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공개강좌 <글로벌인문학>, <지역학(익산학)> 강연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넓혀 가길 바란다.
/편집자
 
 
  1. 이 책의 저자
저자 백낙청은 1938년생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D.H.로런스의 연구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재 서울대학교 영문과 명예교수로 있다. 1962년부터 서울대학교 영문과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1966년에는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창간하였다. 1974년에 유신반대성명에 서명했다가 해직되었고, 1980년에 복직되었다. 2005년에는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2006년에는 최영돈, 로버트 버스웰 교수 등과 더불어 원불교 교전을 10년 만에 영어로 번역하였다. 저서로 『21세기의 한반도 구상』(2004),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2009), 『백낙청 회화록』(2017)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50년 동안의 D.H.로런스의 연구를 집대성한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를 출간하였다.
 
 
 
2. 이 책의 배경 –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가 일본에서 6년 동안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 중의 하나는 대부분의 일본학자들은 전공에 상관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19세기의 ‘메이지유신’이나 최근의 ‘동일본대지진’과 같은 일본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설령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해도 암암리에 자신들의 문제를 의식하면서 학문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전공 이야기로 일관하는 한국학계와는 학문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다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의 저서들을 번역하신 교수님의 학부강의를 청강한 적이 있었다. 내가 자신을 “중국철학을 연구하고 있는 한국유학생”이라고 소개하니까 대뜸 돌아오는 반응이 “도겐(道元. 13세기)의 사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일본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연구경력도 일천한지라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프랑스철학의 권위자의 입에서 일본 중세의 불교사상가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은 나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기왕이면 서양 것을 많이 알아야 하고 영어로 강의를 해야 인정받는 한국학계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학계와 한국학계의 이런 분위기의 차이는 “과연 학문의 지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 유럽철학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의 정신은 대부분 유럽에 가 있기 마련이다. 몸은 한국에 있는데 마음은 외국에 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분열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서양철학이나 서양학문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동양철학이나 한국철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조선유학을 전공한다고 하면 그 사람의 마음은 조선시대에 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문의 지점이 자기가 ‘살고’있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과거의 시대와 공간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한국의 문제를 진단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우에도, 자기가 연구하는 시대와 공간의 방법과 생각으로 돌아가서 처방을 내리기 일쑤이다.
반면에 일본학자들이 일본의 근대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그들의 학문의 지점은 자기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일본에 있다는 뜻이 아닐까? 이러한 학문적 태도를 우리는 ‘실학’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실학’이란 “현실에 바탕을 둔 학문”이라는 의미로, 학문의 지점이 자기가 딛고 있는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학문을 말한다. 반대로 자기 현실과 동떨어진 채 남의 문제를 고민하는 학문은 ‘허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작 가려운 자기 다리는 안 긁고 남의 다리를 긁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글에서 말하는 ‘한국학’은, 그 전공이 서양학이든 동양학이든, 철학이든 역사학이든 관계없이, 학문의 지점을 자기 현실에 두고 있는 학문을 말한다.
이 책의 저자 백낙청은 그럼 점에서 분명히 한국학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학의 관점에서, 기존에 학계에서 폄하해 왔던 동학이나 원불교와 같은 개벽사상을 평가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동양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원불교는 물론이고 서양사상까지 재해석하고 있다(가령 로런스를 ‘개벽사상가’로 이해하는 것처럼). 바로 이것이 그의 원불교론이 깊이가 있으면서 그의 사상이 서양 사조에 휩쓸리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단지 그가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를 해박하게 이해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학문의 지점이 그가 딛고 서 있는 한국이라는 현실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자력양성”을 중시한다. 원불교 초기교서인 『보경육대요령』(1932년)에 명시된 ‘남녀권리동일’도 여성의 자력양성 차원에서 규정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학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정신적인 자력양성”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을 구한말의 최제우는 ‘동학’(=한국학)이라는 학문으로 제시하였고, 오늘날의 최진석(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은 “독립적 사고”로 표현하고 있으며(『탁월한 사유의 시선』), 김태창(동양포럼 주간)은 “영혼의 탈식민지화”라고 말하고 있다.
