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33만여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지만 그 뜻에 따라 돌아가신 경우는 725명에 불과했다. 죽음은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최악이자 최대의 사건이다. 그리고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일생일대의 가장 큰 사건에 대해 새 자동차를 구입할 때보다도 준비를 덜 한다. 웰다잉 논의가 '암'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까닭에 역설적으로 암이 아니면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 것인지 사람들은 죽음의 일상성을 외면하고 이에 대한 논의를 회피한다. 인간의 가치와 이윤을 쉽게 맞바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늙음도 치료가 가능한 병으로 둔갑하고 죽음은 병원으로 '외주'가 된다.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상태로 오랜 시간을 버텨낼 수 있게 하는 현대의료는 죽음에 대한 정의마저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죽음을 직업적으로 만나면서 더 많이 경험했고, 덕분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도 더 많았던 사람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저서 "죽음을 배우는 시간"에서 나는 내가 직업적으로, 사적으로 겪은 여러 죽음을 말하려 했다.
 
 
 왜 이 시점에서 죽음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많은 분들이 의아해 하기도 했다. 지금은 모든 이들이 오로지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해서만 궁리하는 시기인데…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현대의학이 마치 못 고칠 병이 없는 것처럼 허풍을 떠는 사이 자연은 또다시 인간에게 그것이 망상이었음을 혹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입의 수만큼 코로나 19 이후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를 예측하지만 정작 변하지 않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인류 역사상 역병이 자연 도태의 역할을 해온 것은 항상 반복되어 왔었는데, 과학 기술의 환상에 사로잡힌 인류에게는 지금의 코로나 사태는 있을 수 없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 인간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된 결과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다양한 방법으로 방역을 고민하고 여러 곳에 "코로나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라는 격문이 붙지만 조금 더 세상을 보는 혜안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안다. 이것이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변종 코로나의 시발탄을 올린 사스가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것은 2003년이었다. 변종 코로나는 12년 만에 메르스라는 더 강력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패닉에 빠뜨렸다. 그리고 겨우 5년 만에 이 바이러스는 코로나19라는 보다 영리하게 진화된 모습으로 인류에게 다시 나타났다. 사망률과 전염력의 절묘한 비율은 전 세계를 삽시간에 마비시켰다. 우리가 그토록 우리보다 앞선 사회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던 유럽과 미국에서 병원이 감당하지 못하는 숫자의 환자가 발생해서 거리에 시신이 뒹굴고 고령자가 사용하던 인공호흡기를 떼어 젊은 환자에게 옮겨 장착하는, 문명사회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 인간들이 사라진 공간에 원래 그곳의 거주자였던 야생동물이 나타나고 오염이 심했던 도시 공기가 깨끗해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쌓아 올렸던 번영과 부의 실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그 동안 그렇게 싸워 이겨서 남들의 머리 위로 한 치라도 더 올라가려고 악을 쓰면서 획득한 것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이 와중에도 과학자들은 알량한 코로나 바이러스 염기 분석 실력을 뽐내며 변이가 잘 안되는 종이라 쉽게 해결이 될 것처럼 호언장담을 한다. 마치 과학이 그동안 슈퍼박테리아, 신종 플루, 결핵, 에볼라 바이러스 등 다른 감염균들의 변이를 관리는 고사하고 예측이라도 잘 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능력은 없고 목소리만 큰 정치가는 경제를 사람의 생명 앞에 두고 그 효능도 알 수 없는 백신 개발을 추켜세우고 심지어는 가장 기본적인 검증도 거치지 않은 항체 검사 판매를 승인하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이 대혼란 속에 우리는 차라리 차분하게 변하지 않는 진실을 마주해야 할 것 같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고 인류가 항상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 새로운 세대의 미래를 열어 주었다는 것을, 결국 삶과 죽음은 같은 일이라는 것을.
 
 이 강의에서는 현대의학의 도래에 의한 수명의 연장이 가져온 죽음의 모습을 조망한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단 100년 만에 두 배가 늘어나면서 병치레 속에 생명을 이어가야 하는 날들이 많아졌지만 이런 노화에 동반되는 병치레들은 모두 병원에 가면 치료법이 있는 질환으로 이름 붙는다. 그리고 폐렴이 있으면 항생제와 산소 공급을, 식사를 못해서 영양실조가 되면 강제 급식과 정맥을 동한 영양제 공급을 실시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각 고비 고비에 병원에 발을 들이면 그런 서식은 효력을 잃고 휴지조각이 되어 버린다. 
