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 59주년 기념 특집 - 원광대학 어제와 오늘]

 우리대학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개교정신을 토대로 1946년 개교한지 59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명실상부한 국내의 명문사학으로 발전하였다.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에 의해 1916년 창시된 원불교의 교육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원광대학이 「지덕겸수(知德兼修), 도의실천(道義實踐)」을 교훈으로 삼은 것은 지성과 덕성을 겸한 인재를 양성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인간사회에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여 은혜와 평화를 이루는 역할을 하자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대학은 통폐합의 진통을 겪는 위기를 맞고 있는 가운데, 우리대학은 전라북도 익산시 신룡동 344-2번지에 위치한 지방대학이면서도 국내의 명문사학, 세계의 중심대학으로 성장하고 있다.  10만여 명의 인재를 배출하여 지역사회와 한국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원광대학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기로 하자.
    
※ 원광대학의 탄생과 발전

정신개벽의 요람 - 1940년대
원광대학은 1946년 5월 1일 전북도청 교육부 학무국으로부터 ‘유일학림(唯一學林)'의 이름으로 교육기관 설립허가를 받았다.  유일학림은 수업 연한 각 3년인 중등부와 전문부의 2부 편제로 발족하여, 정전을 비롯한 교학(敎學) 과목과 불교학을 비롯한 교양 과목들을 아울러 학습하게 하였는데, 중등부 남녀 46명, 전문부 남녀 34명이 제1기로 입학하는 작은 교육기관으로 시작하였다. 유일학림이 모체가 되어 중등부는 후일 원광 남녀 중ㆍ고등학교로, 전문부는 원광대학교로 각각 발전하였다.
    
전쟁 폐허 위에 선 상아탑 - 1950년대
6.25 동란 직후인 1951년 9월에 원광초급대학 설치인가를 받고, 박길진 박사의 초대 학장취임과 함께 10월에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1953년 1월 29일자로 「원광초급대학」은 발전적으로 폐지되고 4년제 「원광대학」이 교학과ㆍ국문학과 각 200여 명 편제의 총 400명 정원으로 인가되었다.  1956년 박길진 학장의 구미교육계시찰과 함께 세계불교도 대회 참석(1958) 등 각종 학술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전쟁의 폐허와 혼란한 정국에서도 교육을 통해 새로운 인재를 양성한 도전과 개척의 역사였다.
    
역사적 풍파 속의 위기와 극복 - 1960년대
이승만 정권의 붕괴와 장면 정권의 정치적 혼란 속에 쿠테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을 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조기 집행과 반공을 국시로 하여 정권에 위협이 되는 민간사회 및 종교단체 등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대학도 4년제가 폐지되어 2년제 초급대학과 4년제 각종학교인 원광대학림이 설치되는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2년 후인 1964년에 다시 4년제 대학으로 복귀하였다.
학술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상황에서도, 해외포교연구소(1962), 종교문제연구소(1967) 등을 설립하고, 대학원(1968)과 학원방송국(1969)을 설치하여 학술활동을 폭넓게 확충해 나가는 작업을 하였다. 4.19 민주화운동, 한ㆍ일 굴욕외교 반대시위(1965. 5)와 3선 개헌 반대시위(1969. 9) 등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대학의 사회적 역할을 증대하였다. 1964년 「원광문학동인회」를 결성하여 한국문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대학생 종교제는 종교간의 불신과 반목을 극복하고 대화의 장을 여는 계기를 만들었다.
    