어찌 보면 저자가 강조하는 ‘개벽’이란 것도 “사상적 독립”의 다른 말일지 모른다. 조선의 유학자들처럼 중국적 사고에 기대거나 구한말의 개화파처럼 서양적 사고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전통 속에서 찾아낸 사상문화를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생각하자는 것이 이른바 “사상의 개벽”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원불교에서는 “자력양성”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사상의 개벽과 자력 양성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3.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1988년부터 2016년까지 18년 동안 저자가 통일문제와 원불교에 관해서 강연하거나 인터뷰한 글 18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18편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01. 통일하는 마음
02. 개벽과 통일
03. 물질개벽 시대의 공부길
04. 한국민중종교의 개벽사상과 소태산의 대각
05. 21세기 한민족공동체의 가능성과 의의
06. 통일사상으로서의 송정산의 건국론
07. 원불교적 사유방식의 이유
08. 희망의 21세기 어떻게 맞이할까?
09. 후천개벽시대의 한반도
10. 나의 문학비평과 불교, 로런스, 원불교
11. 통일시대 한국사회와 정신개벽
12. 통일시대·마음공부·삼동윤리
13. 변혁적 중도주의와 소태산의 개벽사상
14. 정치와 살림
15. 무엇이 변혁이며 어째서 중도인가
16. 대전환을 위한 성찰 두 가지
17. 원불교 개교 1백주년 기념 특별대담
18. 문명의 대전환과 종교의 역할
 
이 책의 목차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18년 동안 저자의 문제의식은 일관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한다면 “원불교로 열어가는 통일한국”일 것이다. 원불교의 정신과 사상이 통일을 준비하고 21세기의 한국을 열어 가는데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원불교의 핵심사상은 과연 무엇인가? 이하에서는 “개벽, 도덕, 살림, 중도, 일원(一圓)”의 5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저자의 원불교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4. 이 책의 내용 - 한국학으로 본 원불교
 
(1) 개벽과 혁명
저자가 원불교에서 가장 주목하는 개념은 ‘개벽’이다. 그는 원불교의 개벽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개교표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를 “시국에 대한 진단이자 현실에 대한 판단”으로 본다(34쪽, 314쪽).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기존의 불교와의 가장 큰 차이라고 지적한다. 즉 불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원불교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찾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야말로 백낙청과 원불교가 만나게 된 접점일지 모른다. 즉 그의 사상이 ‘한국’이라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개벽을 시국진단이라는 사건으로 읽어낼 수 있었고, 반대로 원불교의 개벽론에 그러한 현실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그가 원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리라.
그런데 그가 개벽을 ‘시국진단’으로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혁명론’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개벽과 혁명을 구분하여, “마음공부를 도외시한 혁명론”(212쪽)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원불교의 개벽은, 단순한 정치적·제도적 혁명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가 공부해서 새 세상을 만드는”(214쪽) ‘공부에 의한 혁명’또는 ‘수양에 의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벽론은 단순히 원불교뿐만 아니라 그것의 선구로 알려진 동학의 개벽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흔히 역사가들이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할 때의 ‘혁명’이라는 말은, 내가 아는 한 당사자들은 쓴 적이 없다. 그들은 ‘개벽’이라는 말을 썼을 뿐이다. 그리고 이때의 개벽은 백낙청이 말하는 공부나 수양에 의한 ‘인문개벽’에 가깝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보다는 ‘동학농민개벽’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4~1864)는 ‘다시개벽’이라는 말을 썼고, 그를 이은 해월 최시형(1827~1898)이 처음으로 ‘후천개벽’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혁명’이 서양의 시민혁명(revolution)이나 유교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면(‘혁명’이라는 한자어 자체는 ꡔ주역ꡕ 「혁괘(革卦)」의 주석에 처음 나온다), ‘개벽’은 구한말의 한국적 상황에서 나온 사상 용어이다. 따라서 저자가 ‘개벽’에 주목하면서 그것을 시국진단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원불교를 ‘한국학’의 일환으로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근대한국사상’의 흐름으로서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2) 도덕과 문학
저자가 개벽을 혁명과 구분하고 공부와 연결시킬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동아시아의 ‘도덕(道德)’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道德’과 ‘moral’을 구분하면서, 도덕은 단순한 도덕률이나 윤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와 거기에서 나오는 힘”(300쪽)을 말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동양고전에서의 도덕 개념, 특히 『도덕경』에 나오는 ‘도덕’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399쪽 각주2), 일찍이 아서 웨일리(Arthur Waley. 1889~1966)는 노자의 『도덕경』을 “The Way and Its Power”(1958)라고 영역하였다. 이에 의하면 ‘도’는 우주론적인 원리나 작용을 말하고, ‘덕’은 그것을 내 몸에 체득하여 얻은 ‘힘’을 의미한다.
