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서양철학의 최고봉이다. 그 이후에 나온 서양의 모든 철학자들은 그저 그에 대해 각주를 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태평성대는 아니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막 전쟁을 시작한 터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가 세 살 때인 기원전 431년에 시작되었고, 기원전 404년에 끝났다. 전쟁이 터진 이듬 해, 설상가상 아테네에는 끔찍한 전염병이 돌았고 오래 지속되었다. 안팎으로 힘겨운 싸움을 하던 아테네는 27년의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아테네에는 스파르타의 괴뢰정부가 들어서면서 극도의 정치적 혼란이 생겼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그리스 전체를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했고, 여러 도시국가들이 스파르타에 도전하면서 갈등과 전쟁이 계속되었다. 
 '플라톤'이라고 불리기 전에 그의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였다. '아리스토'가 '가장 훌륭한'이고, '클레스'가 '명성, 명예'라는 뜻이다. 그의 가문은 부친 쪽으로는 왕족, 모친 쪽으로는 귀족이었는데, 그런 출신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반면 '플라톤'은 '넓은'이라는 뜻이며, '이마가 넓은' 또는 '어깨가 떡 벌어진' 사람을 가리킨다. 그의 체육선생은 제자의 떡 벌어진 어깨를 보고 '어이, 플라톤!'이라고 했다. '어이, 떡대'라고 부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원래 이름보다는 그의 별명을 더 많이 사용해서, 지금까지도 본명처럼 여겨져 온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태양이 떠올라 온 지상을 환하게 비추듯이 모든 분야에서 이성의 빛을 밝힌 철학자라고 평가된다. 그는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를 제시하는데, 철학자가 추구하는 선(善)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하였고, 그 개념을 자기 철학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태양과 예언, 이성의 신 아폴론과 연결되곤 한다. 플라톤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여신의 생일과 같은 날짜에 태어났고 하는데, 대략 5월 21일쯤이다. 그 즈음의 그리스는 정말 찬란하게 빛난다. 하늘은 파랗고 에게해와 지중해 바다에 비춰져, 눈과 마음까지 시원하게 물들인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스승이다. 플라톤은 연극대본이나 영화의 시나리오처럼 등장인물들이 철학적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글을 썼다. 약 35편의 대화편 대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만큼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존경했고, 그의 가르침을 평생 복기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은 스무 살 때였다. 그는 비극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디오뉘소스 제전의 비극 경연 대회에 출품하려고 아고라를 지나는데, 사람들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잔뜩 모여 있었다.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사람들과 철학적인 주제를 놓고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그 대화에 푹 빠진 플라톤은 '바로 저것이다'라면서 들고 있던 자기 비극작품을 불속에 던져 버리고, 그 자리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플라톤은 비극 작가로서의 꿈은 접었지만, 비극 작품 못지않게 아름다운 문학적 구성과 표현으로 소크라테스를 무대에 올리는 철학적 연극(philosophical drama)를 남겨 소크라테스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물론 플라톤의 작품은 소크라테스가 여러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있던 그대로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면에서 각색하기도 하고, 실제로 성사된 적이 없는 가상의 대화도 만들어 내면서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철학을 오롯이 드러내는 한편, 그 연속선상에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켜나갔다. 스승을 무대의 전면에 내세우고, 실제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 셈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플라톤의 작품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플라톤이 쓴 가면이라고 한다. 가면 뒤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플라톤 자신이었다. 

  이상국가의 실현은 가능한가?
 플라톤의 대표적인 작품은 <국가>인데, 그는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를 구상한다. 민주정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철학자가 통치하는 철인정치를 주장한다. 플라톤이 민주정에 비판적인 원인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관련이 깊다. 소크라테스는 메레토스라는 사람에게 고발을 당하여 법정에 섰고, 첫 번째 재판에서 유죄가, 두 번째 재판에서 사형이 결정되었다. 죄목은 아테네가 전통적으로 섬기는 신을 믿지 않으며,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는 우매한 민주정과 교활한 수사학이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민주정 때문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진 것이 아닌가 의심을 품었다. 그래서 <국가>에 나타난 이상적인 국가는 상당부분 스파르타를 닮아 있다. 그는 국가가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적정 규모의 국가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국정 전반을 다스리고, 가장 용감한 사람들이 군인이 되어 나라를 든든하게 지켜주며, 의욕이 활활 넘치는 사람이 절제의 미덕으로 과욕을 부리지 않되, 성실하게 일하여 공동체 전체의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각자가 자신의 능력과 자질, 취향에 맞게 제 몫을 다하면 정의가 실현된다고 믿었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일그러진 아테네를 바로잡고, 스파르타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국가를 이루고 싶어 했다. 
