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피해자의 발견과 피해자학의 전개

20세기 전반까지 형사법에 있어서 범죄피해자는 오랫동안 어둠 속의 존재였다. 대다수의 범죄에 있어서 범죄가 있으면 항상 그 피해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자를 문제삼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로 생각하였다. 피해자는 단지 수사하는 중에 접촉하게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사고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48년에 출간된 헨디히(Hans von Hentig)의 저서 《범죄자와 그 피해자》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헨티히는 범죄 원인에 관하여 종래의 여러 학설과 마찬가지로 범죄자를 중심으로 그 소질과 환경에 관한 논점을 검토한 후, 피해자의 존재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피해자와 가해자(즉 범죄자)의 관계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양자 사이에 전개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 후 헨티히의 주장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의 비판과 수정이 가해지면서, 오늘날에는 범죄학에서 독립한 피해자학 또는 범죄학의 특수한 분야로서의 피해자학이라는 위치를 확립하고 정착되었다. 범죄자들에 의하여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는 의미를 지닌 《victimology》란 용어는 심리학자들이 살인자에 대해 쓴 책에서 최초로 등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학문적인 용어로서 피해자학은 멘델존(B. Mendelsohn)의 논문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1950년대까지의 형사법의 관심사는 범죄자에게 한정되었다. 범죄자의 지위, 범죄행위의 원인, 형사사법제도, 교화·개선의 방법 등이 그 연구대상이었다. 그러나 범죄의 해결방안을 찾던 몇몇 범죄학자들의 관심은 서서히 피해자의 범주로 향해가고 있었다.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 이후에 와서는 범죄학자들, 사회개혁자들, 급진적 정치인들은 범죄자도 어떤 의미에서는 가난, 낮은 학력, 열악한 가정환경, 실업, 차별, 사회적 불평등 등의 피해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많은 사람들은 범죄자와 범죄피해자에 대한 대책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개인이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범죄피해자들이 너무 오랫동안 제도적으로 외면 당해왔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된 것이다.

2. 피해자학의 영역

피해자학이 피해자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문으로서 자리잡게 되자 이 분야를 어느 범위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제기되었다. 일부의 견해는 피해자학에서 다루어지는 피해자의 범위를 불법한 행위를 하는 자들로 한정짓고자 하고, 다른 견해에서는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범죄피해자의 곤경을 사고, 병, 천재지변, 사회적 참상(전쟁, 기아, 집단 대학살 등) 등의 피해자들의 고통과 비교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피해자학을 범죄학의 일부로 볼 것인가, 아니면 범죄학으로부터 독립한 고유의 학문인가가 피해자학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먼저 헨티히의 경우는 종래의 범죄원인론에 있어 결여되어 있던 피해자 문제를 범죄연구의 시야에 포함시키려는 문제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피해자 문제를 범죄학의 틀 안에서 파악하려고 하였다. 피해자학을 체계화한 독일의 슈나이더(H.J. Schneider)는 범죄학의 일부분으로서의 피해자학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에 반하여 멘델존은 고유의 과학으로서의 피해자학을 주장하고, 피해자를 단순히 범죄의 피해자로 한정하지 않고, 자연재해의 피해도 포괄하는 '일반 피해자학'(Victimologie G n rale)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에서는 피해자의 개념이 너무나 막연하며, 법제도로서 어느 범위까지 정해야 하는지가 불명확하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피해자'에 한정하는 것은 너무나 좁게 해석하고 있다고 하겠다. 만일 범죄피해자만을 취급한다면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춘 범죄학, 결국 범죄학에 대한 접근법의 하나라고 밖에 할 수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피해자학이라고 이름 붙인 이상, 범죄피해자 이외에 민법상 피해자, 상법·경제법상 피해자, 그 외에 사회생활상 본인에게 있어서 타당하지 않으며, '손해를 입었다'라고 인식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자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적어도 법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회사상과 관련하여 '피해를 받았다'라고 생각하고, 구제를 요청하려고 하는 자에 대해 현재의 법제도를 검토하며, 피해에 대응하여 무언가 법적 구제 조치를 강구할 수 있는 가능성의 유무를 검토하는 것이 피해자학의 역할이어야 하지 않을까.

피해자학자들은 피해자와 범죄자, 피해자와 형사사법제도, 피해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심층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연구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른 모든 사회 과학자들과 같이 피해자학자들은 여러 가지 가설을 시험해보고 이론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많은 자료를 수집한다. 피해자와 피해자학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관련된 법률학의 각 분야의 전문가 협력을 얻어 종합과학적으로 추진해야한다.

3. 범죄예방에 있어서의 피해자학의 기대

피해자학은 인간관계의 존재를 전제로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인적 교류'라고 하는 프리즘을 통해 범죄 및 그 주변의 사회현상을 과학적으로 검토하는 새로운 과학이라고 하겠다. 오늘날에는 절도·강도 등의 재산범에 대해서도 피해자학적 고찰이 행해지고 있다.

법치국가에서 사회적으로 신속하게 대응해야 할 문제가 발생하였다면 적절한 법적 조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법자의 태만 혹은 관료조직의 저항, 압력단체의 방해 등으로 적절한 법적 대응이 늦어지고 있어 피해가 방치되고 피해자구제가 꾀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바로 피해자학이 나서야 한다.

여기서 형법에 의한 사건해결은 최후 수단(ultima ratio)으로서 유보하고, 민사법 또는 행정법에 의한 조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경우 그에 맡긴다고 한다면, 형사법적 처리에 의하지 않는 피해자의 구제도 피해자학의 훌륭한 연구의 대상이다. 올바른 정책을 추구하기 위해서 피해자학의 입장에서 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약자(즉 고령자·소년·여성·소수 그룹 등)에 초점을 맞춘 정책의 재평가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학은 또한 입법정책에 대해서도 새로운 문제제기도 가능하다.

범죄를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소홀히 다루어지는 분야 중 하나는 바로 범죄의 공격을 받는 개인, 가정, 기업 등 범죄의 피해자에 대한 연구이다. 범죄자의 행위와 이러한 범죄자의 행위를 예방하는 차원에서의 피해자의 영향력은 많은 경우가 간과되고 있다. 만약 어떠한 특징적 성격을 지닌 사람이나 기업이 피해자가 되기 쉽고, 어떠한 장소에서 범죄가 일어나기 쉬운지 알 수 있다면 범죄예방 차원의 노력이 더 생산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어떠한 곳에서, 언제 범죄발생 가능성이 가장 큰지 일반인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곳에 순찰을 돌게 하거나 침입방지 장치를 설치한다면 범죄예방에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이 경우 개인들은 위험도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게 되기 때문에 공원에서 즐기거나 어두운 거리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때에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하여 더 많은 범죄가 예방될 수 있으며, 범죄의 두려움은 떨쳐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통의 감소, 형사사법제도의 적절한 대응, 피해자의 범죄피해 이전의 경제상태로의 원상회복 등의 논의도 피해자학의 영역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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