백낙청은 이러한 동아시아 전통 속의 도덕 개념에 입각하여 윤리나 규율은 도와 덕을 실현하다 보면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고 본다(300쪽). 그래서 위계상으로 보면 “도-덕-율”(300쪽)의 순서가 되는 셈이다. 이것은 노자가 인(仁)이나 예(禮)와 같은 윤리규범은 도와 덕을 상실 한 후에 강조되는 덕목이라고 본 것과 상통한다(ꡔ도덕경ꡕ 제38장). 여기에서 ‘덕’은 오늘날로 말하면 ‘수양’이나 ‘내공’에 가깝다. 또는 ‘마음공부’라고 할 때의 ‘공부’나 원불교에서 하는 ‘훈련’과 유사하다. 즉 동아시아 고전에서 “덕을 쌓는다”고 할 때의 ‘덕’은, 특히 도가사상에서는, “포정의 해우”에서 볼 수 있듯이 오랜 시간동안 축적되어 온 심신수련의 힘을 말한다. 바로 이 점이 서양철학과의 가장 큰 차이이다.
흔히 노장사상은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실체적이지 않고 해체적이라는 점에서 데리다와 같은 프랑스의 해체철학과 비교되곤 한다(대표적인 예가 김형효의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 그러나 서양의 해체철학에는 덕론이 없다. 그것은 서양철학 자체에 수양론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 아무리 서양의 현대철학이라고 해도, 니체나 하이데거와 같이 서양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서양의 철학 전통에 없는 수양학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반면에 동양은, 노장이 됐든 불교가 됐든, 세계관이나 존재론의 차원에서는 서양 현대철학과 친화적인 해체철학을 지향한다고 해도, 수양에 바탕을 둔 ‘덕’ 개념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양철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이 차이가 개벽과 개혁의 차이로까지 이어진다. 백낙청은 동아시아의 ‘도덕’개념이 지니는 무게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修德)에 바탕을 둔 - 개혁론과는 다른 - 개벽론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도덕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문학론을 전개한다. 저자에 의하면 문학이란 도덕의 표현이다. 즉 문학가가 자신의 예술을 치열하게 하다 보면 저절로 ‘도’의 세계에 진입하게 되는데, 거기서 나오는 덕을 담은 것이 문학이라는 것이다(301쪽). 이것은 북송시대의 성리학자인 주렴계의 『통서(通書)』에 나오는 “문이재도(文以載道)”의 문학론과 일맥상통한다. “문이재도”란 “도가 실린 것이 문학”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 도’는 ‘세계 전체’, 지금으로 말하면 ‘지구적 공공성’의 다른 말로 볼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문학가란 ‘독선(獨善)’이 아닌 ‘보살’을 지향해야 한다. 이것을 동아시아적 개념으로 표현하면 ‘대승문학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낙청의 도덕론은 비단 문학뿐만 원불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령 원광대학교가 ‘도덕대학’을 표방하고 있다고 할 때의 ‘도덕’ 개념은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moral’이나 ‘ethic’또는 ‘인성(人性)’이나 ‘덕성(德性)’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즉 ‘도’가 빠진 ‘덕’, 그것도 ‘moral’이나 ‘ethic’으로서의 ‘덕’이 강조되는 인상이다. 그래서 덕의 출처가 어디인지 불분명하고, 그로 인해 덕을 실현시킬 동력도 약해지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도덕’이라는 말을 들으면 진부함이나 밋밋함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 ‘도’를 제시하고, 그것에 바탕을 둔 ‘덕’을 권장하는 것이야말로 한국학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3) 여성과 살림
한국학자로서의 저자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논의 중의 하나는 그의 여성론이다. 그는 서구적인 ‘평등론’에 대해서 동양적인 ‘조화론’을 내세운다. 평등론이 수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조화론은 음양의 우주론에 근거하고 있다. 음양은 동양인문학의 핵심개념이다. 서양사상이 ‘실체’(substance) 개념에서 출발한다면 동아시아사상은 ‘음양’에서 시작된다.
