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마음으로] 한글을 사랑하는 올바른 자세 - 원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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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마음으로] 한글을 사랑하는 올바른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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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20  21: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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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글민주주의』(최경봉 지음, 책과함께, 2012)의 내용 중 일부를 가져온 것입니다.  /편집자
 
 소리문자인 한글의 우수성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구한말인 1882년 조선에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나라의 원세개가 조선에 파견되어 1894년 청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여러 차례 조선에 파견되어 머물렀는데, 조선에서 생활하던 중 한글이 우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세개가 중화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한 관리로부터 중국 사람들이 한자의 어려움 때문에 글자를 깨우치지 못하여 문맹률이 매우 높다는 보고를 받자, 조선의 한글을 중국인에게 가르쳐서 글자를 깨우치게 하자고 제안했으나, 망한 나라의 글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아랫사람의 주장에 원세개의 생각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 이야기의 사실관계를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한자는 뜻글자이기 때문에 발음을 나타내는 기호가 별도로 필요했고, 한글은 이에 가장 적합한 문자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로마자로 된 한어병음을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이 이야기의 역사적 근거는 불확실하더라도 언어학적 근거만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글이 여러 언어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라는 사실이 '한글이 그 언어의 표기에 가장 적합하거나 유일한 문자'라는 사실로 뒤바뀌는 과정은 분명 비이성적이다. 한글의 우수성과 한글 사용의 당위성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다른 문자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부추기며 오해와 편견을 낳기 때문이다. 한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는 그 언어공동체가 처한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따라 선택하는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한글 보급 혹은 한글 세계화 과정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생각, '한글처럼 우수한 소리문자가 세상의 모든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소외된 천재의 강박'과 '한글제국주의의 애절한 탐욕'이 배어있다. 그래서일까? 한글의 우수성을 남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노골적이고, 이러한 바람이 크기에 한글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는 과장되어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한글에 대한 외국 언어학자들의 관심이야 오래된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영미 유럽권 학자들의 평가에 집중되는 것은 흥미롭다. 이들 언어학자의 어록을 소개하는 말과 글에서는 선진국 학자들조차 한글의 우수성을 칭찬하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강박이 느껴진다.
 
 "미국에 널리 알려진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지 1994년 6월호 「쓰기 적합함」이란 기사에서, '레어드 다이어먼드'라는 학자는 '한국에서 쓰는 한글이 독창성이 있고 기호 배합 등 효율면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는 또 '한글이 간결하고 우수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고 말한다. ≪조선일보≫ 94.5.25. 
 
 '대지'로 유명한 미국의 여류작가 펄벅은 "한글이 전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면서 가장 훌륭한 글자"라며 세종대왕을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극찬했다. 미국 한 과학전문지는 "한글은 독창성이 있고 기호 배합 등 효율 면에서 특히 돋보이므로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평했다. 영국 학자 존 맨은 한글을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까지 말했다. 가장 한국적인 한글이 세계 첨단임을 잘 보여준다. ≪서울신문≫ 2010.10.9
 
 영국 리스대학의 제푸리 샘슨(Geoffrey Sampson) 교수는 한글이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도 독특하지만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여 음성학적으로 동일계열의 글자를 파생해내는 방법('ㄱ-ㅋ-ㄲ')은 대단히 체계적이고 훌륭하다고 극찬하였다고 전한다. 또 샘슨 교수는 한글을 표음문자이지만 새로운 차원의 자질문자(feature system)로까지 분류하였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2002.11.11.
 
 물론 한글은 우수한 문자이다. 그처럼 정교한 체계를 갖춘 문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한글이 가장 우수한 문자라고 강변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문자의 우수성은 문자의 체계와 모양뿐만 아니라 그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인식도 고려해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자의 체계와 모양이 정교하지 못해도 사용자가 편리하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우수한 문자일 수 있는 것이다. 한 문자학자가 한글을 새로운 차원의 '자질문자'라 한 것은 문자체계의 정교함을 강조한 것이지만 그것이 곧 한글의 사용상 우수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더 우수한 문자를 가려내기는 사실 불가능하다. 오랫동안 한글과 비교되었던 한자는 어떤가?
 한자를 원시적인 문자로 본 것은 서구학자들의 문자관을 반영하는 것이었을 뿐, 한자가 원시적이라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한자는 지금까지 중국 사회에서 활발하게 쓰이고 있으며, 문자의 기계화 측면에서 지적되었던 한자의 약점들도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대부분 해결되었다. 그러니 특정 문자가 다른 문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빈약할 수밖에 없다.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찬탄이 한글의 우월성에 대한 찬양으로 될 때, 그것이 강박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강박적 찬양은 '한글을 세계의 문자로, 한국어를 세계 공통어로'라는 무모한 주장과 '한국어를 세계 공통어로 쓰면 좋겠다는 토론이 있었다'라는 근거 없는 보도를 낳기도 했다. 
 
 96년 10월 9일 KBS-1TV의 보도를 보면 몇 년 전 프랑스에서 세계 언어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학술회의가 있었다. 한국의 학자들이 참가하지 못했던 그 회의에서 한국어를 세계 공통어로 쓰면 좋겠다는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2002년 11월 11일)
 
 이를 통해 언어와 문자에 대한 비이성적 찬양의 귀결점은 결국 폐쇄적인 나르시시즘이거나 제국주의적 탐욕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최경봉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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