 때마침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를 다스리던 디오뉘시오스 1세가 플라톤을 초청했다. 플라톤은 초청에 응했다. 군주가 철학자가 되어 다스리는 나라를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기대는 컸지만, 둘 사이에 '케미'가 맞지 않았다. 디오뉘시오스가 큰 맘 먹고 철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영 재미없고 공부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점점 플라톤과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더니, 모처럼 만난 기회에 둘은 말싸움까지 했다. '참주의 이익만 추구하면 안 됩니다. 참주가 탁월한 덕을 갖춰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군주의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은 고리타분합니다.' 디오뉘시오스는 분노했고, 플라톤을 죽이려 했다. 디오뉘시오스의 처남이었던 디온이 말렸다. 간신히 사형을 면한 플라톤은 스파르타 사람 폴리스에게 넘겨졌고, 아이기나 섬의 노예시장에 내놓였다. 하필 그때 아이기나는 아테네와 전쟁 중이었다. 아이기나의 지도자는 플라톤이 아테네 사람인 걸 알자 사형을 선고했다. 다행히 퀴레네 사람 안니켈레스가 플라톤을 노예로 사겠다고 나서면서 어렵사리 사형 선고는 취소되었고, 플라톤은 구사일생으로 아테네로 돌아 왔다. 
 기원전 387년, 현실 정치에 실망한 그는 아테네 외곽 아카데미아에 학교를 세우고 20년 동안 연구와 교육, 집필에 매진했다. 기원전 367년, 시라쿠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디온이 플라톤을 초청한 것이었다. '선생님을 괴롭히던 디오뉘시오스 1세가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이자 나의 조카인 디오뉘시오스 2세가 참주가 되었는데, 선생님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할 수 있을 겁니다.' 고심 끝에 플라톤은 다시 희망을 품고 두 번째로 시라쿠사를 방문했다. 
 디오뉘시오스 2세는 아버지와는 달리 플라톤과 잘 맞았다. 이번에는 성공하는가 싶었는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터졌다. 디오뉘시오스 2세와 디온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이다. 디온은 플라톤과 함께 디오뉘시오스 2세를 좋은 군주로 만들려고 했지만, 디오뉘시오스 2세는 외삼촌의 간섭을 권력을 탐하는 것으로 의심했다. 게다가 디온의 반대파들이 둘 사이를 이간질했다. 결국 디온은 추방되었고, 홀로 남은 플라톤은 디오뉘시오스 2세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플라톤은 오해를 풀려고 노력했고 아테네로 돌려 보내달라고 간청했지만, 디오뉘시오스 2세는 플라톤에게도 화를 내며 그를 감금했다. 아르퀴타스라는 철학자의 중재로 플라톤은 간신히 풀려나 아테네로 돌아올 수 있었다. 
 5년 후에 디오뉘시오스 2세는 플라톤에게 용서를 빌며 다시 시라쿠사로 와 달라고 간청했다. 플라톤은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자신의 제자였던 디온이 시라쿠사에 복귀할 수 있도록 청원할 기회라고 생각해서 시라쿠사를 세 번째로 방문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디오뉘시오스 2세와 갈등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하게 아테네로 돌아왔다. 그 뒤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플라톤은 변화무쌍한 현실 너머 영원히 변치 않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찾고자 학문과 교육에만 결사적으로 전념하였다.
 
  누가 승자인가?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던 플라톤은 당대 현실에서 패배자였고, 그의 <국가>는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에 대한 공허한 청사진처럼 보인다. 오히려 당대 그와 경쟁 관계에 있던 철학자 이소크라테스가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각지에서 우수한 인재와 유력 인사들이 그의 가르침을 얻으려고 몰려들었다. 그 덕에 이소크라테스는 철학자요 교사로서 막대한 수입까지 올릴 수 있었다. 그는 플라톤과는 달리 변화무쌍한 정치 현실 속에서 시의적절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진정한 철학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작은 나라를 설계한 플라톤과는 정반대로, 그리스의 통합과 페르시아를 향한 동방원정을 제안했다. '그리스 제국'을 그린 이소크라테스의 정치적 청사진은 마침내 마케도니아의 위대한 왕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실현되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지성사적 지형도 안에서 승리자는 이소크라테스고 플라톤은 패배자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서양철학사는 이소크라테스를 지우고 플라톤을 최고의 자리에 놓았다는 것이다. 무엇이 플라톤을 그런 지위에 올려놓았을까? '실패한' 철학과 정치적 이념에서 서양인들, 나아가 인류는 무엇을 배우려고 했으며, 무엇을 높이 평가한 것일까? 그리고 당대 성공한, 그러나 인류 지성사의 맥락에서 밀려나 잊혀진 이소크라테스의 이념과 철학은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새롭게 부각될 수 있는 여지는 없는 것일까? 특히 남북이 갈등하고,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새롭게 생존과 도약의 길을 모색하는 우리에게 그리스의 위기에서 열심히 철학을 했던 플라톤과 이소크라테스 두 사람의 노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김헌 교수(서울대 인문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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