확실히 오늘날 여성의 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권리’라는 측면에서 보면 서구적인 ‘평등’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원불교는 일찍부터 ‘남녀권리동일’로 이것을 실현시키고 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수위단과 같은 최고결정기구에 참여하는 것이다(381쪽).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것은 기계적 ‘평등’이 아닌 차등적 ‘조화’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 차이들의 조화가 있어야 ‘살림’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남녀가 모두 상생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이러한 생각을 일찍이 “和而不同(화이부동),” 즉 “차이(不同)가 있어야 비로소 어우러짐(和)이 가능하다”고 설파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지 음양의 조화뿐만 아니라 동서의 조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즉 ‘평등과 조화’의 조화인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의 서구적인 양성평등과 백낙청의 동양적인 음양조화 사이의 ‘어우러짐’이야말로 한국학으로서의 여성학의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어우러짐이 가능해지려면 두 학문 사이의 조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양성평등이 서양의 사회과학 논리 위에 서 있다면, 음양조화는 동양의 인문학 전통 위에 서 있다. 서양의 사회과학의 근간에는 과학적 사유가 있고, 동양의 인문학의 바탕에는 도학적 사유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서양의 과학 전통에 있는 학자들은 도학을 ‘학’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대화의 단절을 가져오는 가장 큰 문제이다. 장자의 용어를 빌리면, 학문 사이의 ‘양행(兩行)’(「제물론」)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원불교가 지향하는 도학과 과학의 병진은 학문의 양행을 하겠다는 것이고, 저자 역시 이 노선 위에 서 있다. 원불교는 종교와 종교의 회통뿐만 아니라 학문과 학문의 회통까지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이 경우에 ‘회통’은 ‘양행’이나 ‘병진’의 의미).
 
(4) 중도와 통일
이 책에 나타난 저자의 한국 사회에 대한 가장 큰 관심은 ‘통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한 당위론이나 감정론의 차원을 넘어서 ‘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통일을 ‘학문적으로’ 논하는 마지막 세대나 인물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이른바 지식인들은 ‘통일’을 논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념’ 논쟁에 휘말리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백낙청의 통일론의 특징은 단순한 정치나 경제 논리에 머물지 않고 동양적 또는 한국적 사상 전통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의 원불교론이 그러하듯이, 그의 통일론은 혁명이 아닌 개벽, 모럴이 아닌 도덕, 무력이 아닌 수양(공부)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일종의 ‘인문학적 통일론’인 셈이다. 이것을 그는 “지혜의 통일”(76쪽)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심에서 그는 1945년의 『건국론』에 주목한다. 『건국론』은 원불교의 제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1900~1962)가 해방 직후에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쓴 책이다. 저자는 특히 자신의 “변혁적 중도주의론”과 관련해서 『건국론』에 나타난 ‘중도주의’에 주목한다. 송규가 말하는 중도주의는 “어느 한 편에 고집하거나”, “어디 일개 국가의 정책에 맹목적 추종”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저자가 자신의 통일철학의 바탕에 동양의 ‘중(中)’ 사상을 두고 있고, 그것의 선례를 원불교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통일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더 나아가서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이른바 양극화 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과 중도주의를 표방한 민세 안재홍이 내세운 한국정치철학의 이념도 ‘다사리’였다. 이 때 ‘다사리’란 말 그대로 “다 살린다”는 뜻으로, ‘홍익인간’의 한글식 표현이다. 여기서 ‘다’가 곧 ‘中’인 것이다. 즉 ‘中’은 좌우나 동서 또는 상하의 ‘중간’이 아니라, 그것들을 아우르는 ‘바탕’을 가리킨다. 이 바탕은 자기 비움과 자기 부정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5) 일원과 불교