종합대학으로의 웅비 - 1970년대
1970년 5월 종합대학교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대내외적 활동을 전개하여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정식승격 승인을 받게 되었다(1971. 12). 이듬해인 1972년 신학기를 기하여 원광대학교는 도약과 발전의 종합대학교 시대가 열렸다. 문리과대학ㆍ법경대학ㆍ사범대학ㆍ약학대학 등에 이어 농과대학ㆍ한의과대학ㆍ교학대학ㆍ공과대학ㆍ사범대학 등의 신설 및 대학교당 설립(1974), 한의과대학 부속 한방병원ㆍ치과대학ㆍ부속치과의원 등을 차례로 개원하였다.
1970년대 학생운동의 경우,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운동과 시국선언대회 등을 전국의 대학과 연계하여 전개하였으며, 학생회 방송부 주관의 원광학원 방송실 개설(1971) 및 『원광대신문』을 『원광대학신문』으로 확장 개편(1974)은 학생들의 언로를 열어 주고 원광대학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민주화 시대의 원광 - 1980년대
박정희 쿠테타 군사정권이 비극적인 막을 내리고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신군부는 종교계에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군사정권하에서도 대학은 단과대학을 발전시켜 의과대학ㆍ법과대학ㆍ경영대학ㆍ사회과대학 증설인가(1982)를 받았다.  그런 가운데, 원광대학은 초대 학장과 초대 총장을 지내면서 헌신을 다해 온 박길진 박사의 열반을 맞이하였다(1986. 12).
제5대 총장에 김삼룡 박사가 취임하여 박물관 신축개관(1987. 6), 산업대학원 설치(1988. 2), 미국 UCLA 등과 자매결연(1989. 2) 등 국내외적으로 학술 및 학생ㆍ교수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한방병원, 치과병원에 이어 1980년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설립함으로써 동ㆍ서양 의술이 상호 보완적으로 체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종합의료체계를 완비하게 된 것도 큰 성과이었다.
    
개방화와 국제화의 역군 - 1990년대
김삼룡 총장은 대내적으로 교학대학원 설치인가(1991. 11), 숭산기념관 준공, 대학발전위원회 창립 등 내실을 기하였으며, 대외적으로도 국제적 개방시대를 맞이하여 발 빠르게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 등과 자매결연(1991. 11)을 맺는 등 활발한 국제적 학술교류를 전개하였다.
제7대 총장 송천은 박사 취임(1994. 12)이후, 한의학전문대학원 설립과 함께 원광대학교 군포병원ㆍ한방병원을 개원함으로써 수도권에 교육 및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국제적으로는 학술 교류 및 종교간 대화에도 역점을 두어 국제자유종교연맹(IARF) 29차 세계대회를 원광대에서 개최함으로써(1997. 8), 국제 종교계에 원불교와 원광대학의 위상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세계를 향한 도약 - 2000년대
2000년에는 세계의 도덕중심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해 도덕 교육원을 설치하였으며, 북한동포담요보내기 통일한마당 예술공연을 세종문화회관(2001. 10) 및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개최(2002. 5)하는 등 대학의 활동영역을 지방 및 수도권대학과 확대시켜 나갔다.
제9대 총장 정갑원 교수 취임(2002. 12)과 아울러 입학관리처ㆍ대외협력처 신설(2003. 4) 및 지역기술혁신센터ㆍ여대생커리어개발센터 등을 개소식 하면서 지방대학육성 재정지원사업 우수대학으로 선정(2003. 7) 되었으며, 군사학부를 신설하여(2004. 11) 학술교류협정을 육군부사관학교와 체결하였다. 국제적으로는 중국 연대사범대학(2003. 7), 베트남 달라트대학(2004. 6) 등과 학술교류협정을 맺었다.
현재의 원광대학은 교육인적자원부 주관 교육개혁추진평가에서 지방대학 중 유일하게 7년 연속 우수대학으로 선정되었으며, 2003년 특성화 평가 최우수대학과 지방대학육성(2년 연속) 평가 우수대학으로 동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학생과 교직원을 포함한 원광 가족 2만5천여 명의 정성과 헌신이 오늘의 원광대학을 이룬 것이다.
이제 구성원들이 힘을 모으고 새롭게 변화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박 광 수 (원불교학과 교수, 대외협력처 부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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