 몸이 쇠할 대로 쇠해져서 이제 팔다리도 못 움직이고 밥도 누가 도와줘야 먹는 지경이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느 나이에 이른 후 이 무서운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오래 생각하지 않고 마치 재수 없는 상상이나 되듯 바로 지워버리기 일쑤다. 이것은 상상이나 불운이 아닌 엄연한 삶의 피할 수 없는 국면임에도…그렇게 죽음을 외면하는 결과는 항상 병원에 생사결정권을 맡기는 그런 죽음이고 그것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 나쁜 일들이 일어난다. 삶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반복해서 병원 신세를 지고 고달픈 치료를 받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기 전 가족들의 얼굴도 못 보고 희미한 의식 속에 수십 개의 삽관을 몸에 박은 채 24시간 울리는 기계음을 들으며 죽어가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죽은 뒤에 가족이 풍비박산 나고 자식들이 철천지원수가 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외면하는 현실에서 이런 일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 어차피 죽음을 병원에 '외주'해야 한다면 좀더 알고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따져가며 손해를 줄이는 것이 차선책일 수도 있다.
 현대 의학의 시대에 죽음의 단계는 오롯이 생물학적 기능의 소실 정도에 따라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바깥 출입을 못하는 단계가 되면 누구의 도움이 없이 집 밖에서 걸어다닐 수 없을 정도로 신체가 쇠약해진 것을 의미하며 일종의 "사회적 죽음"의 단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형편에 따라 부유한 이들은 다양한 돌봄을 받을 수 있고 이 단계에서도 부분적인 외출이 가능하다.  다음이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단계인데 이 때가 되면 화장실 출입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당장 배변을 누군가가 처리해줘야 하는 상태가 된다.  "생물학적 죽음"이라 할 수 있는 단계이고 돌보는 사람의 고충이 커지지만 배변 처리를 남에게 맡기는 당사자의 인간적 존엄성 또한 크게 훼손된다. 마지막이 "식사를 못하는 단계"로 일반적으로 3일 이상 물을 먹지 못하면 사망에 이른다. 그러나 현대 의학의 힘은 이런 마지막 단계에 개입해서 인위적인 방법으로 영양을 공급함으로 삶을 아주 길게 연장할 수 있다.  근래에 제기되고 있는 연명 치료에 관한 논의는 바로 이런 생물학적 사망 상태, 즉 배변도 혼자 처리 못하고 밥도 못 먹는 단계에서 의료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연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견지를 취한다.
 어떤 식의 죽음이 바람직한 죽음인가에 대해서는 이 세상의 뭇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생각이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좋은 죽음을 위해서는 임종 준비기, 임종기, 임종 후에 일련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즉,
 · 살아 있는 시간 동안 잘 살기: 죽음을 누구나 경험하는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살아 있는 시간 속에서 건강하게 더욱 잘 살며 가족, 친지, 가까운 이들과 갈등을 갖지 않고 그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쓰기 위해 노력한다.
 · 죽음을 준비하기: 죽음을 삶의 결과로 인식하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유언장 남기기, 장례 준비 및 사후 과정에 대한 정보를 얻고 미리 경험해 봄으로써 죽음에 대한 불안을 줄이고 편안하게 수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 무의미한 삶의 연장 피하기: 특히 병원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면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거나 심지어 그에 반하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누구도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정해주지 않는다. 결국 자신이 정하는 수밖에 없다.
 · 편안함: 통증이 없고, 신체적 증상에 의해 고통받지 않는 물리적으로 편안한 상태, 평온한 분위기에서 가족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며 이별을 고할 시간을 갖는다.
 나는 이 강의에서 적나라한 죽음의 모습, 특히 오늘날 많은 사람이 생을 마감하는 병원 시스템 안에서 목격되는 죽음의 양상을 기술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데이터를 전달하려 한다. 많은 이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준비가 왜 어려운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함으로 어떻게 삶을 마무리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할 실마리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 강의에서 준비 없이 맞이한 죽음이 가져온 불행한 결과들을 바라보며 많은 이가 저마다의 답을 찾는 노력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현아 교수(한림대학교 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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