이러한 자기 비움과 자기 부정을 바탕으로 하는 ‘중도’가 동양식 ‘중도’이다. 가령 『장자』에서는 ‘환중(環中)’을 ‘비움’(虛)으로 해석하고,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를 ‘부정’(非)으로 풀이한다.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견고한 틀(成心)을 부정하고 허심(虛心)의 상태가 되어야 이질적인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원불교’에서 말하는 ‘원(圓)’이야말로 이러한 의미의 ‘중(中)’이라고 생각한다. “원불교적 사유방식”의 핵심은 바로 이 (‘중’이나 ‘허’로서의) ‘원’에 있다. 그리고 이 ‘원’이야말로 원불교와 불교를 구분짓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는 ‘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 내지는 수단의 성격이 강하다. 불교적인 마음공부나 해체적 세계관(空)을 실천하고 깨달아야 원불교가 지향하는 ‘하나’(一圓)의 경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원불교의 ‘원’은 ‘하나’(한울)를 지향하지만 그 ‘하나’는 동질적인 하나가 아니라 이질적인 하나이다. 자기 안에 타자를 ‘포함’하고 있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광대학교의 수덕호에는 타 종교(유교, 불교, 그리스도교)와 서양철학(소크라테스) 창시자들의 동상이 ‘원’의 둘레 위에 세워져 있다. ‘풍류’를 ‘포함삼교’(包含三敎)라고 설명한 최치원식으로 말하면 ‘포함사교(包含四敎)’인 셈이다. 이것은 여느 불교대학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발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불교는 ‘회통불교’가 아니라 ‘회통종교’이다. 단순히 불교를 토대로 유불도 삼교를 종합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모든 종교의 근원적인 ‘같음’을 전제로 하면서 현실적인 ‘다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이능화가 말한 『백교회통』(1912)과 상통한다.
이상의 해석이 일리가 있다면, 저자가 제기한 ‘중도주의’는, 그리고 그가 주목한 원불교의 ‘중도주의’는, 단순히 통일문제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전반적인 갈등상황을, 적어도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시사를 준다. 저자의 중도론은 그동안 우리가 ‘중’을 너무 서구적인 시각에서 보아온 것이 아닌가라는 성찰을 하게 한다.
 
 
4. 도덕으로 열어가는 대한민국
오늘날 ‘도덕’이라고 하면 지분하고 꼰대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때의 ‘도덕’은 규범화되고 권력화된 도덕일 뿐이다. 원래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도덕은 그러한 의미의 도덕을 비판하기 위해서 제시된 개념이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도’란 ‘이상적인 세계’를 의미하고 ‘덕’은 그 이상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내면해 축적한 ‘힘’을 말한다.
동학에서 원불교에 이르는 한국의 자생종교는 하나같이 ‘도덕’을 부르짖었다. 이러한 “도덕지향성”은1919년에 일어난 삼일만세운동의 선언문에도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온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는 폭력의 시대가 가고 도덕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덕’은 ‘폭력’과 반대되는 말로, 지금으로 말하면 ‘생명평화’를 의미한다.
이들 ‘개벽파’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도덕이야말로 진정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는 열쇠라고 보았다. 무력이나 기술이 아닌 도덕이 미래의 자본이자 힘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최근에 한국의 코로나 방역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이유 중의 하나도 시민들의 ‘도덕의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고 불편을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가져다 준 인류의 위기는 이제 ‘도덕’ 개념을 인간의 차원에서 지구적 차원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에 와 있음을 말해준다. ‘인간도덕’에서 ‘지구도덕’으로의 확장이자, ‘근대성’(modernity)에서 ‘지구성’(globality)으로의 전환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 개념이야말로 노자 『도덕경』 이래로 동아시아에서 일관되게 추구해 온 사상에 다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서구화되고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렸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도덕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성환 책임연구원(원불교사상연구원)
 
* 이 글은 조성환, 「한국학으로 독해한 원불교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 백낙청의 원불교 공부를 읽고」(『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72집, 2017년 6월)를 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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