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원대신문 <학술>란에는 8.15 광복절 75주년 기념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취지로 유지아 교수(원광대 HK+ 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의 아직 끝나지 않는 전쟁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개재한다. /편집자

 
 
 무모한 학살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
 2020년은 한국이 해방된 지 75주년이 되는 해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켜 패망한지 7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용어는 1980년대에 되어서야 사용되기 시작되었는데, 흔히 사용하는 제2차 세계대전이 주로 유럽인의 전쟁을 가리킨다면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인민이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전쟁을 가리킨다. 전쟁 당시에는 '대동아 전쟁'이 공식 명칭이었는데, 이는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 패전한 후 '대동아 전쟁'의 호칭은 연합군최고사령부(GHQ)가 사용금지령을 내렸다. 그 이후에 '태평양 전쟁'이라는 호칭을 널리 사용하였는데, 이 또한 대미전쟁의 국면만을 보여주는 용어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전쟁이었음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호칭을 제창하였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의 제국주의화와 주변국에 대한 식민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아시아·태평양전쟁은 페리 제독이 일본에 내항하면서 시작된 근대화와 함께 성장한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최초로 일으킨 청일전쟁부터 1945년 패전까지 약 50년 동안의 전쟁을 의미한다. 이 오랜 기간 동안 일본과 전쟁을 치른 아시아 각 지역의 피해는 매우 심각했지만 통계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확실한 숫자를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각 국가가 발표한 자료를 기초로 보면, 중국인 사망자는 중일전쟁에서 군인 380만 명, 민간인 1,800만 명, 조선인 20만 명, 필리핀인 111만 명, 타이완인 3만 명, 말레이시아인과 싱가포르인 10만 명 정도이고, 여기에 베트남인을 포함한 동남아시아인의 숫자를 합하면 2,000만 명이 족히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무모한 전쟁을 끝낸 또 다른 학살 <원자폭탄투하>
 아시아의 식민지화를 꿈꿨던 일본은 1941년 12월 8일에 하와이의 진주만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기지를 공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연합군의 반격으로 패전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1945년 7월 26일에 미·영·중 정상이 일본에 무조건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이를 묵살했고,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본토 결전에 의한 희생자를 줄이고 일본의 분할 점령을 주장하는 소련의 견제를 목적으로 원자 폭탄의 사용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8월 6일 히로시마島)에 이어 8월 9일 나가사키(長崎)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후 8월에서 12월 사이의 피폭 사망자는 9만 명 내지 12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나가사키 원폭 투하시에도 인구 24만 명중 7만 4천명이 사망했다고 추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후 방사선 피해 등으로 2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으며 피폭자에는 많은 재일조선인과 중국인이 포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그때서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였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라디오 방송으로 전쟁의 패배가 아닌 전쟁의 종말을 알렸고, 이로써 아시아·태평양의 각지를 전쟁터로 만들어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잃게 한 일본제국주의의 무모한 전쟁은 끝이 났다.

 전쟁 범죄자로 지명된 사람들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끝나기 거의 1년 전에 국무부·육군부·해군부로 구성된 3부조정위원회(SWNCC)를 설립하여 전후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을 준비했다. 그 내용 중 하나가 전쟁 범죄자 처벌이었다. 미국의 기본 방침은 포츠담 선언에서 제시된 포로 학대를 포함한 통상적 전쟁 범죄와 8월 8일 런던 협정에서 규정되어 국제군사재판소 헌장에 명기된 "평화에 대한 죄"라는 새로운 범죄 개념에 따라 전범 용의자를 체포한다는 것이다. 1945년 9월 11일, 연합국총사령부(GHQ)는 진주만 공습을 명령한 도조 히데키(東英機)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43명의 전범 용의자에게 구속 출두를 명령한다. 이른바 '제1차 전범 지명'이다. 그리고 1945년 11월 19일 '제2차 전범 지명'에 근거하여 11명의 체포 명령이 내려지고, 이어 12월 2일 '제3차 전범 지명'에 의해 59명이 체포된다. '제3차 전범 지명'은 정재계에서 황족에까지 체포 명령을 내린 것이 특징이며, 12월 6일에 추가로 9명의 전범 용의자에게 체포 명령을 내리면서 '제4차 전범 지명'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전범으로 지명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체포·구금된 주요 전쟁 범죄 용의자는 계산 방법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육·해군의 군인·정치인·관료·사업가·우익 등 100여 명에 이른다. 
 
