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우릴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책을 읽어야 하나? 글쎄, 책을 읽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책이 없어도 마찬가지로 행복할 테지. 그리고 우릴 행복하게 해주는 게 책이라면 아쉬운 대로 자기가 직접 써 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우리가 필요한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자살처럼 다가오는 책이다.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1904년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프카는 이렇게 말한다. 41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낮에는 보험공사에 근무하는 직장인, 밤에는 작가로 이중생활을 하며 글을 썼던 카프카는 스스로 말하듯 행복해지기 위한 작품을 남기지 않는다. 누군가를 위해 글을 썼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친구이자 사후 발간된 전집의 편집자였던 막스 브로트에게 카프카는 자신의 원고를 남김없이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역설적으로 그 유언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여전히 삶이라는 고통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낙원에서 영원히 추방당한 자의 방황, 탈출구 없는 미로에서 길 잃은 자의 침묵이다. 그렇기에 카프카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절망조차 할 수 없는 그 불행을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느 여름 카프카의 프라그멘트를 번역하면서 공중을 부유할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그의 단어들에 신열을 앓았다. 모두를 위한 문이지만 그 누구를 위한 문도 아닌, 카프카의 글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언어의 껍질을 벗겨내고 벌거벗은 세계의 모습을 목격하는 작업이었다. 세상의 언어로 다 표현될 수 없기에 비유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세계는 모순적이며, 불가해 不可解하다. 그 벗겨낸 언어의 껍질 이면에서 목격한 것을 다시금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은, 마치 어둑한 먹구름 사이로 작열하는 태양의 모습을 쓰려오는 눈의 고통을 견디며 보고 그리는 것과 같았다. 강렬한 압축적 단상으로 존재하는 카프카의 언어를 번역하는 작업은 그 이글거리는 불덩이의 뜨거움을 손으로 만지지 않고서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단식광대가 되어 소화되지 않는 부적절한 낱말을 계속 게워내며 언어의 심연을 어떻게든 메워보려 했다. 애초부터 메워질 수 없었음에도 말이다......

 카프카 사후 백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카프카 작품의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들어가려 시도한다. 영원히 부유 중이기에, 모두에게 그 어떤 의미로도 열려 있는 카프카 텍스트에 대해 수전 손택은 해석을 너무 많이 한 탓에 닳아 너덜너덜해졌다고도 말한다. 그럼에도 카프카의 책은 여전히 미스테리하다 - 작가 스스로 말하듯 그것은 불행, 죽음, 자살과도 같은 책이다. 그것은 두 발 아래에서 우리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땅이 갑자기 무너지는 순간을 체험하게 하며, 우리 일상의 안온함을 산산이 조각내고, 스스로 믿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파괴할 수 있는 책이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어느 날 아침 영문을 모른 채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본인이 지은 죄목을 모른 채 체포된 요제프 K가 된다. 그리고 더 이상 구원을 약속받지 못하는 방랑길에 오른다. 그리고 그로써 비로소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다.  

  김성화 교수(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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