 부흥>은 작가가 교회에 견지한 입장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간단히 말해서, 톨스토이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참칭한 악마의 소굴이라고 본다. 결국 교회는 톨스토이를 파문했다. 이처럼 신념에 따라 바른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사람들은 대개 변화를 두려워하고, 옳은 길보다는 편한 길을 택한다. 그리고 소신대로 사는 사람을 불편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바른 삶을 살겠다는 의지는 때로 화합이 아닌 반목을 낳는다. 톨스토이의 인생은 그 사실을 삶 자체로 웅변한다. 그러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감명 받아 적극적으로 사랑과 선행을 실천해나갈 때 혹시 주변과 불화를 겪게 된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천하의 톨스토이도 거쳐간 길이니.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세 가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양심에 따라 사는 자세일 터이다. 그것이 톨스토이가 여기서 언급한 이야기들은 물론 스스로의 삶에서 일관되게 보여준 인생 교사의 면모다. 

윤새라 교수(울산과기원 기초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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