 야스쿠니 신사의 신이 된 A급 전쟁범죄자
 전범 지명이 끝나고 12월 8일에 도쿄 재판의 준비 및 기소를 목적으로 국제검찰청(IPS)이 설치된다. 전범을 재판하기 위한 국제검찰청이 기이하게도 '진주만 공습'과 같은 날에 설치된 것은 맥아더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1946년 1월 19일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설립에 관한 연합국최고사령관의 특별성명서'와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조례(총17조)'에 의해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도쿄 재판소는 1946년 2월 18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맥아더에 의해 W.F.웹 재판장(오스트레일리아)을 비롯한 10명의 재판관(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인도·네덜란드·필리핀·뉴질랜드에서 각 1명)과 J.B.키난(미국)을 수석검찰관으로 하는 30여 명의 검찰관으로 구성되었다. 재판에서는 (A)평화에 관한 죄, (B)통상적인 전쟁범죄, (C)인도(人道)에 관한 죄 중 (A)평화에 관한 죄에 관련되어 기소된 중대 전쟁범죄자에 대해서 심리·처벌했다. 그리고 평화에 관한 죄를 '침략전쟁 또는 국제법·조약을 위반한 전쟁을 계획·개시·수행하는 과정에서 범한 죄 또는 그 계획·모의에 참가한 개인·단체구성원이 범한 죄'로 규정함으로써 이들 중대 전범자를 A급 전범자로 규정하였다. 
 1946년 4월 29일에 전범으로 지명된 100여 명 중 도조 히데키 등 28명의 피고가 A급 전범자로 정식 기소되어, 같은 해 5월 3일부터 심리(審理)가 시작되었다. 여기에 히로히토 천황의 이름은 없었다. 미국의 대일전후처리를 위한 선결과제였던 도쿄 재판은 2년이 넘는 재판기간을 거쳐 심리 중에 사망과 정신질환을 앓은 3명을 제외한 25명에 대하여 1948년 11월 12일에 전원 유죄를 인정하고, 교수형 7명, 종신형 16명, 금고 20년 1명, 금고 7년 1명의 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3일에 7명에 대한 교수형을 집행하고 난 이후 다른 전범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일본은 1952년 12월 9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전쟁 범죄에 의한 수감자의 석방 등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고, 1953년에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으로 처형된 사람들을 "공무사(公務死)"로 인정했다. 이후 1956년 3월 말에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의해 수감된 12명을 모두 가석방했으며, 1978년에는 도조 히데키와 다른 A급 전범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어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도쿄재판은 '승자의 심판'이 되고...
 일본에서 도쿄 재판을 둘러싼 연구는 아시아·태평양전쟁 종결로부터 75년이라는 시대를 거쳐 보다 다각적인 관점에서 심화되고 있다. 그 가운데는 도쿄 재판을 '승자의 심판'이라고 비난하는 시각도 여전히 존재한다. 일부 보수파는 이 '승자의 심판'에 의해 도쿄재판사관이 형성되었고, 도쿄재판사관으로 인해 자학사관이 유래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도쿄재판사관은 1970년대부터 논단에서 유통되기 시작한 역사관으로 도쿄재판의 판결을 바탕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일부 군국주의자'들이 '공동모의'하여 일으킨 침략이라고 인식하는 역사관이다. 한편, 도쿄 재판 연구자인 아와야 겐타로(粟屋憲太 교수는 도쿄 재판에서 중요한 면책 조항으로 '쇼와 천황의 면책'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 '화학전·생물전의 책임', '너무 빠른 A급 전범 용의자 석방' 등으로 인해 전후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그는 도쿄 재판 과정을 고려하면 "중요한 국면에서 '심판'과 '책임'이 미묘하게 교차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이 면책 문제가 '일본의 과거 극복'의 저해 요인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粟屋憲太郞, 『東京裁判論』大月 書店, 1989)
 한국의 시선에서 볼 때 한일관계는 여전히 과거사와 전후 배상문제를 둘러싸고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시선에서 볼 때 일본과 과거사와 전후 배상문제를 해결한 국가는 없다. 이는 가장 철저해야했던 전쟁 범죄자 처벌부터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이는 한일간의 갈등에서 현상에 나타나는 문제뿐만 아니라 그 배경이 되는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관심이 일본만이 아닌 한일 양국 나아가 동북아시아에서 높아진다면 전후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밝히는데 더욱 큰 의의가 있음은 물론 여전히 존재하는 과거사 문제를 풀어갈 단서를 마련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유지아 교수(원광대 HK+ 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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